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한치형 등이 왕이 학문을 닦고, 언로를 열고, 상벌을 공정히 할 것 등을 아뢰다
의정부 좌의정 한치형·우의정 성준·좌찬성 이극균·우찬성 박건·좌참찬 홍귀달·우참찬 신준이 삼가 상언하기를,
"신 등은 모두 용렬하고 거친 재질로서 의정부에 봉직하오매 직위는 크고 사람은 미약하므로 항상 책임을 메꾸지도 못할까 두려워하오나, 오직 알고 있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이 성은(聖恩)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게 되므로, 삼가 10개 조항의 좁은 소견을 진술하여 한가하실 때 보기를 바랍니다. 말이 비록 졸렬하오나 사리에 있어서는 모두 간절하오니, 혹 버리지 않으시고 채납(採納)해 주신다면 반드시 근소한 도움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유심(留心)하시기를 바랍니다.
1. 인주의 일신은 만물의 종주이며, 인주의 일심은 만화의 근원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천하의 근본은 한 나라에 있고, 한 나라의 근본은 한 집에 있고, 한 집의 근본은 한 몸에 있다.’ 하였으며, 동자(董子)122) 는 말하기를, ‘인군은 마음을 바로잡음으로써 조정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로잡음으로써 백관을 바로잡고, 백관을 바로잡음으로써 만민을 바로잡는다. 마음을 바로잡지 않고 몸을 닦지 않고서 천하와 국가가 다스려지거나, 백관과 만민이 바르게 되는 일은 없다.’고 하였으며, 전(傳)123) 에 이르기를, ‘그 몸을 닦으려면 먼저 그 마음을 바로잡고, 그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려면 먼저 지(知)를 치(致)해야 하는 것이니, 지를 치함은 물(物)을 격(格)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격물(格物)·치지(致知)라고 하는 것은 박학(博學)·심문(審問)하여 알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말함이요, 학문하는 길이 무엇이냐 한다면 이는 꾸준히 힘쓰는 데 있을 뿐입니다. 옛날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고하기를, ‘생각의 종시(終始)를 학문에 전(典)한다.’ 하였으니, 이는 시종의 일념을 학문에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인(詩人)이 성왕(成王)을 칭송하기를, ‘학(學)이 집하고 희하야 광명함이 있다.[學有緝熙于光明]’ 하였으니, 이는 계속 광명하여 잠시도 중단함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그러하므로, 고종은 상나라의 영왕(令王)이 되었고, 성왕은 주나라를 수성(守成)한 현주(賢主)가 되었사오니 학문의 공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제왕의 학문은 범상한 사람들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문장과 구절을 분석하여 이동(異同)을 고찰·비교함은 강설(講說)을 일삼는 선비들의 일이요,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고 기묘한 것을 연구하여 아름다운 문구를 늘어놓는 것은 조전(雕篆)124) 을 일삼는 선비들의 일이므로 이는 모두 인군의 힘쓸 바 아닙니다. 인군의 학문으로서 가장 귀중히 여기는 바는, 옛날 성현들의 마음씀과 역대의 치란·흥망의 자취, 입정·입사(立政立事)하는 요령,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물자를 증식하는 방법을 보고 이를 마음에 체득하여 정치에 시행할 따름입니다. 그러하오나 도를 바라봄에 성의를 다하지 아니하거나 다스림을 구함에 혹 긴밀히 힘쓰지 않다가 중도에서 폐하는 이가 없지 않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자(天資)가 고명하시고 또 큰 뜻을 품고 계시니, 옛날의 성군들을 우러러 보신다면 어디로 간들 미치치 못하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춘추가 아직 젊고 학문을 두루 하지 못하시어, 그 경서와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성현들의 치심(治心)·양성(養性)의 요령과 역대의 치란·흥망의 사적에 있어서는 아직 터득하지 못한 바 있사오니, 이는 바로 일신우신(一新又新)하여도 날이 부족할 때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오늘에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아니하고 내일이 있다고 하지 말 것이며, 금년에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대저 학문을 위하는 공부도 그 급함이 이와 같거든 하물며 인군의 학문이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옵서는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납시되 사소한 일 때문에 폐하지 마시고, 내일과 내년으로 미루지 마시고, 또 날로 밤까지 계속하여 조금도 철폐함이 없이, 해[年]를 거듭하시면 자연히 견문이 넓어지고, 지혜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또 모름지기 정학(正學)을 숭상하시와 이제·삼왕(二帝三王)125) 의 존심·출치(存心出治)의 법을 스승으로 삼으시고, 경서와 사기 이외에, 백가중기(百家衆技)류와 부화무실(浮華無實)한 글을 이목에 접하거나 총명에 남기지 아니하오면, 자연히 성학(聖學)이 더욱 고명하시고 치도(治道)가 더욱 융성할 것입니다.
‘태어날 때는 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끝내 선한 자는 드물다.[靡不有初鮮克有終]’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의 상정입니다. 천하의 일이 그 처음이 선하면 그 끝도 또한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이 선하고 그 끝이 선하지 않는 자는 있어도, 그 처음이 선함이 없이 그 끝이 선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옛사람은 처음을 조심하였던 것입니다.
옛일을 참고하오면, 중훼(仲虺)는 성탕(成湯)에게 고하기를, ‘그 끝을 조심함은 오직 그 처음부터입니다.’ 하였고, 이윤(伊尹)은 태갑(太甲)에게 고하기를, ‘끝을 삼가되 처음에서 하라.[愼終于始]’ 하였고, 소공(召公)은 성왕(成王)에게 고하기를, ‘지금 하늘이 그 철(哲)을 명하실까, 길과 흉을 명하실까, 아는 것은 이제 우리 초복(初服)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시작을 마땅히 삼가라는 말입니다. 정월은 1년의 시작이요, 삭일(朔日)은 1월의 시작이며, 초정(初政)은 국가 천백 년의 시작입니다. 천문을 잘 관측하는 사람은 첫달·첫날의 기후로써 1년 끝날까지의 기상을 점치게 되고, 인주의 치도를 잘 관찰하는 사람은 초정에서 천백 년의 안위(安危)를 엿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시작이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옵서 백성 위에 임하신 지 6년이 되었사오나, 미래의 앞날은 아직 백년의 장구한 세월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초정(初政)인지라 국가 천백 년의 치란과 안위가 실로 오늘에 달려 있으니, 근신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옵서 선종(鮮終)126) 의 경계를 거울삼아 근시(謹始)127) 의 도를 착실히 하시와 출입·기거에도 혹 소홀함이 없어야 하고, 호령을 반포하여 시행함에 있어서도 혹 정당하지 아니함이 없어야 하며, 어진 사람에게 국사를 맡기면 두 가지의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하고, 간사한 사람을 제거함에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를 어기면서 백성의 기림을 구하지 말며, 백성들을 거슬려서 자기의 욕심에 따르도록 하지 말 것이며, 작은 선이라 하여 아니하지 말고, 작은 악이라 하여 아니 고치지 말 것입니다. 말이 귀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에서 찾아보며 말이 뜻에 공손하거든 반드시 비도(非道)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가까이 하지 말고, 그 길이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며, 교화를 돈독하게 풍속을 순후하게 하여, 절검(節儉)을 숭상하고 안일을 경계하며 천계(天戒)를 조심하고 민은(民隱)을 불쌍히 여기옵소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 어진 사대부를 접하는 때가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친하는 때가 적어야 하며, 경(敬)으로써 일을 지어 잠시도 예태(豫怠)128) 하는 때가 없어야 하고 평상시에 백성들의 질고를 돌봄에 있어서 마치 적국의 외환이 다가오는 듯이 생각하시오면, 자손 만대에 포상(苞桑)129) 이 굳건함과 반석의 편안함이 그 길이 바로 여기에 있사오니 유심하시기를 바라옵니다.
1. 언로(言路)는 인주가 이로 말미암아 좋은 정치를 행할 수 있는 길입니다. 언로가 넓으면 천하의 착한 일이 모두 이로 인하여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천하의 입이 모두 나의 과실을 말할 수 있으므로 선은 사람에게 막히지 아니하고 악은 나에게 머물지 아니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고서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로가 막히면 상하가 막히고 끊어져 인주는 귀머거리와 같이 들리는 것이 없고 소경과 같이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선이 사람에게 있어도 이를 취할 줄을 모르고 악이 몸에 있어도 이를 버릴 줄을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고서야 아무리 나라를 다스리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옛날에는 관(官)과 사(師)가 서로 규정하고, 장인[工]은 일거리를 잡고 간할 수 있어 언로가 넓었지만,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고 간고(諫鼓)130) 를 달고 방목(謗木)을 설치하고도 오히려 남이 자기의 과실을 말하여 주지 아니할까 두려워했습니다. 늙은이와 행인에게도 말[言]을 빌고, 꼴베고 나무하는 사람에게까지 말을 묻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착한 사람, 한 가지의 착한 일이 혹 빠뜨려질까 두려워한 때문이었습니다. 순(舜)·우(禹)·탕(湯)은 대성(大聖)이시니, 사람에게서 취할 바가 없었을 듯한데, 또 비근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여 착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하고 간하는 말을 좇아 어기지 아니함으로써 화락한 태평의 치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다른 데에 있겠습니까. 후세에 간언을 좋아하는 임금으로서 당나라 태종(太宗)만한 이가 없지마는 정관지치(貞觀之治)131) 가 점차 처음보다 못하여 위징(魏徵)의 상소가 나오게 된 요인이 있었으니, 마음의 잡고 놓음[操捨]의 덧없음이 두려울 뿐입니다.
우리 조정 열성(列聖)의 치도의 융성함은 진실로 옛날 성군에 양보할 것이 없었사오며, 성종께옵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미덕은 근고에 없던 일이요 자손 만대의 귀감이옵니다.
전하께서 대업을 이어받아 조종으로부터 쌓아온 업적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하신다면, 그것은 언로를 열어 널리 받아들이시며 중선(衆善)을 합하여 나의 것으로 하는 것뿐입니다.
대저 언로가 넓지 못하게 되면 폐단이 셋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옳다는 것[自是]과, 끼이는 마음[有挾]과 회의(懷疑)입니다. 인주가 고명한 자질을 믿고 스스로 옳고 남들은 자기만 못하다고 한다면, 아첨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고 충직한 말은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존(至尊)의 세력을 끼고 내 말대로 하고 아무도 나를 어길 수 없다고 한다면, 아랫사람은 명령한 바를 순종할 뿐 다시는 오가는 복역(復逆)이 없을 것입니다. 의심하는 끝을 갖고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사람마다 모두 두 마음을 가지므로 진심·극언(盡心極言)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로가 막히고 상하의 정이 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위로 순(舜)·우(禹)의 호선(好善)과 성탕의 종간(從諫)을 스승으로 하시고 다음으로 당 태종을 거울삼으시며 가까이는 성종을 계승하시어, 위의 세 가지 폐단을 힘써 제거하시고 뭇사람의 선을 겸취하사 그 말이 쓸 만하면 바로 시행하시고 설사 쓸 만한 것이 못 되더라도 또한 너그럽게 포용하시며, 기휘에 저촉하거나 분에 어긋나는 일이 있더라도 만약 다른 정실이 없다면 또한 특별히 관용하여 직사(直士)의 기운을 북돋아 주소서. 또 어떤 장주(章奏)이든 치도에 관계되어 거울삼을 만한 것이 있으면, 그냥 보아 넘기지 말고 간직해 두고 늘 살피소서. 또 외조(外朝)의 신하들도 또한 주례에 의하여 윤번으로 면대하사 각자 소회를 진달하도록 하시오면, 사람들은 그 마음을 다할 것이고 아래의 정은 모두 상달될 수 있으므로 치도에 매우 다행한 일이옵니다.
1. 인주의 호상(好尙)132) 은 근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나침이 있다.’ 하였으며, 옛날 상수(商受)133) 가 주정을 부리매 조가(朝歌)134) 사람들이 다 주정하였으며, 초왕(楚王)135) 이 가는 허리를 좋아하매 궁중에 굶어 죽은 자가 있었습니다. 위에서 좋아하는 바 있으면 아래가 지나치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또 왕표(王豹)136) 가 기수(淇水)에 처하매 하서(河西) 사람들이 노래를 잘 하였고, 면구(緜駒)137) 가 고당(高唐)에 처하니 제우(齊右) 사람들이 노래를 잘 하였으며, 화주(華周)와 기량(杞梁)138) 의 아내가 그 지아비를 위해 곡하매 그 나라의 풍속이 변하였다고 합니다. 저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으로서도 오히려 사람을 변화시킴이 이와 같거든 하물며 인주이겠습니까. 인주가 군사를 좋아하면 무사들이 그 용맹을 자랑하려 하고, 재물을 좋아하면 취렴(聚斂)하는 신하들이 한번 그 꾀를 드리고자 생각하며, 토공(土功)을 좋아하면 궁실을 잘 짓는 공장이 그 기교를 팔고자 생각하고, 전렵(田獵)을 좋아하면 몰이를 잘하는 자가 그 민첩한 솜씨를 드러내려 하며, 사화(詞華)를 좋아하면 경조 부박(輕躁浮薄)한 유가 다투어 나오고, 아첨을 좋아하면 영행(佞倖)의 무리들이 답지합니다. 아랫사람이 위의 좋아함을 따름이 이와 같으니, 어찌 조심하여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옛것을 좋아하되, 민첩하게 이를 구한다.’고 하였으며,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위에서 인(仁)을 좋아하는데, 아래에서 의(義)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위에서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효도를 일으키고,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백성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위에서 외로운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면, 백성들이 패리(悖理)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성현(聖賢)들의 호상하는 바는 이와 같으며, 거기에 좇아 교화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옵서 천명을 새로 받으시고 또 당우 삼대(唐虞三代)의 치도에 뜻을 두시니 마땅히 이와 같이 하셔야지 어찌 저와 같이139) 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옵서 그 좋아하시는 바를 삼가 이제 삼왕이 천하를 다스린 도로써 표준을 삼고, 인의·충서·효제(仁義忠恕孝悌)를 먼저 하고, 군사와 재리를 좋아하지 아니하심으로써, 신민의 모범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모두 정도에 돌아가게 하신다면 치체(治體)에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1. 상과 벌은 인주의 대병(大柄)입니다. 상으로써 선을 권하고 벌로써 악을 징계함은 하늘이 봄으로써 만물을 생육하고 가을로써 만물을 숙살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지가 생과 살이 없으면 세공(歲功)을 완성할 수 없고, 인군이 상과 벌이 없으면 한 세상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므로, 상과 벌은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공경 대부(公卿大夫)의 작위와 거마금백(車馬金帛)의 보물은 상(賞)의 도구이며 유방찬축(流放竄逐)과 편태폄출(鞭笞貶黜)의 차등은 벌의 도구입니다. 그 공의 대소를 보아 상의 차등을 두고, 그 죄의 경중에 의하여 벌의 고하를 둡니다. 그 벌이 그 죄에 맞지 않음을 남(濫)이라 하고, 상이 그 공에 맞지 않음을 참(僭)이라 합니다. 남하면 벌로써 악을 징계하지 못하고, 참하면 상으로써 선을 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과 벌로써 권징하지 못하면, 인군이 무엇으로써 일세를 어거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벌의 사용을 밝고 신중하게 하심으로써 옥사에 억울한 죄인이 없었사온데, 근자에 또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전지를 내리시와 무고한 사람이 잘못 걸려들고 경한 죄수가 오래도록 수검될까 염려하시고 또 죄적(罪籍) 중에서 현능(賢能)으로 의논됨직한 자에게는 특별 은전을 시행하시니 호생하는 덕이 여기에 더하겠습니까. 다만 상주는 일에 있어서 혹 의논할 것이 있습니다. 옛날 주공(周公)이 대훈로(大勳勞)가 있으므로 천자가 예악을 내리었는데 이에 대하여 선유(先儒)들은 이르기를, 어비이를 섬김에는 증자(曾子)만 하면 효자라고 할 수 있다 하였으나, 맹자(孟子)는 다만 가하다만 했을 뿐 일찍이 증자의 효를 원만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뜻은 대개 자식된 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해야 하므로 주공의 공이 비록 크지마는 모두 신하의 직분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직분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비록 약간의 공이 있다 하여 상주지 아니함을 말한 것입니다. 지난번 법에 저촉되어 사형에 처한 자가 많았는데, 당시의 참국관(參鞫官)은 다 중한 상을 받았고 수개월 간에 뛰어 승급한 자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양도(兩道) 감사같은 이는 다만 치계(馳啓)한 공으로써 역시 가자되었습니다. 명을 받아 죄인을 심문한 것이 무슨 공이며, 첩보에 의하여 상달함이 무슨 수고입니까. 이는 특히 직무상 작은 일이온데 시상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만약 위국(衛國) 안민(安民)의 훈공과 참적건기(斬敵搴旗)의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다면, 이는 무엇으로써 상주시렵니까.
그러하오나 지나간 일은 추론할 것이 아니오니 원컨대 지금부터 명기(名器)를 아끼고, 공로를 참작하여 상과 은전을 남용하지 마옵소서. 그 죄에 그 형이 맞는가 깊이 살피어 정실에 맞게 되면 그들을 불쌍히 여길지언정 기뻐하지 마옵소서. 차라리 불경(不經)140) 의 실을 범할지언정 혹시라도 남용하지 않는 것은 애오라지 상과 벌이 중을 얻고[賞罰得中], 권과 징에 도가 있도록[勸懲有道] 함입니다. 옛날 제왕의 훌륭한 치적도 이렇게 하는 데에 불과하오니, 오직 살피시옵소서.
1. 국가에서 관(官)을 설치하고 직(職)을 나누어 대소의 관원으로 하여금 서로 유지하게 함은 대개 체통이 확립되고 정령이 문란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의 6조는 즉 주관(周官)의 6경으로, 각기 요속을 거느리고 진퇴하며 각 관서 또한 해조의 지휘를 받고 감히 이를 뛰어넘어 처리할 수 없음이 국법입니다.
내수사(內需司)가 맡은 것은 전곡과 노비입니다. 무릇 국가의 모든 전곡은 호조가 주관하고, 노비는 형조가 주관합니다. 내수사 또한 형조의 소속이온데, 지금 본사의 전곡과 노비의 출납은 해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주하여 시행함은 자못 체통이 없는 일입니다. 근일 본사가 계청하기를, ‘함경도 각 고을에 소속된 노비의 신공(身貢)은 본도가 수납하되 그 가치에 준하여 경창(京倉)의 곡과 교환하고, 평안도 각 고을에 있는 곡물도 또한 본도가 수납하되 경창의 미곡을 받아 본사가 쓰도록 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였으며, 이는 모두 호조가 아는 바 없이 바로 아뢰어 한 것입니다. 조정의 사체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팔도 조세 중 경창에 납입하는 것은 오직 6도뿐이온데, 경상도는 왜인들에게 지급하는 비용이 많으므로 상납하는 수량이 적으며, 함경·평안 양도가 세곡의 전량을 본도에 납부하기 때문에 경창의 비축이 겨우 백만에 달하니, 군국의 수요가 애통한 처지이거늘 내수사의 계청이 해마다 이와 같으니, 대창(大倉)의 저축이 마침내 얼마나 지탱하겠습니까. 청컨대 지금부터는 내수사의 전곡·노비 등사는 모두 해조의 전계(轉啓)에 의하여 시행케 함으로써 국가의 체통을 보존하시옵고, 양계(兩界)의 포물과 곡물은 경창의 미곡과 교환함을 허락하지 마심으로써 국름(國廩)을 튼튼히 하옵소서.
또 감로사(甘露寺)·회강사(檜剛寺)의 노비들에게 진고(陳告)하는 길을 열어 줌으로 인하여 무릇 공천과 사천들은 그 본역(本役)을 싫어하여 모두 내수사에 투속(投屬)합니다. 그 아비를 아비로 하지 아니하고 그 어미를 어미로 하지 않으며 주인을 배반하고 적을 이탈하여 본궁의 노·비라 모칭(冒稱)하여 선두안(宣頭案)141) 에 등록하는 자가 잇달으니 심히 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공천은 그렇다 하더라도 사족(士族)의 집은 겨우 있는 1노(奴)·1비(婢)를 일조에 빼앗기고 나면 생활이 갑자기 끊어지게 되는데 이 어찌 통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양사가 거의 90년 동안 노비의 후손을 가리고자 하였건만 어찌 그 실정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근년에 혹 사천(私賤)을 변경하여 내수사에 소속시키라는 명이 계시온데, 제왕은 천지를 일가로 삼고 만물을 일신으로 삼으니 모든 백성의 소유가 다 나의 소유이거늘 어찌 피차를 구분하시어 하필 그 신분을 바꾸어 사유로 하옵니까. 청컨대 이제부터 내수사가 진고한 환역(換易)을 일체 금단하심으로써 공도(公道)를 보이소서.
1. 천지의 생재(生財)에는 일정한 수가 있으며, 세공(歲貢) 또한 정액이 있습니다. 사치하게 쓰면 재물을 손상하고, 재물을 손상하면 반드시 백성을 해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지금 종척과 대신의 죽음에 규정된 부의가 후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온데, 또 별사(別賜)가 있으며, 환시(宦侍)와 의관(醫官)에게는 법에 부여할 수 없게 되었는데 별부가 또한 많으며, 혹은 척리(戚里)의 집에 특사하는 쌀과 콩이 백여 석에 이르고, 포물도 이와 대등합니다. 또 수시로 입내(入內)하라는 명이 있는가 하면 내수사로 수납(輸納)하라는 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해의 횡간(橫看)142) 외의 별용물을 적이 상고하건대, 쌀·콩이 2천 9백여 석, 면포가 3천 6백여 필. 횡포가 1천 9백여 필, 기름·꿀이 90여 석이며, 기타 부비(浮費)는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비축한 물량이 간혹 핍절되면, 후년의 공물을 인납(引納)하라고 별도로 청합니다. 대저 항산(恒産)을 갖고 있는 백성이 늘 적어 당년의 공물을 내기도 어려운 일이온데, 하물며 인납(引納)이겠습니까. 청컨대 경상비 이외의 기타 부비(浮費)는 일체 줄여서 민폐를 제거하시고 국용을 충족하게 하옵소서.
1. 각사(各司)의 노비는 그 신역이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그 중에서도 각종 물품을 공상(供上)하는 관서의 노비는 그 수고가 더욱 심하므로 대부분이 그 노역을 꺼려하여 다른 관서로 투속하며, 간 자의 노역은 남은 자가 맡게 되므로 이를 감당할 수 없으면, 또 온갖 술책을 다하여 이속(移屬)하기를 꾀하니, 이로 말미암아 각 관서의 노비는 날로 줄고 달고 줍니다.
사온서(司醞署) 같은 데는 원노(元奴) 28명에서 25명이 이속하고 지금 3명이 남아 있으며, 사재감(司宰監)에는 원노 57명에서 48명이 이속하고 지금 9명이 남았으며, 기타 관서도 이와 같으니,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지 못하면 수년이 못 되어 각 관서의 노비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궐내 및 각처의 부득이한 차비노(差備奴)와 같은 것은 진실로 줄일 수 없겠으나, 원각사(圓覺寺) 내불당(內佛堂)의 소제하는 일은 그 상주하여 불공하는 승도들이 합력하여 자체에서 하도록 하옵소서. 공천을 뽑아 만든 조라치[照剌赤]143) 와 좌우 응방(鷹坊)의 시파지[時波赤]144) 의 수가 적지 아니하온데 또 조착인(鳥捉人)을 두어 공천으로써 충정(充定)하며, 공조 상의원(尙衣院)의 장인(匠人)은 본래 정원이 있는데 또 전습장(傳習匠)이란 명칭을 붙여 모집하여 온 인원 또한 많으며, 기타 불긴한 노비에게 증명서를 발급함도 또한 이러한 유입니다. 각 관서의 잔폐가 실로 이 때문이오니, 청컨대 해사(該司)로 하여금 그 경중을 참작하여 이속된 모든 노비는 본 관서로 도로 예속시키고 만약 도로 예속시킬 노비가 없으면 기내(畿內)에 거주하는 공천 중 충실한 자를 뽑아 그 수를 충당하고, 그 번을 교대하여 서로 휴식하도록 하며, 외안(外案)에 등록된 공천으로서 서울에 거주하는 자 또한 많으니 각 관서로 하여금 각자의 뿌리를 캐어 해조에 이보하여 그 관서에 역속(役屬)토록 하옵소서.
착조장(捉鳥匠)·전습장(傳習匠)이 없어서는 아니된다면 서울에 거주하는 보충대의 보정병(步正兵) 및 각종 보인(保人)으로써 충당하고, 원각사 내불당의 조라치도 만약 개혁할 수 없다면 선상노(選上奴)145) 로써 선정하여 잔폐한 각사(各司)를 충실케 하옵소서.
1. 물산은 그 지방의 토질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혹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일정하지 아니하온데, 물산이 많다면 만 일(鎰)146) 도 귀할 것이 없고, 없거나 적다면 수냥(銖兩)147) 도 천 균(鈞)148) 보다 중한 것입니다.
우(禹)임금이 공물을 제정함에 있어 구주의 공물을 다르게 하였으니, 곧 양주(楊州)의 우·모·치·혁(羽毛齒革)을 청주·서주[靑徐]에 공납시키지 않았고, 양주(梁州)의 유·철·은·누(鏐鐵銀鏤)를 연주·예주[兗豫]에 징수하지 않았으며, 문왕(文王)이 기주(岐周)를 다스림에 있어서 만민이 오직 정당하게 바치는 공물을 백성들에게 받을 때는 한도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자가 말하기를, ‘우임금은 나의 뜻과 차이가 없다.’ 하셨고, 주공(周公)은 문왕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만민을 다 화평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우·모(羽毛)는 동북도의 산물로 일컬어져 태반이 그 곳의 산물이며 기타 도는 조금 있거나 전연 없습니다. 지난번 독수리 날개로써 화살을 장식한다 하여 각도에 징납하도록 하였사온데, 이는 실로 병기의 비품이지 완구는 아니옵니다. 그리고 이는 희귀한 물건이라 공상하기 실로 어려운 까닭에 신 등이 그 수량을 감하도록 주청하여 윤허를 얻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적 또한 많습니다. 그러하오나 실지로 진상하는 수량이 아직도 과다하옵니다. 이것은 그 지방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그 관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모두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백성이 만약 갖고 있지 않을 때엔 그 값을 거둬 시전에서 구입하여야 하는데, 1우의 값이 비싼 것은 포물(布物) 5∼6필에 달하오니, 가령 한 고을에서 다만 두어 개를 공상한다 하더라도 한 고을 백성이 다 같이 그 값을 내야 되오니, 이 어찌 작은 폐단이겠습니까.
근일 남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을 보고 남방의 소식을 물었을 적에, ‘다만 독수리 깃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고통스럽다.’고 한 말을 듣고, 비로소 백성들이 아직도 이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어찌 그들이 성상께서 감수(減數)한 것이 은혜됨을 알겠습니까.
대저 주상께서 백성들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함에 있어서 그 지방에서 산출되지 아니한 물품을 책출하오면 이를 괴로워하고, 전례가 없는 일을 시키면 이를 싫어하는 법입니다. 독수리 깃[鷲羽]은 남방에서는 산출되지 아니하며 또 전례도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의례적으로 진상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는 것은 조금도 괴이쩍을 것이 없습니다. 속담에 ‘옛것을 폐하지도 말고 새 것을 세우지도 말라.’ 한 말은 민정에 순하라는 말이오니, 청컨대 독수리 깃의 진상을 폐지하여 민생을 편안하게 하소서.
또 사라·능단(紗羅綾段)과 서적·약석(書籍藥石) 같은 유는 우리 나라에 없는 것으로, 매번 명나라에 가는 길에 무역하여 국용(國用)에 충당해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선왕 때에 무역 물건은 정한 수량이었는데, 근일에는 점차 많아졌습니다. 중국산 물품과 국산 물품은 그 가격이 현격하여 우리 나라의 만전(萬錢)이 겨우 중국의 백전(百錢)에 해당합니다. 1년 동안 공무역(公貿易)으로 들여온 저·마포(苧麻布)의 총수는 3천 7백여 필에 달하며, 이를 면포로 계산하면 1만 8천 6백여 필로 이것만으로도 국고가 거의 바닥이 나는데, 게다가 사신의 접대가 잦고 이웃 나라의 청 또한 저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용도가 호번하니 미리 준비치 않을 수 없으며, 복어(服御)149) 와 서적·약재 등물은 마땅히 폐할 수 없는 것이오나, 기타 긴요하지 아니한 물품은 그 무역의 양을 감소하여, 국고의 저축을 넉넉하게 함도 또한 절검(節儉)하는 길이오니 굽어살피시기를 바라옵니다.
1.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 되는 지역으로 모든 부역이 각도에 비하여 배중하며, 게다가 연해 각군의 백성에게는 생선을 진상하게 하니 그 폐가 더욱 심합니다.
지금 1년간 진상하는 수량을 계산하면, 각전의 탄신 및 이름 있는 날에 진상하는 총수가 7백 18미, 대일차(大日次)·소일차(小日次)의 총수 4천 8백 미, 또 수시로 진상하는 곡연(曲宴)150) 또한 2천여 미에 달합니다.
이것은 모두 감사(監司)가 각읍·각포에 책출하고, 각읍·각포는 또 소재 백성들에게서 거두는데 백성들이 스스로 주선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 값을 내고 생선가게에서 구입하게 됩니다. 이익만을 노리는 장사꾼은 남의 급한 사정을 노리고 그 값을 더욱 올리므로 1미의 값이 많은 것은 면포 3∼4필에 이릅니다. 대저 한 마리의 값이 이에 이른다면, 그 고기의 귀함을 가히 알 수 있고 이를 사서 공납하는 자의 괴로움도 상상할 수 있사옵니다.
살피옵건대 대일차(大日次)·소일차(小日次)는 조종 때에는 없었던 것인데 지난번 한두 감사가 시작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하나의 전례로 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백성들의 고통거리로 된 것입니다. 연안의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작은 사고가 아닙니다. 조종조에는 일차(日次)의 진상이 없었어도, 그 부족함을 보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지금 사옹원(司饔院) 소속 어부들이 날마다 공상하는 수량이 결코 옛날보다 감소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일차·소일차 중 그 하나만은 감하여 경기의 고을 백성들을 소생케 하옵소서.
외방 각도와 기현(畿縣)의 관계는 사지(四肢)와 사람에 비교됩니다. 한 손가락이 아파도 마음이 오히려 아프거늘 하물며 사지가 다 병듦이겠습니까. 지금 각도가 다같이 병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봉상시(奉常寺)의 제포(祭脯)는 1년간 수납하는 수량이 총 6백 50접이며, 사옹원(司饔院)의 1년간 진상은 전라도 편포(片脯) 1천 8백 개·장포(長脯) 84접, 경상도가 편포 1백 80개·장포 78접, 충청도가 쾌포(夬脯) 1천 4백 96근, 황해도가 장포 1백 접, 강원도가 쾌포 2천 1백 27근, 함경도가 2천 8백 51근인데, 이는 모두 노루와 사슴이 아니면 만들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대저 노루와 사슴은 생산되는 곳도 있고 생산되지 아니하는 곳도 있으며, 옛날보다 지금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것인데, 각 고을의 공납은 피차·금석의 차이도 없으며 이미 고정된 수량이 정해져 1개 1근이라도 부족하게 바칠 수는 없습니다. 또 수령은 이것이 전최·출척(殿最黜陟)에 관계되므로 반드시 그 백성들을 강압하여 공납하게 합니다. 물산은 한정이 있는데 원액은 줄지 않으며, 민력은 곤폐하였는데 수렵은 한이 없습니다. 대저 먼 길을 가는 자가 휴식할 때가 없다면 장차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반드시 죽고야 말 것입니다 각도의 민폐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만약 이를 경장(更張)하지 아니하오면 유망(流亡)하지 아니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제포(祭脯)는 감할 수 없지마는, 사옹원에 봉진(封進)하는 각종 포물(脯物)은 그 수량을 감소시켜 각도의 백성들을 소생케 하옵소서.
대저 국가의 일을 말하는 자가 그 먼 것과 큰 것을 말하면 오완(迂緩)하여 실용에 긴필하지 않다 하고, 가까운 것과 적은 것을 말하면 가세(苛細)하여 대체를 상한다 합니다. 신 등이 진달하는 바 앞의 5조는 오완한 듯하고 뒤의 5조는 가세한 듯하오나, 앞의 것은 실로 군덕(君德)과 정체(政體)에 관계되고 뒤의 것은 당시의 절박한 폐단에 적중한 것이오니, 다행히 이를 오완하다 하여 소홀히 하거나 또 가세하다 하여 버리지 마시고 자세히 살피신 뒤 마음에 두어 모든 행사에 나타내신다면 덕업이 높아지고 치도가 더욱 융성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다시 유의하옵소서."
하였다. 이 상소문을 드리자, 황색 표지를 첫장에 붙이고 어서(御書)하여 이르기를, 의정부 진계(議政府進戒)라 하고, 전교하기를,
"사초(史草)에 정서한 뒤에 즉시 궐내에 들이라."
하고, 경기에 소일차(小日次)의 진상 생선은 감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3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52 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외교-명(明) / 무역(貿易)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공물(貢物)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재정-진상(進上)
- [註 122]동자(董子) : 동중서(董仲舒).
- [註 123]
전(傳) : 《대학》 전을 말함.- [註 124]
조전(雕篆) : 아로새긴다는 말.- [註 125]
이제·삼왕(二帝三王) : 요·순과 우·탕·문왕.- [註 126]
선종(鮮終) : 끝이 선한 이는 드물다.- [註 127]
근시(謹始) : 시작을 삼감.- [註 128]
예태(豫怠) : 안일함과 나태함.- [註 129]
포상(苞桑) : 근본이 견고하다는 뜻임.- [註 130]
간고(諫鼓) : 임금을 간하거나 또는 호소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궁문에 달아놓은 북을 쳐서 그 뜻을 통하게 하고, 이를 간고라 하였다.- [註 131]
정관지치(貞觀之治) : 정관은 중국 당 태종의 연호이다. 당 태종은 방현령(房玄齡) 등 명신을 등용하여 국세를 신장하고 태평 성대를 이루었으므로, 후세에서 이를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칭송한다.- [註 132]
호상(好尙) : 좋아하여 숭상하는 것.- [註 133]
상수(商受) : 주(紂)의 이름.- [註 134]
조가(朝歌) : 지명.- [註 135]
초왕(楚王) : 초왕이 가는 허리를 좋아하자 궁녀 중에서 허리를 가늘게 하려고 밥을 굶다가 죽은 자가 있었다는 고사로 《장자》에 나온다.- [註 136]
왕표(王豹) : 춘추 때 사람으로 노래를 잘 불렀다. 그가 기(淇) 땅에 거하매, 하서(河西) 사람들도 따라서 노래를 잘 불렀다 한다.- [註 137]
면구(緜駒) :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노래를 잘 불렀다는 사람. 그가 고당(高唐)에 살매 제우(齊右) 사람이 교화되어 다 노래를 잘 불렀다 한다.- [註 138]
기량(杞梁) : 춘추 시대 제의 대부로, 장공(莊公)을 도와 거(莒)를 칠 때 적 300인을 죽인 공을 세웠다. 장공의 만류에도 이들 두 대부는 다시 적진 속에 들어가 용전하다가 전사하였다.- [註 139]
저와 같이 : 위에서 든 주(紂)와 초왕의 예.- [註 140]
불경(不經) : 마땅히 벌한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 [註 141]
선두안(宣頭案) : 내수사에 속한 노비의 원적부.- [註 142]
횡간(橫看) : 기획 예산서.- [註 143]
조라치[照剌赤] : 왕실에서 세운 절을 청소하는 하인 또는 불당의 명칭.- [註 144]
시파지[時波赤] : 응방에서 매를 기르는 사람의 칭호.- [註 145]
선상노(選上奴) : 지방에서 뽑아온 노비.- [註 146]
일(鎰) : 일은 냥(兩)의 단위 21냥에 해당.- [註 147]
수냥(銖兩) : 24분의 1냥.- [註 148]
○丙戌/議政府左議政韓致亨、右議政成俊、左贊成李克均,、右贊成朴楗、左參贊洪貴達、右參贊申浚謹上言:
伏以, 臣等俱以庸疎, 待罪政府。 職巨人微, 常懼不足以塞責, 唯有知無不言, 庶幾少酬聖恩萬一, 謹述管見凡十條, 仰備淸燕之覽。 言雖蕪拙, 事皆緊關, 倘蒙不遺菅蒯, 特賜採納, 未必無涓埃之補, 伏惟留心焉。 一, 人主一身, 萬物之宗; 人主一心, 萬化之原。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董子曰: "人君正心, 以正朝廷; 正朝廷, 以正百官; 正百官, 以正萬民。 未有心不正、身不修而天下國家之理, 百官萬民之正者也。" 《傳》曰: "欲修其身, 先正其心; 欲正其心, 先誠其意; 欲誠其意,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夫格物致知云者, 博學審問, 無所不知之謂也學問之道伊何, 事在强勉而已矣。 昔傅說之告高宗曰: "念終始典于學。’ 言一念終始常在於學也。 詩人之頌成王曰: "學有緝熙于光明。" 言繼續而光明之, 無時焉間斷也。 夫然, 故高宗爲商令王, 成王爲周守成之賢主, 學問之功, 庸可易乎? 雖然, 帝王之學, 與凡庶不同, 夫分章析句, 考較同異, 此儒者之以講說爲事者也; 鉤玄討奇, 抽黃配白, 此儒者之以雕篆爲事者也, 皆非人君之所當爲也。 所貴乎人君之學者, 觀古聖賢之所用心、歷代治亂興亡之迹, 與夫立政立事之要、澤民利物之術, 得之於心、施之於政, 如斯而已。 然望道有不誠、求治或不急, 未有不半途而廢者, 豈不可惜哉? 殿下天資高明, 又有大有爲之志, 仰視古昔聖王, 何所往而不可及哉? 然春秋尙少, 學問未遍, 其於經所存, 聖賢治心、養性之要, 歷代治亂、興亡之迹, 或有所未至, 此正日新又新, 惟日不足之時也。 古人云: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凡爲學功夫, 其急也如此, 況人君之學乎? 伏願殿下, 勤御經筵, 勿以細事少故而或廢, 勿謂來日明年之有餘, 日復一日, 繼之以夜, 無少作輟, 積之以年, 則自然聞見博而知益明。 又須崇尙正學, 以二帝、三王存心出治之法爲師, 經史外, 凡百家衆技之流, 浮華無實之文, 不接於耳目, 不留於聰明, 則自然聖學益高, 治道益隆。 一靡不有初, 鮮克有終, 此人情之常也。 雖然, 天下之事, 其始善者, 其終亦善。 有其始而無其終者, 有之矣, 未有無其始而有其終者也。 故古之人重謹始也。 若稽古昔, 仲虺之告成湯曰: "愼厥終惟其始。" 伊尹之告太甲曰: "愼終于始。" 召公之告成王曰: "今天其命哲, 命吉凶, 知今我初服。" 言始之當謹也。 今夫正月, 一年之始也; 朔日, 一月之始也; 初政, 國家千百年之始也。 善觀天者以首月、朔日之候, 卜一年終月之氣。 善觀人主之治者, 於初政有以窺千百年之安危, 甚矣, 始之不可忽也! 殿下臨黎庶, 六年于玆, 然未來尙有百年之久, 此實初政耳。 國家千百年之治亂安危, 實兆於今日, 可不謹乎? 願殿下鑑鮮終之戒, 敦謹始之道, 出入起居, 罔或不欽; 發號施令, 罔或不臧, 任賢勿貳, 去邪勿疑。 罔違道以干百姓之譽, 罔咈百姓以從己之欲,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不改。 有言逆于耳, 必求諸道; 有言遜于志, 必求諸非道。 非其人勿近, 非其道不由, 敦敎化、厚風俗、崇節儉、戒安逸、謹天戒、恤民隱。 日用之間, 要須接賢士大夫之時多, 親宦官宮妾之時少, 敬以作所, 無時豫怠, 居常顧畏于民巖, 若有敵國外患將至乎前, 子孫萬世, 苞桑之固、盤石之安, 其道在此, 伏惟留心焉。
一, 言路, 人主所由適於治之途也。 言路廣則天下之善, 皆由之而來, 爲我之有。 天下之口, 皆得以言己之過失, 善不滯于人, 惡不留於己。 如此而其國不治者, 未之有也。 言路塞則上下隔絶, 人主如聾之無所聞, 如瞽之無所見, 善在人而不知取, 惡在己而不知去, 雖欲治得乎? 古者官師相規, 工執藝事以諫。 言路豁如也, 猶以爲未也, 陳諫鼓、設謗木, 猶恐人不言己之過, 乞言於老、於旅也, 語詢于芻蕘, 猶恐一善之或遺。 舜、禹、湯大聖也。 宜若無所資於人, 然且好察邇言, 聞善言而拜, 從諫弗咈, 其所以成雍熙、泰和之治者, 豈有他哉? 後世好諫之主, 莫如唐 太宗, 然貞觀之治, 寢不如初, 有以來魏徵之疏, 人心操舍之無常, 可懼也已。 我祖宗列聖治道之隆, 誠無讓於古昔聖王, 然成廟納諫之美, 近古所無, 子孫永世之龜鑑也。 殿下光紹丕緖, 思不墜祖宗積累之業, 宜如之何? 曰開言路、廣聽納、合衆善爲己之善而已。 大抵言路之不廣, 其弊有三, 曰自是也、有挾也、懷疑也。 人主恃高明之資, 自以爲是, 而謂人莫己若則諂諛日進, 而忠直之言不聞於耳。 挾至尊之勢, 惟其言而莫予違也, 則群下惟所令之, 而無復有往還復逆者。 持狐疑之端而不信人言, 則人皆携貳, 而無復有盡心極言者。 於是言路塞, 而上下之情不通矣。 伏願殿下, 上師舜、禹之好善, 成湯之從諫, 中鑑唐宗, 近述成廟, 務袪三者之弊, 兼取衆人之善, 其言可用, 當卽施行, 如不可用, 亦宜優容。 雖或觸忌、犯分, 事若無情, 亦特寬貸, 以伸直士之氣。 凡章奏之有關治道, 可爲鑑戒者, 勿但過眼而已, 留置于中, 常加省覽。 外朝之臣, 亦依舊例, 輪日面對, 各陳所懷, 庶幾人獲自盡, 下情皆得上達, 治道幸甚。 一, 人主好尙, 不可不愼也。 孔子曰: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昔商 受酗酒, 而朝歌之人皆酗。 楚王好細腰, 宮中至有餓死者。 上之所好, 而下之甚焉者, 率多類此。 且如王豹處於淇, 而河西善謳; 緜駒處於高唐, 而齊右善歌。 華周 杞梁之妻善哭其夫, 而國俗化。 彼皆尋常人爾, 而尙能使人變化之如此, 況人主乎? 人主好兵革, 則介冑之士思欲賈其勇; 好貨財, 則聚斂之臣思欲獻其計; 好土功, 則善宮室者思售其巧; 好田獵, 則善驅馳者思效其捷; 好詞華, 則浮躁之流競進; 好諂諛, 則侫倖之徒沓至, 下之人從上之好如此, 可不愼乎? 孔子曰: "我好古, 敏以求之者。" 《大學》曰: "未有上好仁, 而下不好義者也。" 又曰: "上老老, 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悌, 上恤孤而民不悖。" 聖賢之所好尙, 則如是爾, 從而化之者又如此。 殿下新服厥命, 方且有意唐、虞三代之治, 宜爲此, 豈爲彼也? 願殿下愼厥攸好, 以二帝三王所以治天下之道爲準, 以仁義忠恕孝弟爲先, 勿爲兵革財利之好, 以表帥臣民, 使之皆歸於正道, 治體幸甚。 一, 賞罰人主之大柄也。 賞以勸善, 罰以懲惡, 猶天之春以生物, 秋以肅殺也。 天地無生殺, 不可以成歲功; 人君無賞罰, 不可以馭一世, 賞之與罰, 不可以偏廢也。 今夫公卿大夫之位, 車馬金帛之珍, 賞之具也; 流放竄逐, 鞭笞貶黜之差, 罰之具也。 視其功之大小, 而賞有隆殺; 因其罪之輕重, 而罰有高下。 罰不當罪, 謂之濫; 賞不當功, 謂之僭。 濫則罰無以懲惡, 僭則賞無以勸善。 賞刑不足以勸懲, 則人君以何者而駕馭一世乎? 殿下卽位以來, 明愼用刑, 獄無冤枉。
近者又下恤刑之旨, 慮或無辜橫罹, 輕繫久滯。 又於罪籍中, 賢能之可議者, 特施恩宥, 好生之德, 何以加之? 但賞賚一事, 或有可議者。 昔周公有大勳勞, 賜之天子禮樂。 先儒論之曰: "事親得如曾子, 可謂孝矣。" 然孟子只曰: "可也。" 未嘗以曾子之孝爲有餘也, 其志蓋曰: "子之身所能爲者, 皆所當爲也。" 周公之功雖大, 皆臣職之所當爲耳。 職分所當爲者, 雖有微功, 在所不賞。 頃者觸法伏誅者有徒, 其時參鞫官皆受重賞, 數月之間超陞峻級者, 多矣。 至如兩道監司, 只以馳啓之功, 亦加資秩。 承命鞫囚, 何功之有; 據牒申聞, 何勞之有? 此特職分中之小事耳, 而賞賚如此, 復有衛國安民之勳, 斬敵搴旗之功, 將何以賞之? 雖然, 往者不可追, 願殿下繼自今愛惜名器, 斟酌功勞, 賞不濫加、恩不濫施。 其刑其罰, 又須審察, 如得其情, 哀矜而勿喜。 寧失不經, 毋敢或濫, 要使賞罰得中, 勸懲有道。 古昔帝王盛治, 不過由此而已, 伏惟垂省焉。 一, 國家設官分職, 使之大小相維, 蓋欲體統有繫, 而政令不紊也。 今之六曹, 卽周官之六卿, 各率其屬而進退之, 百司亦有聽於該曹, 不敢越此, 而有所爲, 此國法也。 內需司其所掌, 則錢穀也, 奴婢也。 國家凡錢穀戶曹主之, 奴婢刑曹主之, 內需司亦刑曹之屬也。 今者本司錢穀、奴婢出納, 不由於該曹, 直啓施行, 殊無體統。 近日本司啓請咸鏡道各官奴婢身貢納本道, 准其直, 換京倉米。 平安道各官所在之穀亦納本道, 受米京倉爲本司用, 皆非戶曹所知, 而直啓爲之者也。 朝廷事體, 豈宜如是? 八道租稅納京倉者, 唯六道而慶尙道以倭料之費多, 故上納之數少。 咸鏡、平安兩道之稅, 則全納于本道, 故京倉儲備, 僅滿百萬, 軍國之需, 可謂哀痛。 內需司年年啓請如是, 則大倉蓄積, 終能幾何? 請自今內需司錢穀、奴婢等事, 率由該曹, 轉啓施行, 以存國體, 其兩界布穀, 勿許京倉換米, 以實國廩。 且甘露寺、檜剛寺奴婢陳告之端一開, 而凡公私賤厭本役者, 皆投屬于內需司, 不父其父, 不母其母, 背其主, 脫其籍, 冒稱本宮奴婢, 添錄宣頭案者相續, 甚無謂也。 然公賤則已矣, 若士族之家只有一奴一婢者, 一朝見奪, 則生理頓絶, 豈不痛哉? 兩司去今九十年之遠, 欲辯奴婢餘裔, 豈能得實哉? 近年或有換私賤, 屬內需司之命。 王者以天地爲一家, 萬物爲一身, 凡民之所有, 皆吾之有也。 何有彼此之殊, 而必須換易其身, 以爲私有也? 請自今內需司陳告換易, 一皆斷去, 以示公道。 一, 天地生財, 只有此數, 歲貢亦有定額。 侈用則傷財, 傷財必至於害民, 理勢之必然也。 今宗戚、大臣之卒, 賻典不爲不厚, 而又有別賜, 至如宦寺、醫官, 法不當賻, 而別賻亦多。 或於戚里之家, 特賜米豆至百餘碩, 布物稱是。 又有無時入內之命, 或令輸納內需司, 其數甚多。 竊考去年橫看外別用之物, 米、豆二千九百餘碩, 緜布三千六百餘匹, 正布一千九百餘匹, 油蜜九十餘碩, 其他浮費, 有難校數。 儲峙支用, 間或匱乏, 後年之貢, 別請引納。 夫民有恒産者常少, 當年之貢尙且艱備, 況能引納乎? 請於常費之外, 其他浮費, 一切裁省, 以祛民弊, 以裕國用。 一, 諸司奴隷身役甚苦, 其中供上各司其勞尤甚。 故率多憚其役, 投屬他司, 去者之役, 留者當之, 旣不能當之, 則亦皆百計圖其移屬。 由是, 各司奴婢日減月損, 如司醞署元奴二十八, 移屬者二十五, 今餘三人。 司宰監元奴五十七, 移屬者四十八, 餘九人。 他司類此, 不袪此弊, 不出數年, 各司一空。 若闕內及各處不得已差備, 則固不可減也。
圓覺寺內佛堂灑掃之役, 則其常供僧徒, 合自爲之, 擇公賤爲照剌赤。 左右鷹坊時波赤, 數非不多, 又設鳥捉人, 以公賤充定。 工曹、尙衣院匠人, 本有定額, 又稱傳習匠, 募定亦多, 其他不緊斜付, 亦皆類此。 諸司凋弊, 職此之由, 請令該司, 酌其輕重, 凡移屬奴婢, 不隷本司, 如不得還隷, 則擇畿內住接公賤之有實者充其數, 而疎其番, 使相休息。 公賤之付外案, 而居京者亦多, 令各司各自根尋, 移報該曹, 役屬其司。 捉鳥匠、傳習匠如不可無, 則以居京補充隊、步正兵及諸色保人充之。 圓覺寺內佛堂照剌赤如不可革, 以選上奴抄定, 以實殘弊各司。 一, 物産隨其方土, 或有或無, 或多或少之不一。 有而多則萬鎰不足爲貴, 無且少則銖兩重於千鈞。 故禹之制貢也, 九州各有土宜, 揚之羽毛齒革, 不以貢乎靑、徐; 梁之鏐鐵銀鏤, 不以徵乎兗、豫。 文王之治歧〔岐〕 也, 以萬民惟正之供, 取於民有藝。 故孔子曰: "禹吾無間然矣。" 周公之贊文王曰: "咸和萬民。" 我國羽毛, 稱爲東北道之産, 而從彼土來者居多, 其他道則僅有之而或無焉。 頃以鷲羽宜粧矢之用, 使徵於諸道, 此實戎器之備, 非爲玩好也。 然此稀有之物, 供辦實難。 故臣等請減其數, 得蒙允兪, 爲賜亦多矣。 然其實進之數尙多, 非出於其地, 非出於官府, 皆出於民。 民非其有, 須斂其直, 來貿市肆, 一羽之直, 布物多至五六匹。 假如一邑只供數箇, 闔境之民, 均出其價, 豈小弊哉? 近見人自南而來者, 問南方消息則曰: "但苦鷲羽之難備耳。" 始知民間尙困於此, 豈知聖上減數之爲恩也? 大抵上之取於民, 責以所無則苦之, 事之無前規者則厭之。 鷲羽南方所無, 又無前規。 又令恒進, 則無怪乎民之苦之也。 諺云: "毋廢故, 毋立新。" 順民情之謂也。 請除鷲羽之進, 以便民生。 且紗羅綾段、書籍藥石之類, 我國所無者。 每於赴京之行貿易, 以資國用, 其來久矣。 先王朝所貿物件, 只有其數, 近日則漸多矣。唐物、鄕物其價相懸, 鄕之萬錢, 僅當唐百。 一年公貿苧麻布, 摠三千七百餘匹, 而計緜布, 一萬八千六百餘匹, 帑藏垂盡。 復有王人之來, 其接也多儀, 隣國之求, 亦不可孤, 用度浩繁, 儲備不可不爲之預。 若服御之備, 書籍、藥餌等物, 在所不可廢也, 其他不甚緊切之物, 請減貿, 以裕國儲, 亦節儉之道也, 伏惟垂省焉。 一, 京畿四方根本之地, 而賦役視他道倍重。 加以沿海諸邑之民鮮魚供進, 其弊尤甚。 今計一年所進之數, 各殿誕辰及有名日, 總七百十八尾。 大日次、小日次總四千八百尾。 又無時晝物, 若曲宴所需, 亦不下二千餘尾。 此皆監司責辦於諸邑、諸浦, 諸邑、諸浦又取辦於民, 民不能自辦, 必須出其直, 貿諸魚肆。 射利之徒, 乘人之急, 增益其價, 一尾之直, 多至緜布三四匹。 夫一尾之魚而其直至此, 則魚之貴可知, 買而供之者, 其苦可想。 按, 大日次、小日次, 祖宗朝所無。 頃者, 一二監司始開其端, 繼之者因循, 以爲恒式, 至此而民困極矣。 濱海(徧氓)〔編氓〕 , 勢將不支, 非細故也。 祖宗朝未有日次之進, 不見其不足。 況今司饔院所屬漁夫逐日之供, 不減於古。 大日次、小日次中, 請減其一, 以蘇畿縣之民。 外方諸道, 比之畿縣, 猶人之有四肢。 一指之病而心猶痛楚, 況四肢之皆病乎? 今諸道之所共病者有一焉, 奉常寺祭脯一年之納, 摠六百五十貼。 司饔院一年之進, 全羅道片脯一千八百箇、長脯八十四貼, 慶尙道片脯一千八十箇、長脯七十八貼, 忠淸道夬脯一千四百九十六斤, 黃海道長脯一百貼, 江原道夬脯二千一百二十七斤, 咸鏡道二千八百五十一斤, 皆非獐鹿不可爲。 夫獐鹿有産處, 有不産處, 或有優於昔, 損於今者, 而各邑供進, 則無有彼此今昔之殊。 旣定恒數, 雖一箇一斤, 闕進不可, 守令殿最、黜陟繫焉, 故必刻迫其民, 而責辦焉。 物産有盡, 元額不減, 民力困弊, 獵獲無際。 夫起長路者, 苟無休息之時, 則將何以堪之? 必斃而已矣。 各道民弊至此, 若不更張, 則幾何不胥而流亡哉? 祭脯不可減省, 司饔封進各色脯物, 請須量減其數, 以蘇各道之民。 大抵言國家事者, 言其遠者大者, 則以爲迂緩, 而不切於用; 言其近者小者, 則以爲苛細, 而傷於大體。 臣等所進前五條似迂緩, 後五條似苛細, 然前則實關君德、政體, 後則正中當時切弊。 幸不以迂緩而忽之, 苛細而置之, 詳加省覽, 存諸心而見諸行事, 則德業崇而治益隆矣, 伏願更留意焉。
疏入, 以黃標貼于初面, 御書曰: "議政府進戒。" 傳曰: "書史草後, 卽還入內。" 命減京畿小日次進上生鮮。
- 【태백산사고본】 9책 32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52 면
- 【분류】신분-천인(賤人) / 외교-명(明) / 무역(貿易)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인사-관리(管理)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공물(貢物)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재정-진상(進上)
- [註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