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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34권, 연산 5년 7월 22일 경진 1번째기사 1499년 명 홍치(弘治) 12년

김계종의 죄를 논한 대간의 상소를 내려주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다

김계종의 죄를 논한 대간의 소(疏)를 내려주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 소에 이르기를,

"《서(書)》에 이르기를 ‘하늘의 오전(五典)313) 을 펴서 다섯 가지를 돈독케 하였다.’ 하였습니다. 강상의 도와 병이(秉彝)314) 의 이치는 하늘에서 나오고 사람에게서 갖추어지는 것이므로, 사람으로서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나라로서 이것이 없으면 나라가 아니니, 남의 상(上)이 된 자로서 어찌 강상을 부식하여 풍교(風敎)를 바로잡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법은 한나라당나라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므로, 삼강(三綱)이 바르고 만목(萬目)이 종속되어, 안으로는 규문(閨門)이 엄숙하여 인륜이 위에서부터 밝아지고, 교화가 행하여 선비의 풍습이 아래에까지 바로 되며, 돈전(惇典)으로써 가르치고, 명형(明刑)으로써 보도(輔導)하면서도 오히려 강상이 혹시 문란하여 인류의 기강이 확립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며, 한 번이라도 패상 난속(敗常亂俗)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미세한 죄라 할지라도 용서치 않고 그 죄안(罪案)에 기록하여 그 이름을 패상(敗常)이라 하여 그로써 인심을 단속하고 원기를 유지하였으니 이것이 조종의 바꿀 수 없는 좋은 법도입니다. 성종의 상을 당하여 모든 신하들은 반호벽용(攀號擗踊)315) 하는데, 김계종(金繼宗)은 최복(衰服)을 입고 음탕한 짓을 거리낌없이 자행하였습니다. 김계종궁마(弓馬)316) 에서 출신하여 본래 무식한 한 무부(武夫)였는데, 성종께서 항오(行伍)의 사이에서 발탁하여 2품의 반열에 두었으므로, 김계종으로서는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종천(終天)의 통한이 마땅히 항정에 만 배가 되어야 할 터인데, 이 어찌 국가가 애통하는 날을 한 몸의 종자(縱恣)하는 때로 삼아 금수의 행위를 자행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을 참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인자(人子)의 죄로서는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인신(人臣)의 죄로서는 불충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이를 법으로서 다스린다면 죄안에 기록하여 종신토록 폐고(廢痼)할 뿐만 아니라, 중벌에 처하여도 오히려 그 죄를 속하기에 부족하게 여겨야 할 것인데, 지금 그 아들이 그아비의 죄를 면하고자 함을 인하여 다시 심리하고 그 죄안을 삭제하도록 하시니, 신 등은 국법이 이로부터 허물어져서 악한 짓을 한 자가 징계되는 바가 없고, 강상이 이로부터 문란하여져서 인도(人道)가 거의 종식될까 염려됩니다.

신 등은 또 《대전(大典)》의 천거조(薦擧條)를 살피옵건대, ‘대소의 인원이 패상의 죄를 범하면 천거한 사람도 아울러 처벌한다.’ 하였으니 이는 한갓 죄안에서 기록할 뿐만 아니라, 천거한 사람을 아울러 처벌하게 한 것은, 진실로 패상의 죄가 중하기 때문입니다. 금과 옥조(金科玉條)317) 가 소상하게 중외에 선포되었고, 성자 신손(聖子神孫)318) 이 이를 준수하여 어기지 않았으니, 이러한 정사를 준수하되 금석과 같이 굳게 하고 이러한 법령을 시행하되 사시와 같이 미덥게 해야 가합니다. 만약 김계종의 죄를 애매하다고 한다면, 애당초 이를 추국할 때에 조관(朝官)을 뽑아 보내어 그를 반복 심문하여 죄상을 추궁하였으므로 사증(辭證)319) 이 구비하여 일호의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으며, 또 조옥(詔獄)320) 에 내려 상세히 심문하고 그 이름을 3부에 써서 붙였는데 무슨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어서 반드시 4∼5년이 지난 후에 규면(規免)321) 케 하려 하십니까. 전일의 추핵(推覈)322) 이 저와 같이 상진(詳盡)하였는데 도리어 아니라 하시니, 지금의 추변(推辨)323) 은 4∼5년이 지난 후에 있었으므로 그 능히 자세히 다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 자세히 다하지 못한 옥안(獄案)을 믿으시고 그 자세히 다한 옥안을 믿지 아니하시와, 굳이 신 등의 말을 거절하시고 전일 그 옥사를 친히 간여한 재상에게 청문(淸問)하지 않으시니, 신 등의 의혹이 자심하옵니다. 전하께서 만약 물으시면 저들 역시 대신인데, 어찌 은휘하여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대저 자식이 아비에게 그 죄를 면하기 위해서는 사연을 만들고 말을 꾸밈에 있어서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인데, 전하께서 만약 이를 좇아 허락하신다면 후일에 김계종을 본받아 그 죄를 도피하고자 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터이니, 전하께서 그를 장차 모두 좇아 고쳐 주시겠습니까. 김계종으로 하여금 재주가 있다 하여 서북의 유사시에 쓰게 하시려면 백의 종군(白衣從軍)이란 것이 예로부터 있는 일인데, 하필 죄안을 삭제하고 녹용(錄用)하여 국가의 법령을 파기한 후에 그 효과를 거두려 하십니까. 하나의 행실이 없는 무부를 위하여 조종 만세의 성헌(成憲)을 훼손하시니, 신 등은 그 통석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대신은 마땅히 직도(直道)로써 임금을 섬기고 비의(非義)로 인도해서는 안 되는데, 지금 헌의하는 자는 한갓 일시의 기필하기 어려운 이익만을 보고, 만세토록 바꾸지 못할 강상을 파괴하고자 하니, 기강의 문란과 법령의 훼손이 이로부터 비롯되므로 신 등은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대신들의 부정한 의논을 취하지 말으시면, 강상을 위하여 다행하고 국가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옵니다."

하였다. 윤필상이 의논드리기를,

"애당초 수의할 때에 혹 애매한 듯하므로 이와 같이 의계(議啓)하였사오나, 지금 대간의 상소를 보건대 옛날에도 백의 종군하는 사례가 있었다 하니, 서정에 공이 있은 후에 임용한들 어찌 늦겠습니까."

하고 신승선은 의논드리기를,

"김계종의 재주는 군려(軍旅)에 능하므로 서정 때에는 이를 버릴 수 없을 듯하며, 비록 군중일지라도 전일의 재상에게 위호(位號)가 없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니, 이미로 전일의 직함을 칭하여 종군하게 하였다가 성사한 후에 임용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정문형은 의논드리기를,

"전일 김계종의 아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수의할 때에 신은 의논드리기를, ‘김계종의 죄범은 비록 중하다 할지라도 율문(律文)의 거상가취조(居喪嫁娶條)324) 에는, 그 죄가 종신불서(終身不敍)325) 에는 이르지 아니한다 하였는데, 하물며 김계종은 무재가 탁이함에리까. 진실로 종신토록 버릴 수 없으므로 그 무재를 취하여 임용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으며, 그 4∼5년이 지난 후에 다시 심리하는 일은 본의가 아닙니다만, 율문(律文)이 이와 같으며, 또 패상안(敗常案)은 조종조의 《원육전(元六典)》·《속육전(續六典)》326) 에도 그러한 규정이 없습니다."

하고 승지 권주는 아뢰기를,

"상소의 내용은 오로지 죄안의 삭제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이오나, 의논은 죄안의 삭제에 대한 적당 여부는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뜻이 약간 다른 듯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시 수의하라."

하였다. 윤필상·어세겸·정문형이 의논드리기를,

"김계종을 종군하도록 허락한 후에 그 군공(軍功)을 상고하고 그 죄안을 삭제하고 서용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는 다시 의논하도록 함이 어떠하옵니까."

하고, 신승선은 의논드리기를,

"김계종이 만일 전쟁에 이기고 공을 세운다면 서용하게 될 터이니, 그 패상안(敗常案)을 삭제하는 것도 또한 그 중에 있는 것이므로 신의 앞서 드린 의논도 이와 같을 뿐이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들의 뜻이 분명치 못한 것 같다. 만약 김계종이 자기를 위해 발명하였기 때문에, 죄안의 삭제가 옳으면 삭제하는 것이 옳다 할 것이요, 김계종이 비록 발명하였을지라도 오히려 미진함이 있다면 삭제함은 옳지 않다 하여 그 분변을 한 가지로 해야 옳은 것인데, 지금의 의논은 ‘공을 세운 후에 죄안을 삭제하고 녹용(錄用)해야 한다.’ 하니, 설혹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고도 대공을 세우면 속죄되어 사형을 면할 수 있지만, 자기의 흔구(痕咎)327) 는 공으로써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김계종을 종군시켜 공을 세워 그 죄안이 삭제되게 한다면 이는 한갓 그 공만 알고 그 흔구의 유무는 관계치 아니함이니, 그 삭제의 여부는 서정(西征)에서 공을 세운 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저 불충한 죄는 대간이 미워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니, 이를 정승들에게 상세히 전달하여 하나로 귀착시켜 의계(議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필상이 의논드리기를,

"김계종의 일에 관해서는 서울과 지방의 관련된 사람들이 장형(杖刑)을 받고는 전일에 무복(誣服)한 일을 발명하였으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혹 애매한 듯하였는데, 지금 대간의 번갈아 올린 소장을 보옵건대, ‘전일의 추국이 실로 상밀하여 하나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데, 지금 경솔하게 추국을 다시 하여 죄안을 삭제하니, 지극히 부당하다.’ 하니, 이는 사연이 엄정하고 의리가 정당한 말이며, 전일의 추국이 실로 그 정에 합치하온지라, 가령 이를 종군케 하여 공을 세운다 할지라도 어찌 죄안을 삭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어세겸은 의논드리기를,

"김계종의 일은 그 범행을 자신 및 사증인(辭證人)들이 모두 이미 자백하였으므로 일찍이 논결(論決)하여 죄안에 기록한것인데, 지금 다시 심리한 죄안의 사연을 고찰하건대, 모두 전일의 공초(供招)와는 상반되니, 4∼5년이 지난 후에 그 사증인들이 김계종의 원수가 아니라면 어찌 김계종을 위하여 힘쓰지 아니하겠습니까. 이것이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의심스러운 일이 있다면 명백한 발명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찌 갑자기 죄안을 삭제하겠습니까. 다만 김계종은 무재가 탁이하여 가벼이 버릴 수 없으니, 정토할 때를 당하여 만약 대공이 있으면 또한 의논할 만한 대상이 되므로 신 등이 전일의 의논에서 운운하였던 것입니다."

하고 정문형은 의논드리기를,

"김계종은 당초 범죄에 대하여 이수언(李粹彦)을 보내어 추국할 때에, 사증이 모두 자복하였고, 김계종이 의금부에 들어가서도 사실을 자백하므로 죄안에 기록한 것이니, 이는 적실하다 할 수 있는데, 지금 4∼5년이 지난 후에 다시 추국한 사연에 대하여 발명하게 하니, 모든 사증이 무슨 혐의가 있어서 당시의 사증을 변경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뜻으로는 다시 추국한 것이 적실하지 못하니, 그 죄안을 삭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윤필상이 의논을 좇았다.


  • 【태백산사고본】 9책 3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69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윤리-강상(綱常)

  • [註 313]
    오전(五典) : 사람이 행해야 하는 다섯 가지의 길, 즉 5상(常)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서경(書經)》 고요편(皐陶篇)에 보임.
  • [註 314]
    병이(秉彝) : 사람이 지켜야 할 상도.
  • [註 315]
    반호벽용(攀號擗踊) : 군주 또는 부모의 상사를 당하여 매우 슬피 울며 가슴을 두드리는 것.
  • [註 316]
    궁마(弓馬) : 활 쏘고 말 달리는 일.
  • [註 317]
    금과 옥조(金科玉條) : 금이나 옥과 같이 귀중히 신봉하는 법칙이나 규정.
  • [註 318]
    성자 신손(聖子神孫) : 제왕의 자손을 높여 말한 것임.
  • [註 319]
    사증(辭證) : 재판에 필요로 하는 증인의 증언을 말함.
  • [註 320]
    조옥(詔獄) : 임금의 조서(詔書)를 받들어 범죄자를 구금하는 것. 의금부의 옥을 말함.
  • [註 321]
    규면(規免) : 핑계를 만들어서 면죄하는 것.
  • [註 322]
    추핵(推覈) : 죄인을 추문하여 사실을 밝혀내는 것.
  • [註 323]
    추변(推辨) : 법관의 심문에 대한 죄인의 변명.
  • [註 324]
    거상가취조(居喪嫁娶條) : 부모의 상중에 있으면서 시집가거나 장가드는 것을 말함.
  • [註 325]
    종신불서(終身不敍) : 사대부의 범죄에 대한 처벌의 일종. 종신토록 관작에 서용하지 않는 것. 또는 영불서용(永不敍用)이라고도 한다.
  • [註 326]
    《원육전(元六典)》·《속육전(續六典)》 : 《원육전》은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은 《경제속대전(經濟續大典)》을 말함, 《경제육전》은 이조 태조 6년에 조준(趙浚) 등이 육전(六典)의 형식을 갖추어 만든 법전이고, 《경계속육전》은 이조 태종 13년에 하윤(河崙) 등이 《경제육전》 편찬 뒤에 나온 교지(敎旨)·조례(條例)를 모아 만든 법전. 오늘날 모두 전하지 않음.
  • [註 327]
    흔구(痕咎) : 흉과 허물.

○庚辰/下臺諫論金繼宗疏, 命議于大臣, 其疏曰:

《書》曰: "天敍五典, 五惇哉!" 綱常之道、秉彝之理, 出於天而具於人, 人而無此則非人, 國而無此則非國。 爲人上者, 可不扶植綱常, 以正風敎乎? 我朝家法, 遠邁, 三綱正, 萬目擧, 內則閨門肅, 而人倫明於上; 外則敎化行, 而士習正於下。 惇典以敎之, 明刑以弼之, 猶懼綱常之或紊, 而無以立人紀也。 一有敗常亂俗者, 則雖細不宥, 錄其罪案, 名曰敗常。 以此隄防人心, 維持元氣, 此祖宗不易之令典也。 當成宗初喪, 群臣攀號擗踊, 金繼宗冒衰宣淫, 靦然無忌。 繼宗出身弓馬, 本一無識武夫。 成宗拔於行伍之間, 置諸二品之列, 使繼宗少有人心, 則終天之痛, 當倍萬恒情矣。 是何以國家哀痛之日, 爲一己縱恣之辰, 肆行禽犢之行, 至於此極乎?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夫人子之罪, 莫大於不孝; 人臣之罪, 莫大於不忠。 若以法繩之, 不惟錄案廢錮終身而已, 當置之重典, 猶不足贖其罪也。 今因其子欲免其父之罪, 使之更理, 而削其罪案, 臣等恐國法自此毁, 而爲惡者無所懲; 綱常從此紊, 而人道或幾乎息矣。 臣等又按《大典》薦擧條: "大小人員犯敗常之罪, 則竝坐擧主。" 非徒錄案, 竝與擧主而罰之者, 誠以敗常之罪重也。 金科玉條, 昭布中外, 聖子神孫遵而勿失。 執此之政, 堅如金石; 行此之令, 信如四時可也。 若以繼宗之罪爲曖昧, 則當初推鞫之時, 選遣朝官, 盤問窮詰, 辭證俱備, 無一毫可疑, 而又下詔獄, 參詳訊鞫, 書名三府, 有何可疑之端, 而必使規免於四五年之後耶? 前之推覈, 如彼其詳盡, 而反以爲未也, 今之推辨, 在於四五年之後, 則其不能詳盡明矣, 而殿下信其不詳盡之案, 不信其詳盡之案, 而固拒臣等之言, 不賜淸問於前日親莅宰相, 臣等之惑滋甚。 殿下若問之, 則彼亦大臣, 容有隱乎而不言之以實哉? 夫子之於父, 欲脫其罪, 搆辭飾說, 無所不至。 殿下若從而許之, 則後之効尤繼宗, 欲逃其罪者必多矣, 殿下其將盡從, 而改之耶? 使繼宗爲有才, 可用於西北有事之日, 則白衣從征, 古有其事, 何必削案錄用, 毁棄典常然後, 可收其效也? 爲一無行武夫, 壞祖宗萬世之成憲, 臣等不勝痛惜。 大臣當以直道事君, 不可導之以非義。 今之獻議者, 徒見一時難必之利欲, 壞萬世不易之綱常, 亂紀毁法, 自此而始, 臣等尤切痛心。 伏願殿下, 亟收成命, 勿取大臣不正之議, 綱常幸甚, 國家幸甚

尹弼商議: "當初收議時, 恐或曖昧, 如此議啓。 今觀臺諫之疏, 古有白衣從征之事。 西征有功後錄用, 何晩?" 愼承善議: "金繼宗之才, 長於軍旅, 西征時恐不可棄也。 雖軍中, 前日宰相無位號, 亦未安, 權稱前銜從征, 而事成之後錄用, 未晩。" 鄭文炯議: "前日因繼宗子上言, 收議時臣議: ‘繼宗所犯雖重, 律有居喪嫁娶之條, 罪不至終身不敍。 況繼宗武才卓異, 固不得終身棄之。 取武才而用之可也。’ 其更理於四五年之後事, 非臣本意。 但律文如此, 且敗常案, 祖宗朝《元》《續六典》之所無。" 承旨權柱啓: "疏意則專爲削案未便, 而議則不言削案當否, 意似少異。" 傳曰: "其更收議。" 弼商世謙文炯議: "繼宗許令從征後, 考其軍功, 其削案、敍用等事, 更議何如?" 承善議: "金繼宗若戰勝立功, 則可以錄用, 削敗常案, 亦在其中。 臣之前議, 如是而已。" 傳曰: "政丞之意, 似未分明。 如以繼宗爲己發明, 可削案則當議云可削謂繼宗雖發明, 猶有未盡, 則當議云不可削, 分辨從一可也, 而今議以立功後, 削案、錄用。 設有人犯罪當死, 而建大功, 則可以贖而免死, 如自己痕咎, 不可以功而獲免。 假令繼宗從征立功, 而得以削案, 則是徒以其功, 不由其痕咎之有無也, 削與否, 不在西征立功之後。 大抵不忠之罪, 非徒臺諫惡之, 凡人皆惡之, 其詳傳于政丞等, 歸一議啓。" 弼商議: "繼宗之事, 京外事干各人, 受杖發明前日誣服之事, 臣意恐或曖昧。 今觀臺諫交章云: ‘前日之鞫, 實爲詳盡, 無一可疑。 今輕易改鞫削案, 至爲不當。’ 此語辭嚴義正, 前推實合其情。 假令從征立功, 何得削案?" 世謙議: "繼宗事, 其所犯, 當身及辭證人皆已服招, 已曾論決錄案。 今考更理案辭, 悉反前招。 四五年之後, 其辭證人等, 非繼宗之仇, 寧不爲繼宗之地乎? 此可疑也。 如有可疑, 不可謂明白發明, 奚遽削案? 但繼宗武才卓異, 不宜輕棄。 當征討之時, 若有大功, 則亦在可議之數, 故臣等前議云云。" 文炯議: "繼宗當初犯罪, 遣李粹彦推鞫時, 辭證皆服。 繼宗入禁府服招錄案, 可謂的實矣。 今乃四五年之後, 更發明推辨, 諸辭證, 有何嫌而不變辭乎? 臣意更推爲不的實, 案不可削。" 從弼商議。


  • 【태백산사고본】 9책 34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69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윤리-강상(綱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