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이 평안도에 인구가 줄었으니 범죄자로 하여금 가서 살게 할 것을 청하다
경연에 납시었다. 장령 고형산(高荊山)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함경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변방에 옮긴 인민들을 보니 지극히 영락 쇠진했습니다. 국가에서 백성을 북도로 옮길 때에는 밭갈이할 땅을 골라서 주고서 3년을 한하여 복호(復戶)019) 와 면세를 하여 주니, 위무 구휼하는 도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령들이 거개가 위무 구휼하여 주지 않으며, 주었다는 전토도 유명무실하여 이익을 얻지 못하니 무엇으로 살 밑천을 삼겠습니까. 청하옵건대 지금부터는 감사로 하여금 밭갈이할 만한 전토를 선택하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 왕이 좌우 사람들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성준(成俊)이 아뢰기를,
"변방에 옮긴 사람들이 안접(安接)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감사와 수령이 위무 구휼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니, 장령의 아뢴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여러 가지 일을 총결(總決)하니, 어느 겨를에 친히 전토를 선택하여 옮긴 백성에게 주겠습니까. 청하옵건대 옛 법을 거듭 밝히고 수령을 신칙하여 옮긴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옵소서."
하고, 고형산이 아뢰기를,
"만일 관원을 보내어 조사해서 그들에게 준 전토가 혹시라도 이름만 그 수효를 채운 자가 있을 경우에는 수령을 즉시 파출(罷黜)케 명한다면 거의 그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준이 아뢰기를,
"지금 평안도에서는 군사와 백성이 희소하여 예전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계축년, 최윤덕(崔潤德)이 서정(西征)할 때에는 평안도 군사가 2만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다만 1만뿐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옮겨간 백성들을 안접하지 못하여 날로 영락 쇠진하여져서 군사가 적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백성을 옮겨 안접하는 시책은 역시 옛 법을 거듭 밝혀야 하는 것뿐입니다. 만일 부하고 실한 자를 뽑아서 들어가 살게 한다면 반드시 원통 억울함이 있겠지만, 범죄자가 있을 경우 이들을 모두 옮겨 살게 한다면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고형산이 아뢰기를,
"신이 함경도에 있으면서 역로(驛路)의 폐단을 보았는데, 홍원(洪原)에서 단천(端川)까지가 남도(南道)가 되고, 길성(吉城)에서 명천(明川)까지가 북도가 되는데, 그 중간에 고산(高山)·거산(居山)·수성(輸城) 등의 3대 역(驛)이 있습니다. 남도 병사(兵使)는 북청(北靑)으로 본영(本營)을 삼는데, 만일 삼수(三水)·갑산(甲山)에 적변(賊變)이 있어도 시기에 맞추어 달려가 구원합니다. 그런데 북청에서 갑산까지가 3백 30리요, 그 사이에는 제인관(濟人館)·종포(鍾浦)·웅이(熊耳)·허천(虛川) 등의 역이 있고, 갑산에서 삼수까지가 2백 10리인데, 그 사이에는 적생역(積生驛)이 있습니다. 다만 이 역들은 큰길이 아니기 때문에 한 역에 말이 겨우 2∼3 필밖에 없습니다. 병사의 행차에는 군관·반인(伴人) 등 허다한 사람들이 있으니, 말 짐바리가 반드시 많은지라 부득이 남도의 역마(驛馬)를 뽑아 가지고 가는데, 다만 기한에 맞추려고 달리느라면 죽는 말이 자못 많으니 정말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제인관·적생 등 역에는 큰길의 예에 의하여 마필(馬匹)을 많이 세우고 우리(郵吏)를 더 두어서, 남도 거산 등 역의 폐해를 제거하여야 합니다. 곧은 길의 우역(郵驛)에도 그 폐해가 적지 않은데 야인(野人)이나 대소 사객(使客)이 왕래할 때에 진상하는 물품의 수송 등으로 마필을 쉴 때가 없습니다. 또 고산역의 폐단으로 말하면, 본영을 함흥(咸興)으로 하고 안변(安邊) 등의 관아에서 진상하는 물품을 모두 함흥에 바쳐서 서울에 이르게 하는데, 그 왕래에 모두 역마를 사용하여 실어 나르고 부족하면 혹 소바리로 실어 나르며, 소가 부족하면 남녀가 지고 이고 하여도 지탱하지 못하니,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개 각역에는 대·중·소에 따라 마필이 원래부터 정하여진 수가 있으며, 이보다 앞서 그 말 수에 따라서 위전(位田)020) 을 주고 공수전(公須田)021) 의 일수(日守)022) 역시 수를 채워 주기 때문에 역로가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신년023) , 양전(量田)할 때에는 〈역이 있는 곳을〉 길의 대·중·소를 생각하지 않고 당시 마필의 유무(有無)만 따라서 주었기 때문에 역로가 날이 갈수록 더욱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해에, 병조에서 역로를 회복하는 계책을 아뢰었는데, 함경도의 곧은 길은 큰길의 준례대로 하라고 하시었습니다. 법은 이러하지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신이 전에 감사(監司)와 함께 본도의 역로를 회복시킬 계책을 아뢰었는데, 청하옵건대 곧 그대로 시행하옵소서. 그리고 그 말의 위전(位田)과 공수전(公須田) 및 일수(日守)는 그 〈역로의〉 대·중·소에 따라 수에 준하여 주고, 역리가 희소한 곳은 역시 각사(各司)의 노비(奴婢)로 충당 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병조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상고하여 본 후에 처치하겠다."
하였다. 고형산이 다시 아뢰기를,
"홍백경의 범행은 지극히 중하오니 청하옵건대 그 죄를 깊이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들어 주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398 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호구-이동(移動)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교통-마정(馬政) / 농업-전제(田制) / 사법-탄핵(彈劾)
- [註 019]복호(復戶) : 충신·효자·절부가 난 집의 호역을 면제하여 주던 일.
- [註 020]
위전(位田) : 수확을 향사(享祀) 등의 일정한 목적에 쓰기 위하여 장만한 전토. 위토(位土)라고도 함.- [註 021]
○辛巳/御經筵。 掌令高荊山曰: "臣嘗爲咸鏡道都事, 見徙邊人民至爲凋殘。 國家移民於北道, 擇給可耕之地, 限三年復戶免稅, 其所以撫恤之道非不至也, 然守令等率不撫恤, 其所給田土, 有名無實, 人不得利, 何以資生? 請自今令監司, 檢擇可耕田土以給。" 王問左右, 領事成俊曰: "徙邊人等, 不得安接者, 專由監司、守令不能撫恤也, 掌令之啓是矣。 然監司摠決庶務, 何暇親擇田土, 以給徙民乎? 請申明舊章, 勅守令恤徙民。" 荊山曰: "若遣官審視, 而其所給田土, 或有虛張其數者, 則守令卽命罷黜, 庶無其弊。" 俊曰: "今者平安道軍民鮮少, 視古半減。 癸丑年崔潤德西征時, 平安道軍士至於二萬, 今則只一萬而已。 專是不能安接徙民, 日益凋殘, 以致軍士之少也。 如此, 則徙民安接之策, 亦當申明舊法而已。 若抄富實者, 使之入居, 則必有冤抑, 如有犯罪者, 皆令徙居, 則何怨之有?" 荊山曰: "臣在咸鏡道, 見驛路之弊。 自洪原至端川爲南道, 自吉城至明川爲北道, 其中有高山、居山、輸城等三大驛。 南道兵使以北靑爲本營, 若於三水、甲山有賊變, 則及期奔救。 自北靑至甲山三百三十里, 其間有濟人館、鍾浦、熊耳、虛川等驛, 自甲山至三水二百一十里, 其間有積生驛。 但此驛等非大路, 故一驛馬纔二三匹。 兵使之行, 有軍官、伴人, 許多徒衆, 其騎駄必多, 不得已抄用南道驛馬。 但及期奔馳, 馬斃者頗多, 誠非細故。 臣願濟人館、積生等驛, 依大路之例, 多立馬匹, 增置郵吏, 以祛南道居山等驛之弊。 且直路郵驛, 其弊不貲, 如野人及大小使客往來, 進上物膳輸轉, 馬匹無休息之時。 且以高山之弊言之, 本營爲咸興, 而安邊等官進上之物, 皆納于咸興, 達于京都。 其往還皆用驛馬輸轉, 不足則或以牛畜駄載, 牛畜不足, 則男負女戴, 猶不能支, 其苦不可勝言。 各驛大中小路馬匹, 本各有數, 而前此隨其馬數, 給其位田, 公須田、日守亦准數充給, 故驛路得以蘇復。 戊申年量田時, 不計大中小路, 但隨其馬匹有無而給之, 故驛路日益凋耗, 而前年兵曹啓驛路蘇復之策, 令咸鏡道直路, 如大路之例。 法雖如此, 有何益哉? 臣前與監司議啓本道驛路蘇復之策, 請卽遵行, 而其馬位田、公須田及日守, 隨其大中小路, 准數給之, 驛吏稀少處, 亦以各司奴婢充定何如?" 王曰: "令兵曹考節目後發落。" 荊山曰: "洪伯慶所犯至重, 請深治其罪。" 不聽。
- 【태백산사고본】 10책 3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398 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호구-이동(移動)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교통-마정(馬政) / 농업-전제(田制) / 사법-탄핵(彈劾)
- [註 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