해랑도의 초무사 전임 등이 소장산도 등에서 남녀 70여 인을 잡은 일들을 돌아와 아뢰다
해랑도의 초무사(招撫使) 전임(田霖)과 부사(副使) 이점(李坫)이 복명하기를,
"신 등이 처음 용천(龍川)의 소위포(少爲浦)를 출발하여 이 날 신도(薪島)에 정박하여 하루를 머물고, 그 이틀날 녹도(鹿島)에 도착하여 3일을 머물고, 그 이튿날 흑두곶(黑豆串)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왕계도(往界島)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종사관(從事官) 김세균(金世鈞)·이종인(李宗仁)과 대장(隊將) 장귀인(張貴仁) 등 10인으로 하여금 포작선(鮑作船)103) 14척에 나누어 타고 구을골이도(仇乙鶻伊島)에 가서 정박하도록 하고, 이어 먼저 출발한 배로 하여금 밤중을 이용하여 해랑도에 도착하도록 했습니다. 김세균(金世鈞) 등이 그 이튿날 아침에 해랑도에 이르니, ‘인가(人家)는 이미 철거되고 다만 소 세 마리만이 밭에 놓아 먹이고 있으며, 또 사람의 발자취가 있다.’고 김세균(金世鈞) 등이 보고하기로, 신 등이 그 보고를 보고 바로 해랑도에 도착하니 김세균(金世鈞) 등이 우리를 맞이하면서 하는 말이 ‘거느린 대장(隊將)이 섬을 에워싸고 수색 체포하려는 즈음에 어고도(於古島) 동면(東面) 수우도(水牛島)에서 작은 배 2척이 와서 정박하는 것을 보고, 대장(隊長) 김익광(金益光) 등이 앞뒤에서 협격(挾擊)하니 저들이 활을 당겨 쏘면서 체포에 항거하였지만 김익광(金益光)은 화살을 쏘고 총을 놓아 구자모지(仇自毛知) 등 4명을 사로잡아서 곧 본도(本島)104) 의 사람들이 간 곳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섬 서쪽 2일 노정(路程)의 소장산도(小長山島)에 옮겨가서 살고 있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시 종사관(從事官) 성순동(成順仝)·정극인(鄭克仁)·이종인(李宗仁)·김세균(金世鈞)과 위장(衛將) 허함(許瑊)·유미(柳湄)와 대장(隊將) 등으로 하여금 포작선(鮑作船) 26척에 나누어 타게 하여 녹도(鹿島)을 거쳐 밤중을 이용하여 이튿날 아침에 소장산도(小長山島)에 이르러 남녀 70명을 사로잡고, 또 바위구멍을 수색하여 31명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19 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호구-이동(移動) / 외교-명(明)
○海浪島招撫使田霖、副使李坫復命啓曰: "臣等初發龍川 少爲浦, 是日泊薪島留一日。 翌日到鹿島留三日, 翌日到黑豆串, 翌日到徃界島。 翌日使從事官金世鈞ㆍ李宗仁、隊將張貴仁等十人, 分乘鮑作船十四艘, 往泊仇乙鶻伊島, 仍令先發船, 乘夜抵海浪島。 世鈞等於翌日朝, 至海浪島, 人家則已撤, 只有牛三頭放牧于田, 且有人迹。 世鈞等報狀, 臣等見報, 直抵海浪島, 世鈞等迎謂曰: ‘所率隊將環島搜捕之際, 於古島東面水牛島見小船二艘來泊, 隊將金益光等挾擊之, 彼人等張弓發矢拒捕。 益光發射放砲, 捕獲仇自毛知等四名。’ 仍問其本島人物去處, 答曰: ‘移居于島西二日程小長山島。’ 卽令從事官成順仝、鄭克仁、李宗仁、金世鈞, 衛將許瑊、柳湄及隊將等, 分乘鮑作船二十七艘, 由鹿島乘夜而往, 平明至小長山島, 捕獲男女七十口, 又搜巖穴, 擒三十一口。"
- 【태백산사고본】 10책 3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19 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호구-이동(移動)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