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금부에서 백성을 구휼하고 토목공사 등을 정지하여 백성의 힘을 풀게 할 것을 청하다
의정부가 서계(書啓)하기를,
"세종조에서 최윤덕(崔潤德)에게 명하여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평안도의 군사 수효가 3만 6천여 명 이상이 되었는데, 이것이 지금부터 60여 년 전입니다. 국가에서 그동안 휴양하고 생식(生息)하여서 군사의 수효는 예전보다 배가 넘어야 할 것인데, 지금은 겨우 1만 8천 9백 60입니다. 평안도는 나라의 서쪽 관문으로서 전조(前朝)028) 말기에 있어서 원(元)나라가 쇠해진 무렵, 홍건적(紅巾賊)의 남은 무리가 동쪽으로 내달아 나왔는데, 이 도가 먼저 그 칼날을 받아 강물이 터지듯 생선이 썩듯 지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적의 형세가 강성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병력이 적고 약해서 스스로 떨치지 못하여서입니다. 지금은 중국이 무사하니 만에 하나라도 이런 염려는 없겠지만, 말세의 일을 미리 짐작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야인(野人)이 우리 변방의 환란거리가 되어 방어가 제일 긴요한데 현재의 병력이 이런 수효밖에 안 되니, 어찌 몸에 부닥친 병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이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은 본도 연변 각진(各鎭)의 겨울·여름 방수(防戍)가 진실로 백성의 힘을 축소시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1년에 세 번씩 명나라 서울로 가는 행차가 있어 보내고 맞이하는 말 바리에 수고로움이 막심한데, 일행 중 통사(通事) 등의 여러 관공(官公) 무역품, 포목 외에 사사로이 가져가는 물화가 많으면 7∼8천여 필에 이르며, 금·은 등속은 우리 나라에서 나지 않고 금법에 실려 있는 것이지만 역시 몰래 가지고 가는 것이 많으며, 기타 함부로 가져가는 잡물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이것을 모두 호송군(護送軍)에게 책임지워 실어가게 합니다. 이래서 백성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역(苦役)을 면하려고 요동 동팔참(遼東東八站)으로 몰래 들어가는 자가 잇달아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설된 탕참(湯站) 봉황성(鳳凰城)은 의주(義州)와 서로 바라다 보이는 하루길의 거리로서 백성들이 들어가서 숨기에 그 형세가 매우 쉬우니 어찌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그윽이 보면, 조종조에서는 명나라 서울로 가는 사신이 떠날 때에는 따로이 대관(臺官)029) 을 보내어서, 불법으로 물화를 가지고 가는 자를 수색 검찰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 그 물건을 몰수하였으니, 이것은 임시로 권도를 써서 폐단을 없애는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다시 이와 같은 고사(故事)를 행한다면 이 역시 백성의 힘을 회복하고, 군사 수효를 증가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겠습니다.
또 연전, 상의원(尙衣院)·제용감(濟用監) 및 의사(醫司)에서 무역하는 포목 도합 4천 8백 30여 필을 서울에서 압록강(鴨綠江) 가에까지 실어 수운하였는데, 역로(驛路)의 솨잔·피폐가 바로 이런 데서 오는 것입니다. 신 등이 역시 바라는 것은, 지금부터는 성상의 의복·거처 등에 소용되는 것 외의 기타 매우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무역하는 것을 금하여 백성의 힘을 소생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또 평안도 각진에 방수(防戍)하는 자 중 타도의 군사는 자연 서로 번갈아 쉬지만 토병(土兵)은 사시(四時) 언제나 방수하여 쉬는 적이 없으니, 그 고생이 다른 도 군사에 배나 되어서 사세가 반드시 유리 도산(流離逃散)하게 되어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회복시키는 조건을 해사(該司)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여 시행하소서."
또 백성의 기쁨과 걱정은 수령(守令)에게 달렸으니, 수령이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이 어찌 수족을 놀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변방 고을에 보직된 자는 거개가 무인(武人)을 쓰니, 저들이 어찌 품어 편안하게 하고 사랑하여 기르는 도를 알겠습니까. 관문 변방의 궁핍 곤고한 백성을 잔혹 포학한 무인 관리로 몰아치게 하니, 어찌 모두 흩어져 도망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원하옵는 것은 변방의 수령은 반드시 문무를 겸한 사람을 써서, 일이 있을 때에는 몸소 칼과 활을 차고 적과 싸우고, 일이 없으면 백성들을 권하여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항산(恒産)이 있게 한다면 거의 유리 도망하는 일이 자연 그치고 군사의 수효도 날마다 늘어날 것입니다. 또 의주의 관노과 군민(軍民) 등은 서울 및 개성부(開城府) 부상(富商)들의 포목 등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 서울에 가는 행차가 있을 때마다 정한 수효 외에 견련(牽連)되어 남몰래 요동(遼東)으로 가서 중국 물품을 바꾸는 자가 서로 잇따릅니다. 이렇게 하기를 말지 않는다면 모리(謀利)하는 무리가 분분하게 왕래하며 기사(欺詐)·쟁투(爭鬪)하여 중국에서 일을 일으키는 자도 반드시 있을 것이니,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금후로는 전처럼 함부로 다니고 그래도 검찰하지 않으면 의주의 관리와 데리고 가는 단련사(團練使)·서장관(書狀官) 등을 모두 죄 주어서 불법 외람의 폐단을 막게 하소서.
또 조종조에서 팽배대(彭排隊)030) 군졸 3천 명을 설치하여 다섯 교대로 나누고 월급을 주어서 토목 공사에 나가게 하며, 보정병(步正兵)은 무기를 가지고 왕궁을 시위하고, 수군(水軍)은 배를 타서 해구(海寇)를 막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궁궐·공청[公廨]의 수리와 여러 왕자·군(君)들의 제택(第宅) 조성(造成)의 공사가 크게 일어나는데, 팽배대 군졸의 수효가 적어 부득이 번상(番上) 보병과 당령(當領) 수군을 공사에 충당하고 독려하기를 매우 촉박하게 하니,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거개 사람을 사서 그 일을 대신하게 합니다. 그 대신 일하는 값이 매우 높아서 보병은 두 달 동안에 면포로 17∼18필이나 되며, 수군은 20여 필이니, 재산을 다 털어도 갚지를 못하여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서로 잇따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시 여러 포구에서 초하루·보름과 별례(別例)의 물선(物膳)·진공(進供)이 있고, 또 무시로 있는 예장(禮葬)과 매년 압도(鴨島)에서 달줄기[薍] 베는 일에 모두 수군을 부리니 쉴 날이 없이 날마다 소모 이산하게 됩니다. 신 등은 바라옵건대,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팽배대 군졸은 각각 그 수효를 채우고, 만일 영선(營繕) 등의 일에 있게 되면 급료를 주어 일 시키기를 한결같이 조종조의 고사(故事)와 같이 하고, 수군·보병으로는 각기 본일에 힘쓰게 하면 공사도 폐지되지 않고, 도망·유리하는 폐단도 없을 듯합니다. 또 근래는 해마다 흉작이었고 지난해에는 더욱 심하여 겨울부터 곡식이 귀하였으며 지금 와서는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바라다 보일 정도이니 백성의 생활이 극도로 어렵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불급한 일은 제하고,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정사에만 전념하더라도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거듭 백성의 힘을 곤하게 함이겠습니까.
근일 들으니, 진성 대군(晉城大君)의 집을 짓고 벽제역(碧蹄驛)·내응방(內鷹坊)031) 을 수선하며 또 감악산(紺岳山) 신당(神堂)의 제청을 고쳐 짓는데 수군이 1백 40일의 역사를 하고, 마니산(摩尼山) 재궁(齋宮)의 전사청(典祀廳)을 고쳐 짓는데 수군이 1백 1삭(朔)의 역사가 있다 합니다. 이런 일에 있어서 군인들 한 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중에도 더욱 어려운 것은 양식을 가지고 다니는 일입니다. 대저 대군의 집은 진실로 지어야 하는 것이지만, 오늘에 있어서는 불가하고 가을을 가다려 짓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벽제역에 있어서는 지금 무너질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며 내응방에는 원래 좌·우 응방이 있는데 어찌 반드시 급급히 더 지을 것입니까. ‘시세가 곤궁한데 사치스러운 일을 하는 것’을 《춘추》에서는 기롱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내리신 명을 빨리 거두시고 때를 기다려서 거행하여 백성의 힘을 풀게 하소서."
하였는데, 살피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6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00 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군사-부방(赴防) / 외교-야(野) / 교통-마정(馬政) / 교통-육운(陸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28]전조(前朝) : 고려조.
- [註 029]
○丙申/議政府書啓曰:
世宗朝命崔潤德, 征建州衛時, 平安道兵額, 至三萬六千有奇。 距今六十餘年, 國家休養生息, 兵額宜倍蓰於昔, 而今僅有萬八千九百六十。 平安一道, 國之西門。 在前朝末, 値元衰季, 紅巾餘賊, 奔突而東, 此道先受其鋒, 如河決魚爛, 莫之能支。 非惟(賦)〔賊〕 勢强盛, 當時兵力寡弱, 不自振而然也。 方今中國無事, 萬無此慮, 然末世之事, 未敢逆料。 況今野人爲我邊患, 防禦甚緊。 見在兵額, 只有此數, 豈非切身之病乎? 臣等日夜思之, 本道沿邊各鎭, 冬夏防戍, 固已蹙民力矣。 又有一年三次赴京之行, 送迎騎駄, 勞憊莫甚, 而在行通事等, 諸官公貿易品布外, 私齎物貨, 多至七八千餘匹。 至如金銀, 我國所不産, 載在禁章, 而亦多潛持。 其他濫齎雜物, 不可勝數, 皆責護送軍輸轉。 由是, 民不堪命, 規免苦役, 潛投遼東東八站者, 比比有之。 況今新設湯站、鳳凰城, 距義州相望一日之程。 民之投竄, 其勢甚易, 豈不可慮? 竊見, 祖宗朝赴京使臣之行, 別遣臺官, 搜檢濫持物貨者, 治其罪, 而沒入其物。 此一時權宜, 救弊一事也。 今宜復行故事, 亦蘇復民力, 增益兵額之一助也。 且年前尙衣院、濟用監及醫司貿易布, 摠四千八百三十餘匹。 自京抵江上, 駄載轉輸, 驛路殘弊, 職此之由。 臣等亦願自今服御所用外, 其他不甚緊要之物, 禁絶貿易, 以蘇民力。 且平安道各鎭防戍者, 他道軍士則自相番休, 若土兵四時常防, 曾無休歇, 其苦倍他, 流離逃散, 勢所必至。 其蘇復條件, 請令該司磨鍊施行。 且民之休戚, 係於守令, 守令非其人, 則民安所措手足乎? 今之補邊郡者, 率用武人, 彼豈知懷綏字牧之道哉? 關塞窮苦之民, 馭之以酷暴武吏, 幾何不胥而流亡哉? 臣等願邊方守令, 必用文武兼資之人, 使有事則身佩櫜鞬, 以與敵從事; 無事則勸民力穡, 使有恒産, 庶幾流亡自止, 兵額日增矣。 且義州官奴、軍民等, 多受京中及開城府富賈布物, 每於赴京之行, 數外牽連, 潛往遼東, 換易唐物者相屬。 若此不已, 則謀利之徒, 紛紜往來, 欺詐爭鬪, 生事於上國者, 必有之矣, 豈細故哉? 今後似前冒行, 而不能檢察, 義州官吏及領去團練使、書狀官等, 率皆科罪, 以杜冒濫之弊。 且祖宗朝設彭排隊卒三千, 分五番, 給月廩, 使赴土木之役。 步正兵持兵, 衛王宮, 水軍乘船, 備海寇而已。 近年以來, 宮闕、公廨修葺, 諸君第宅造成, 功役繁興, 而彭排隊卒數少, 不得已以番上步兵、當領水軍充其役, 程督甚迫, 力不能堪, 率皆賃人代其役, 役價甚重, 步兵二朔綿布, 至十七八匹, 水軍則二十餘匹, 傾財破産, 猶不能償, 逃散者相繼。 加以諸浦朔望及別例進供物膳, 又有無時禮葬、每歲鴨島刈薍, 皆役水軍, 曾不得息肩, 日就耗散。 臣等願依《大典》, 彭排隊卒各充其數, 如遇營繕等事, 給料役之, 一如祖宗朝故事, 令水軍、步兵, 各供本役, 庶幾功役不廢, 而無逃散、流離之弊矣。 且比來連年不稔, 去歲尤甚。 自冬穀貴, 今則餓莩相望, 民生極艱矣。 雖自今蠲除不急之務, 專意恤民之政, 猶懼不濟, 況興土木之役, 重困民力乎? 近聞, 晋城大君第造成, 碧蹄驛、內鷹坊修繕, 又有紺岳山神堂祭廳改造, 水軍一百四十日之役, 摩尼山齋宮、典祀廳改造, 水軍一百一朔之役。 前項軍人其身之苦, 不暇論也, 尤其所難者, 贏糧也。 夫大君第, 固所當營, 然在今日則不可, 待秋爲之未晩。 至於碧蹄驛, 當時不至頹壞, 內鷹坊本有左右鷹坊, 何必汲汲增營乎? 時屈擧贏, 《春秋》譏之。 伏願亟收成命, 待時而擧, 以紓民力。
不省。
- 【태백산사고본】 10책 36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400 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군사-부방(赴防) / 외교-야(野) / 교통-마정(馬政) / 교통-육운(陸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