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릉 도감 제조 유자광 등이 대행 대비의 신릉에 정자각을 세울 것을 청하다
산릉 도감 제조 유자광·강귀손(姜龜孫)·윤효손(尹孝孫)이 아뢰기를,
"엎드려 전지를 보건대, ‘창릉(昌陵)에 3년간 합제(合祭)하게 한 것은 광릉(光陵)의 구례에 의함이다.’ 하셨는데, 이 제도는 정창손(鄭昌孫) 등의 의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의논은 ‘부인은 지아비를 좇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행 왕비의 신릉은 비록 광릉과 무덤은 다르다 하더라도 같은 한 동네이므로 능호를 별칭할 것이 아니옵고 다만 정자각(丁字閣)050) 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이 타당하옵니다. 세상 사람은 어머니를 그 아버지의 무덤 내에 부장(附葬)하면 3년 내에 그 아버지와 합제하게 되는데, 이는 비록 예문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정에 아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는 인정에 연유한 것이고 보면 신도(神道)인들 차이가 있겠습니까.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의하여 종친을 돌려가며 번(番)들게 하고 길례(吉禮)로써 광릉에 합제하소서. 신 등이 생각하옵건대, ‘3년 내에 그 아버지와 합제하여야 한다.’는 의논은 신(神)과 인(人)의 정분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과연 예의에 합당하오며, ‘길례로써 구릉에 별도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의논은 신 등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길흉은 그 길이 달라서 서로 범할 수 없으니, 별도로 양각(兩閣)을 세워 길·흉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의논에 대해서는 신 등의 의혹이 더욱 심하옵니다. 지금 정자각과 가(假) 정자각을 이설한다면 그 사이가 지척에 불과할 것입니다. 동시에 상식(上食)하여 곡성(哭聲)이 대왕의 신소(神所)에 양각을 세워 길흉을 구분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에 이르기를, ‘상부(喪父)가 같은 빈소에 있으면 효자는 그 어머니를 위하여 슬픔을 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감히 왕후에 대한 슬픔을 펴기 위하여 그 곁에서 곡을 하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예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도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며, 인정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인정으로써 미루어 본다면, 대행 왕후께서 안가(晏駕)051) 하실 때에, 반드시 대왕으로 더불어 흠향을 같이하며 결코 잠시라도 별처하실 정은 없었을 것이며, 대왕의 정도 어찌 왕비와 다르겠습니까. 대왕과 왕후의 정이 진실로 흠향을 같이하시는 것을 편안히 여기신다면, 또 어찌하여 그 합제함을 의심하겠습니까. 신 등으로는 하관하는 날 왕후의 신위를 대왕의 정자각에 모시어 합제하는 것이 바로 신과 인의 정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또 헌릉(獻陵)과 영릉(英陵)의 상장(喪葬)의 의식을 상고하옵건대, 3년 내에 모두 한 각에 합제하되, 반드시 대왕을 우위에 모시었으며, 또 대왕의 상(喪)이 뒤에 있었으므로 흉례(凶禮)로써 왕후와 합제하였습니다. 지금 창릉에 있어서도 왕후의 상이 비록 뒤이지만, 역시 대왕이 우위이시니 길흉간의 예를 참작하여 수릉관(守陵官) 이하는 담복(淡服)으로써 대왕과 합제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합치하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란 인정에 순하여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소·대상[練祥]에 최복 없이는 행사할 수 없다면, 따로 장막을 설치하여 최복으로써 행사한들 정례에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신위를 영사전(永思殿)에 모셨을 적에 기신(忌晨)을 만나면, 따로 휘장을 설치하여 제향을 올렸으니 이도 또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신 등은 직이 예관이 아니므로 예의를 논할 수 없사오나, 산릉의 역사를 감독하다가 우러러 신각(神閣)을 보매 중앙에 서 있는지라, 합제하는 것이 정례에 당연하겠기에 감히 함묵(含默)치 못하옵고 천청(天聽)을 앙독(仰瀆)하오니, 의정부와 예조에 의논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정문형(鄭文炯)·한치형(韓致亨)·성준(成俊)·이극균(李克均)·박건(朴楗)·홍귀달·신준(申浚)이 의논드리기를,
"엎드려 유자광 등이 올린 계를 보옵건대, ‘대행 대비를 3년 내에 정자각에서 합제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상정으로써 살펴보면 그 말도 또한 옳으나 대왕과 후비는 존비(尊卑)의 차가 있고, 왕후의 상을 치르는 자가 최복으로서는 선왕(先王)의 신위에 아울러 참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담복으로 대왕과 합제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또한 시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왕의 제사에는 길복을 입어야 합니다. 비록 담복을 입는다 할지라도 이는 길복이 아닌 것입니다. ‘또 소·대상에는 따로 장막을 설치하여 최복으로 행사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또한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며, 상시에 합제하다가 소·대상을 당해서는 문득 별전(別殿)을 설치하여 최복으로 행사함은 사리와 체면에 온당한 일이 아니옵니다. 대저 수릉관과 시릉관(侍陵官)이 3년 동안 산릉에서 애곡을 대행하는데, 만약 담복을 입다가 다만 소·대상에만 최복을 입고 행사한다면, 이 어찌 3년간의 애곡을 행한다 하겠습니까. 헌릉(獻陵)과 영릉(英陵)은 내상(內喪)이 먼저 있었으니 비록 최복으로써 합제한다 할지라도 가하거니와, 이를 끌어다가 예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 등의 뜻으로는 일체 광릉(光陵)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체례(體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이세좌(李世佐)·김수동(金壽童)·이창신(李昌臣)이 의논드리기를,
"신 등이 산릉도감 제조가 올린 계를 보건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구릉에 합제함은 진실로 예문에 기재된 바는 아니오나 특히 정리에 의하여 광릉(光陵)의 구례에 따른 것입니다. 이미 예문을 들추어 얻지 못하면 마땅히 조종의 고사(故事)에 따라 행해야 하고, 이를 경솔히 고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빈소에 있으면 그 아들이 어머니를 위하여 칙소에서 슬픔을 펼 수 없다.’ 하였으나, 이는 특히 그 영구차가 잠시라도 정거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논함이지, 아버지의 빈소 옆에서 애곡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왕후를 위하여 최질(衰絰)052) 을 갖추어서 그 옆에서 애곡함을 불가하다고 하다면,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경우, 벽용(擗踊)하며 울 수도 없겠습니다. 그들은, 또 ‘헌릉(獻陵)과 영릉은 왕후의 상이 먼저고 대왕의 상이 뒤에 있었으니 흉례로서 합제한다.’ 하였는데 예로서는 그러하오나, 창릉은 왕후의 상이 뒤에 있었으니 왕후의 상 때문에 흉례를 써서 대왕에게 제사함은 불가한 일이며, 또 상제(喪制)는 선조를 따라야 하고, 개국 이래, 대왕·왕후의 상에 수릉관·시릉관·내시로서 담복으로 종사하는 예가 없었으니, 이는 결코 시행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설(移設)한 정자각이 신·구 양릉의 사이에 있으니 구릉의 신로(神路)가 우곡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신릉의 가(假) 정자각과 거리가 매우 가까우니, 만약 극히 가까운 땅에서 길흉의 예를 적용하기 혐의스러우면 양릉에 각각 가 정자각을 설치하여 구릉의 제사에는 길례로, 신릉의 제사에는 흉례로 하다가 3년 후에 합제함이 온당하옵니다. 윤필상(尹弼商) 등의 의논을 좇으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3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44 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050]정자각(丁字閣) : 왕릉 앞에 세운 건물로 곧 홍살문 앞에 제향을 올리는 침전(寢殿)이다. 정자(丁字) 모양으로 지은 집을 정자각이라고 한다.
- [註 051]
안가(晏駕) : 붕어 즉 사망을 말함.- [註 052]
최질(衰絰) : 최는 참최(斬衰) 또는 제최(齊衰)의 상복이며, 질은 상복을 입을 때에, 머리에 두르는 수질(首絰)과 허리에 두르는 요질(腰絰)을 말한다.○山陵都監提調柳子光、姜龜孫、尹孝孫啓: "伏覩傳旨: ‘昌陵三年竝祭, 一依光陵舊例。’ 此制出於鄭昌孫等議, 其議曰: ‘婦人從夫。’ 今大行新陵, 雖與光陵異穴, 同一洞內, 不可別稱陵號, 但丁字閣所宜別設。 世人母附葬父之塋內則三年內, 竝祭其父。 雖非禮文所載, 亦人情之不得不爾也。 禮緣人情, 求之神道, 豈相遠哉? 依文昭殿例, 宗親輪次入番, 以吉禮竝祭光陵。 臣等竊惟, 三年內竝祭其父之議, 體神人之情, 果合於禮。 其曰以吉禮別祭舊陵之議, 臣等未解。 若曰吉凶異道, 不得相干, 別設兩閣, 以分吉凶, 則臣等之惑滋甚。 今移設丁字閣與假丁字閣, 其間不能咫尺, 而同時上食, 哭聲徹於大王神所, 則設兩閣, 分吉凶之意安在? 禮曰: ‘竝有喪父在殯, 孝子不得爲母伸哀。’ 然則敢爲王后伸哀, 以衰哭於其傍乎? 又曰: ‘禮非從天降也, 從地出也, 人情而已。’ 推之以情, 則大行王后晏駕之時, 必欲與大王同享, 斷無須臾別處之情, 大王之情, 豈異於王后乎? 大王、王后之情, 苟安於同享, 則又何疑其合祭乎? 臣等以謂, 下玄宮之日, 祔王后神位大王之閣竝祭, 正合神人之情。 且攷獻陵、英陵喪葬儀軌, 三年內皆合祭一閣, 必以大王居尊, 而喪亦在後, 以凶禮竝祭王后。 今於昌陵, 王后之喪雖曰在後, 亦大王居尊, 酌吉凶之間, 守陵官以下以淡服, 竝祭大王, 實合情禮。 此禮所謂: ‘順人情, 以爲隆殺也。’ 若曰: ‘練祥之祭, 不可無衰服行事。’ 則別設幄帳, 以衰服行事, 於情禮何妨? 恭惠王后之於永思殿, 遇(忌晨)〔忌辰〕 , 別設幄帳以祭, 此亦有所據矣。 臣等職非禮官, 不宜議禮, 董役山陵, 仰瞻神閣, 建于中央, 合而祭之, 情禮當然。 不敢含默, 仰瀆天聽。" 命議于議政府、禮曹。 尹弼商、鄭文炯、韓致亨、成俊、李克均、朴楗、洪貴達、申浚議: "伏見柳子光等所啓: ‘大行大妃三年內合祭於丁字閣。’ 以常情揆之, 其言亦宜矣。 然大王與王后, 尊卑有間。 守王后之喪者, 不可以衰服, 幷禮於先王之位。 其曰宜以淡服, 竝祭大王 之言, 亦不可施行。 祭大王當用吉服, 雖用淡服, 亦非吉也。 其曰練祥宜別設幄帳, 以衰服行事者, 亦難施行。 常時合祭, 而遇練祥, 輒設別殿, 以衰服行事, 事體未穩。 大抵守侍陵官代行三年之哀於陵寢, 若用淡服, 只於練祥服衰行事, 則可謂行三年之哀乎? 若獻陵、英陵則內喪在先, 雖以衰服合祭可也, 未可援以爲例。 臣等意以爲, 一依光陵例施行, 似合體例。" 李世佐、金壽童、李昌臣議: "臣等觀山陵都監提調所啓, 竊以爲不然。 今竝祭舊陵, 固非禮文所載, 然特爲緣情之擧, 依光陵舊例行之。 旣求之禮文 而不得, 則當用祖宗故事, 不可輕改。 其曰: ‘父在殯, 孝子不得爲母伸哀於所次之處。’ 此特論其柩車不暫停耳, 非謂不得哭泣於父殯之側也。 若以爲王后衰絰, 哭於其傍, 爲不可則父在遭母喪, 將不得擗踊哭泣耶? 其曰: ‘獻陵、英陵則王后喪在先, 大王喪在後, 以凶禮竝祭。’ 禮則然矣, 昌陵則 王后喪在後, 不可以王后喪, 用凶禮祭大王也。 且喪制從先祖, 自開國以來, 大王、王后之喪, 守陵、侍陵內侍無有以淡服從事者, 此斷不可施行。 但移設丁字閣, 在新舊兩陵之間, 非惟舊陵神路迂曲, 亦與新陵假丁字閣甚近。 若於至近之地, 維用吉凶之禮爲嫌, 則兩陵各設假丁字閣, 用吉祭舊陵, 用凶禮祭新陵, 待三年後, 合祭爲便。" 從弼商等議。
- 【태백산사고본】 9책 3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44 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註 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