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 훈도 송헌동의 과부 재가 허용에 관한 상소에 대해 의정부와 육조에서 의논드리다
이에 앞서 단성 훈도(丹城訓導) 송헌동(宋獻仝)이, 재변(災變)으로 인한 상소 17조를 올렸는데, 그 제1조에 아뢰기를,
"상부(孀婦)657) 의 개가(改嫁)에 대한 금지는, 절의를 존숭하고 예의를 숭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과 남녀는 사람의 곧 욕구이므로, 남자는 생겨나면 장가가기를 원하고 여자는 생겨나면 시집가기를 원하니, 이것은 생(生)이 있는 처음부터 인정의 고유한 바이오니, 능히 금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부인이란 삼종(三從)의 의(義)가 있으니, 본집에 있을 적에는 아비를 따르고 시집가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르는 것은 곧 《예경(禮經)》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혹은 시집 간 지 3일 만에 홀어미가 된 자가 있고 1달 만에 홀어미가 된 자가 있으며 혹은 나이 20, 30에 홀어미가 된 자가 있는데, 이들이 끝내 능히 정절(貞節)을 지켜서 공강(共姜)·조씨(曹氏)처럼 나간다면 다 말할 나위 없거니와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또 자식도 없어, 혹은 행로(行露)658) 의 젖은 바가 혹은 담장을 넘어든 자에게 협박를 받는 바가 되어 마침내 본래의 절행을 잃고 말게 됩니다. 청컨대 부녀의 나이 30세 이하로 자녀가 없이 홀어미가 된 자는 모두 개가(改嫁)를 허하여 살아가는 재미를 부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왕은 명하여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 수의하도록 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이 의논드리기를,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므로 경솔히 고쳐서는 안 되옵니다. 성종의 교훈이 쟁쟁하게 귀에 남아 있사오니, 신은 감히 천단(擅斷)하지를 못하겠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신승선(愼承善)·한치형(韓致亨)은 의논드리기를,
"《대전》의 법을 경이하게 자주 고쳐서는 아니되옵니다."
하고, 어세겸(魚世謙)·성준(成俊)·이극돈(李克墩)·유지(柳輊)·이세좌(李世佐)·윤효손(尹孝孫)·노공필(盧公弼)·허침(許琛)·이육(李陸)·이숙함(李淑瑊)·이감(李堪)은 의논드기를,
"《대전(大典)》의 법은 두 번 시집가는 것을 금지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소생이 현직(顯職)에 등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족(士族)들이 모두 그 자손의 벼슬길을 터서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하니, 이 법이 한 번 세워진 이상 누가 재가(再嫁)한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그 소생이 폐고(廢錮)되어 서민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그러므로 나이가 젊은 과부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당초에 여러 정신(廷臣)에게 수의하니, 모두 ‘어린 나이에 홀로 산다는 것은 생리적으로 보아 심히 어렵다.’고 곡진하게 그 정을 말했는데도 선왕께서 오히려 스스로 결단하여 《대전》에 기재하여 후세에 남기셨으니, 절의를 권장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방법이온즉 지금에 경솔히 고친다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뢰옵니다."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드리기를,
"나이 젊은 과부가 혼자 살다가 실절(失節)을 하면 강상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혹은 화기를 손상하고 재변을 부르는 것이 정히 송헌동(宋獻仝)의 진언(陳言)한 바와 같사오니, 청컨대 율문(律文)과 조종조(祖宗朝)의 고례(古例)에 의해 시행하여 원한이 맺힌 계집이 없도록 하옵소서."
하고, 박안성(朴安性)·김제신(金悌臣)·김경조(金敬祖)·안호(安瑚)는 의논드리기를,
"왕촉(王蠋)의 말에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대개 부인의 의(義)는 한 사람을 따라 끝마치는 것이옵니다. 국가에서 예전에는 3번 출가한 여자는 자녀안(恣女案)에 기록하여 그 자손을 청환과 요직에 서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대전》에는 재가해서 출생한 자손을 동·서반(東西班)에 서용하지 못하게 한 법은 절의를 중히 여기는 금령(禁令) 아닌 금령이옵니다. 그러나 나이 젊은 과부가 부모 형제의 의탁도 없이 고독과 고생으로 원한을 안고 늙어 죽는다면, 어찌 감응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혹은 곤궁에 시달려서 처소를 잃고 유리하다 하여 행실을 더럽히고 절개를 무너뜨려 사족(士族)이 곧 서민이 된다면 절개를 보전하게 함을 목적으로한 것이 도리어 무너뜨리게 하는 결과가 되오니, 불가불 변통해서 구제해야 할 것이온즉, 청컨대 조종조의 구례에 의하여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에게 청환과 요직을 제외한 벼슬길은 통하도록 허하옵소서."
하고, 신준(申浚)은 의논드리기를,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동·서반에 서용하지 말라는 법은, 비록 조종(祖宗)의 구전(舊典)은 아니라 할지라도 오로지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풍교(風敎)를 다듬어 나가려는 목적에서 《대전》에 기재한 것이온데, 지금 한 사람의 아뢴 말로써 다시 고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생각하오면, 국가의 전장(典章)이란 반드시 유통하여 폐단이 없게 해야만이 영원히 준수하게 되는 것이오니 설혹 과부가 혹 부형 종족에게 핍박을 당하고 혹은 기한(飢寒)과 곤궁에 못이겨 재가(再嫁)를 했을 경우, 그 소생 중에 어질고 능하여 가히 쓸 만한 자가 있어도 동반·서반을 막론하고 모두 서용(敍用)하지 않는다면 신은 이 법이 마침내는 통하지 못할까 걱정이오니, 모름지기 변경해야만 마침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홍귀달(洪貴達)·조익정(趙益貞)은 의논드리기를,
"부인이 한 사람을 따라서 생을 마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도(道)이니, 《대전(大典)》에 기재된 재가(再嫁)의 금령은 절의를 닦아 나가자는 것이요, 법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20세에 출가하거나 혹은 23세에 출가하는데, 지금 사족(士族)의 집안에서는 그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대개 10세 이전이며 그 혹 만혼(晩婚)일 경우라도 오히려 20세 이전이니, 출가한 지 1, 2년 만에 과부가 된 자도 있고 3, 4년 만에 과부가 된 자가 있으므로, 옛날로 치면 출가하는 나이에 미치지도 못해서 이미 미망인의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부모나 친척은 집안의 명예를 아껴 개가를 못하게 하고, 선비된 자 역시 그 자손의 벼슬길이 막힐까봐 과부에게 장가를 들려고 하지 아니하므로 이 때문에 원한을 품은 여자가 많게 되고, 화기를 상하여 재앙을 부르는 것도 반드시 이에 기인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또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그 절개를 상실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혹은 강포한 자에게 더럽힘을 당하기도 하여 그 가세(家世)에 누를 끼친 자가 많사오니, 처음에는 절의를 닦아나가기를 구하다가 끝내 절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연유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더욱 가긍한 일은, 딸 하나밖에 두지 않았는데, 그 딸이 과부가 될 경우, 법에 구애되어 개가를 못한다면 그 부모의 뒤는 이로부터 영영 끊어지고 마는 것이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으리까.
열녀(烈女)와 절부(節婦)는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은 아니오니, 간혹 나오게 될 경우 국가에서 마땅히 포장(褒奬)하여 여느 사람을 권장해야 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에게 백주(柏舟)659) 의 절행을 강요한다면, 신 등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폐단이 도리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이 법은 조종조(祖宗朝)에는 있지 않았던 것인데, 성종께서 자의로 결단하여 세우신 것은, 특히 인심을 격력하기 위한 것뿐이었으므로, 그 당시 조정 신하들도 모두 불가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사람 중에는 고쳐서 안된다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이는 특히 《대전(大典)》을 경솔히 변하는 것을 들어 불가하다 한 것이옵고, 법이 폐단이 없다는 것은 아니옵니다. 《주서(周書)》에 이르되 ‘도(道)는 오르내림이 있고 정사는 속(俗)으로 말미암아 개혁된다.’ 하였으니, 신 등의 생각으로는 그윽이 변통을 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하고, 박숭질(朴崇質)·이극규(李克圭)는 의논드리기를,
"재가한 여자의 소생도 벼슬길을 통하도록 허한 것은 조종조의 구례이므로 헌동(獻仝)의 진언(陳言) 역시 뜻이 채택할 만하오니, 비록 《대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 실로 시의(時宜)에 합당한 줄 아옵니다."
하고, 이계남(李季男)·정미수(鄭眉壽)는 의논드리기를,
"우리 국가는 절의(節義)와 예교(禮敎)를 잡고 있으면서 재가하는 일만은 오히려 전조(前朝)의 폐풍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족(士族)의 집안에서도 유독 재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혹은 삼가(三嫁)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종은 그 풍속을 시정하고자 하여, 그 자손을 동·서반에 서용하지 말게 하신 것이니 그 절의를 숭상하고 풍속을 정돈함이 지극하다 하겠사온즉, 지금 부박(浮薄)한 의논에 따라 선왕의 아름다운 법을 고쳐서는 안 되옵니다."
하고, 정석견(鄭錫堅)은 의논드리기를,
"삼가 주문공(朱文公)의 《소학(小學)》을 상고하건대,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과부를 아내로 삼는 것이 도리에 불가할 듯하온데 어떠하옵니까?’ 하니, 이천(伊川)660)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무릇 아내를 맞는 것은 몸을 짝하기 위함인 것인데, 만약 실절(失節)한 자에게 장가들어 자기와 짝을 짓는다면 이는 자기도 실절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였으며, 또 묻기를, ‘혹시 외로운 과부가 가난하고 곤궁하여 의탁할 곳조차 없는 자는 재가(再嫁)하는 것이 가하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단지 기한(飢寒)에 못이겨 죽을까봐 이런 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려 죽는 것은 극히 작은 일이요, 절개를 상실하는 일은 극히 큰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해석자는 말하기를,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은 함께 종묘(宗廟)를 받들고 사속(嗣続)을 전하자는 것인데, 만약 절개를 상실한 자를 맞아 짝으로 삼는다면 자기가 실절(失節)한 것과 똑같다. 그 실절(失節)한 일이 극히 크다는 것은, 몸을 망쳐 재가를 하면 중심이 수치스러워 천지의 사이에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것이니, 비록 산다고 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전조(前朝) 시대에는 큰 인륜(人倫)이 밝지 못하여, 대범 사녀(士女)의 재가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제삼부(第三夫)에게 간 여자까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 번 개가한 자손은 벼슬길에 통하지 못한다는 법은 전조(前朝)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더러운 풍속을 일신하여 씻어 버리고 절의를 숭상했으므로, 재가한 자는 사람마다 더럽게 여겼는데, 그래도 자손의 벼슬길은 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종 대왕께서 특별히 인륜을 밝히는 것을 중히 여겨 자의로 결단하여 재가한 자손은 서용하지 말라는 법을 아울러 《대전(大典)》에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품정(稟定)할 적에 대신이 헌의(獻議)하기를, ‘이같이 한다면 청춘에 과부가 된 자도 누(累)가 자손에게 미치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능히 개가를 못하고 사사로 몸을 더럽혀 실절(失節)한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오니, 청컨대 《대전》에 기재하지 마옵소서.’ 하니, 성종께서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뒷 임금이 혹시 고칠지라도 나는 불가불 세워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지금 헌동(獻仝)의 말이 비록 세고(世故)에는 노련하지만 그러나 주희(朱熹)와 정이(程頤)의 광명 정대한 언론이 이미 저러할 뿐 아니라, 《대전》에는 단지 ‘자손을 동·서반의 직에 서용하지 말라.’고만 일렀고, 다시 재가에 대한 금지는 없으니 그 실절하는 것을 극히 중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스스로 처리할 터이오니, 어찌 정사를 해치는 큰 것이 되오리까. 선왕께서 인륜의 대절을 중히 여겨 스스로 결단하여 법을 정해서 성자(聖子) 신손(神孫)으로 하여금 만세를 계술(繼述)하게 하셨는데, 삼년상을 지난 나머지에 갑자기 한 서생(書生)의 말로 인하여 성헌(成憲)의 개정 여부를 하의(下議)하신 것은 신은 불가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고, 이창신(李昌臣)은 의논드리기를,
"아내가 지아비를 따라 몸이 마치도록 개가하지 아니하며, 신하가 임금을 섬기매 죽음이 있을지언정 두 마음이 없는 것이니, 이는 인도(人道)의 대륜(大倫)입니다. 오대(五代) 때 대신(大臣) 풍도(馮道)는 나라가 멸하고 임금이 망하면 또 다른 임금 섬기기를, 마치 여관집에서 지나가는 길손 보듯 하였으니, 비록 은총이 삼사(三師)661) 에 으뜸가고 다섯 나라의 정승을 내리 지내어 스스로 장락노(長樂老)라 일컬었지만, 선유(先儒)가 서로 기롱하여 매국(賣國)한 간신(奸臣)이라 칭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로 대절(大節)이 이미 이지러진 때문이옵니다.
가령 여기에 부인이 하나 있는데, 젊어서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으니 진실로 애통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재가를 한다면 거의 살아나갈 길이 있겠지만, 그러나 의리로써 헤아려 볼 적에는 또한 여자 중에 한 풍도(馮道) 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지 사이에 서서 다니겠습니까? 옛날 조문숙(曹文叔)의 아내 이름이 영녀(令女)였는데, 젊어서 과부가 되고 자식마저 없으므로, 그 아비가 불쌍히 여기여 재가(再嫁)를 보내려고 하니, 영녀는 말하기를, ‘금수(禽獸)의 행동을 내가 어찌 하겠습니까.’ 하고 머리를 깎고 귀를 끊고 코를 깎은 뒤 죽음으로써 맹서하고 물리쳤습니다. 그래서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듣는 자가 늠연(澟然)히 옷깃을 여미곤 하옵니다.
혹자가 이천(伊川) 선생에게 묻기를, ‘고독한 과부가 빈궁하고 의탁할 곳이 없다면 재가하는 것도 가하옵니까?’ 하자, 선생은 말하기를 ‘단지 춥고 배고파서 죽을까 두렵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굶어 죽는 일은 극히 작은 것이요 실절(失節)하는 일은 극히 큰 것이다.’ 하였으니, 신은 비록 성인(聖人)이 다시 나오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 여깁니다.
우리 성종 대왕께서 천종(天縱)의 성인(聖人)으로 절의(節義)가 바로 국가의 원기(元氣)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충신(忠臣)의 후예를 수록하시고 효행 있는 사람을 발탁하시고 절부(節婦)의 문을 정표하셨으니, 그 한 세상을 격려하심이 이러했는데도 오히려 왕강(王綱)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대전(大典)》을 산정(刪定)할 당시에 열성조(列聖朝)에서 발명하지 못한 교훈을 내리시어 말씀하시기를, ‘실행(失行)한 여자나 개가한 여자의 소생은 동·서반의 직을 서용하지 말라.’ 하셨으니, 대개 그 어버이의 실절(失節)을 미워하여 조정의 반열을 더럽힘이 없게 하고자 하신 것이온즉, 그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시려는 뜻이 지극하옵니다. 이로써 백성을 어거해 나갔지만 그래도 사족의 부녀들이 재가하는 자가 흔히 있었으되, 그 주혼(主婚)한 가장(家長)을 죄주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그 재가하는 것을 또한 가혹하게 금한 것은 아니온데, 또 하필이면 법까지 세워서 권장(勸奬)할 것이야 있사옵니까.
송헌동의 말이 ‘혹은 담장을 넘어드는 강포한 자의 위협에 못이겨 마침내 실절을 하게 되는 수가 있다.’고 하였으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렇지 아니하옵니다. 옛날에 왕응(王凝)이 괵주(虢州) 참군(參軍)으로 관(官)에서 죽었는데, 왕응의 집이 본래 가난했습니다. 그 아내 이(李)씨가 개봉(開封) 땅을 지나다가 여사(旅舍)에 들르니, 주인이 받아들이지 않았사옵니다. 이씨가 날이 이미 저물어 선뜻 떠나지 못하자 주인은 그 팔뚝을 끌어잡아 밖으로 내쫓으니 이씨는 통곡하며 하는 말이, ‘내가 부인이 되어 능히 수절하지 못하고 이 손을 남에게 잡혔단 말이냐.’ 하고 곧 도끼를 들어 그 팔을 끊었습니다.
만약에 이씨와 같은 절개를 지닌 자라면 누가 능히 담장을 넘어서 위협을 하오리까. 혹 담장을 넘은 자에게 위협을 당하여 실절하게 된다면 이는 하나의 음부(淫婦)이오니 통렬하게 법으로 다스려야 하옵니다. 대장(大匠)도 졸공(拙工)을 위하여 승묵(繩墨)을 고치거나 폐하지 않는데, 제왕(帝王)이 어찌 한 음부를 위하여 고치지 못할 법전을 경솔히 고친단 말입니까. 우리 전하께서 성을 계승하시니, 사방 백성들이 눈을 씻고 다스려지기를, 고대하는 이때에 절의를 숭장(崇奬)한다는 하교가 중외(中外)에 반포됨은 듣지 못하고, 문득 한 사람의 신빙성도 없는 말로 인해서 부인이 실절(失節)하는 문을 크게 열어놓는다면 풍화(風化)에 누가 되옵거늘 이 어찌 사소하다 이르오리까."
하니, 왕은 필상(弼商)의 의논에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8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00 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윤리-강상(綱常) / 사법-법제(法制) / 풍속-예속(禮俗) / 신분(身分) / 인사-관리(管理)
- [註 657]상부(孀婦) : 나이 젊은 홀어미.
- [註 658]
행로(行露) :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행로(行露)장을 말한 것인데 여자가 정조를 지키는 것을 뜻함.- [註 659]
백주(柏舟) : 위 세자(衛世子) 공백(公伯)의 아내 공강(共姜)의 수의(守義)를 맹서한 《시경(詩經)》의 편명.- [註 660]
이천(伊川) : 정이(程頤).- [註 661]
삼사(三師) :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己卯/先是, 丹城訓導宋獻仝因災變上疏十七條, 其一條曰:
孀婦改嫁之禁, 欲崇節義, 而尙廉恥也。 然飮食男女, 人之大欲, 故男子生而願爲之有室, 女子生而願爲之有家。 此有生之初, 人情之所固有, 而不能止之者也。 且婦人有三從之義, 在家從父, 適人從夫, 夫死從子。 卽《禮經》之敎也, 然或有三日而爲孀者, 期月而爲孀者, 或年至二十、三十而爲孀者, 終能守貞節, 如共姜、曹氏則已矣, 無父母兄弟, 又無其子, 或爲行露之所沾, 或爲踰墻之所脅, 終失素節, 往往而是。 請婦女年三十以下, 無子女爲孀者, 皆許改嫁, 以遂生生之計。
命議于政府、六曹。 尹弼商議: "《大典》所載, 不可輕改。 成宗之敎, 洋洋盈耳, 臣不敢擅便。" 盧思愼、愼承善、韓致亨議: "《大典》法, 不可輕易紛更。" 魚世謙、成俊、李克墩、柳輊、李世佐、尹孝孫、盧公弼、許琛、李陸、李淑瑊、李堪議: "《大典》之法, 非禁再嫁也, 但其所生, 不得敍顯職耳。 然士族皆欲其子孫通仕路, 不墜家聲耳。 此法一立, 誰肯娶再嫁女, 以錮其所生, 甘爲庶民乎? 故年少寡女, 世多有之。 當初議諸廷臣, 皆對以 ‘幼年寡居, 生理甚難。’ 非不曲盡其情, 先王猶斷自宸衷, 載之《大典》, 垂之於後, 所以勸節義、正風俗也, 今不可輕改。" 鄭文炯議: "年少寡婦, 獨居失節, 敗常亂俗, 或傷和召災, 正如宋獻仝陳言, 請依律文及祖宗朝古例施行, 使無怨女。" 朴安性、金悌臣、金敬祖、安瑚議: "王蠋曰: ‘烈女不更二夫。’ 蓋婦人之義, 從一而終。 國家前此三嫁之女, 錄於恣女案, 其子孫不敍淸要之職。 今《大典》再嫁子孫, 勿敍東西班之法, 所以重節義, 而不禁之禁也。 然年少寡婦, 無父母兄弟之托, 而零丁孤苦, 抱怨老死, 豈無感召? 或有迫於窮困, 流離失所, 汚行毁節, 而士族卽爲庶人, 則求以全節, 而反以毁之, 不可不變通, 而救之也。 依祖宗朝舊例, 再嫁女子孫, 淸要職外, 許通仕路。" 申浚議: "再嫁女子孫, 勿敍東西班之法, 雖非祖宗舊典, 專以崇奬節義, 砥礪風敎也, 而載之《大典》。 今以一人陳言, 似難更改。 第念, 國家典章, 必使流通無弊, 然後永爲遵守。 脫有孀婦或迫於父兄、宗族, 或出於飢寒、困窮, 以至再嫁, 而所生之人, 有賢能可用者, 於東於西, 俱不見敍, 則臣恐此法終爲不通, 須使更張, 乃可無弊矣。" 洪貴達、趙益貞議: "婦人從一而終, 固其道也。 《大典》再嫁之禁, 所以礪節義也。 法非不美, 弊復有之。 古之人, 二十而嫁, 或二十三年而嫁。 今之士族家嫁其女, 率於十歲以前, 其或晩婚, 猶在二十歲之前。 嫁而有一二年而寡者, 有三四年而寡者, 未及古之當嫁之年, 已作未亡人之身。 其父母、親戚愛惜家風, 不使再適, 爲士者亦慮其子孫之錮, 不肯娶孀女。此所以多怨曠之女, 傷和召災, 未必不由於此。 間有不勝情慾, 自失其節, 或爲强暴所汚, 累其家世者多。 始則求以礪節義, 其終毁節義者, 未必不由於此。 有甚可矜者, 只有一女而寡者, 拘於法, 不改嫁則其父母之後, 自此遂絶, 豈不痛哉? 烈女、節婦世不多得, 間或有之, 則國家固宜褒奬, 以勸其餘。 若必人人而責其有柏舟之節, 則臣等恐未可必得, 而其弊反有如上所云。 此法祖宗朝所未有, 成宗斷自宸衷而立之, 特欲激礪人心爾, 其時廷臣皆以爲不可。 今之議者, 有言不可改者, 特以輕變《大典》爲未可爾, 非謂法之無弊也。 《周書》曰: ‘道有升降, 政由俗革。’ 臣等意竊謂, 變而通之, 無妨也。" 朴崇質、李克圭議: "再嫁所生, 許通仕路, 祖宗朝舊例。 獻仝陳言, 意亦可採。 雖云《大典》所載, 隨時變通, 實合時宜。" 李季男、鄭眉壽議: "我國家秉節義、禮敎, 而再嫁之事, 尙襲前朝弊風, 故士族之家, 非獨再嫁, 或至於三。 成宗欲正風俗, 其子孫勿敍東西班, 其重崇節義、整頓風俗至矣。 今不可從浮薄之論, 改先王美法。" 鄭錫堅議: "謹按, 朱文公 《小學》書, 或問: ‘孀婦於理似不可取, 如何?’ 伊川先生曰: ‘然。 凡娶所以配身也。 若娶失節者以配身, 是已失節也。’ 又問: ‘或有孤孀, 貧窮無托者, 可再嫁否?’ 曰: ‘只是怕寒餓死, 故有是說, 然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 釋之者曰: ‘取婦共承宗廟, 以傳嗣續。 若娶失節者爲配, 則與己之失節同矣。 其失節極大云者, 失身再嫁, 中心羞愧, 無以自立於天地之間, 雖生何益哉?’ 前朝時, 大倫不明, 凡士女再嫁, 不以爲怪, 至適三夫者有之, 而其三適子孫, 不通仕路之法, 始自前朝。 在我祖宗朝, 一新汚俗, 崇重節義, 故再嫁者人皆鄙之, 而子孫仕路有不禁焉。 我成宗特以明倫爲重, 出自宸衷, 再嫁子孫勿敍之法, 竝錄《大典》。 其時稟定, 大臣獻議曰: ‘如此則早寡者, 以累及子孫爲恥, 未能改嫁, 而私汚失節者必多, 請勿載《大典》。’ 成宗不允曰: ‘後王雖或改之, 予不可不立。’ 今獻仝之言, 雖老於世故, 然朱熹、程頤光明正大之論旣如彼, 而《大典》只云: ‘子孫勿敍東西班職。’ 更無再嫁之禁。 其不以失節爲極大者, 亦能自處矣, 有何害政之大? 先王重人倫大節, 宸斷定法, 欲使聖子神孫繼述萬世, 而三年諒陰之餘, 遽因一書生之言, 下議成憲改否, 臣以爲不可。" 李昌臣議: "婦之從夫, 終身不改, 臣之事君, 有死無二, 此人道之大倫也。 五代大臣馮道, 國滅君亡, 則又事他姓, 若逆旅之視過客。 雖寵冠三師, 歷相五朝, 自稱長樂老, 先儒交譏, 稱爲賣國之奸, 何則, 大節已虧故也。 有婦人於此, 少寡無子, 誠可哀慟。 若再適於人, 庶有生理, 然以義揆之, 則亦女中一馮道也, 何面目立於天地間乎? 昔曺文叔妻名令女, 少寡無子。 其父憐之, 欲再嫁, 令女曰: ‘禽獸之行, 吾豈爲乎?’ 斷髮焉, 截耳焉, 斷鼻焉, 誓死却之。 至今千載之下, 聞者澟然斂袵。 或問於伊川先生曰: ‘有孤孀, 貧窮無托者, 可再嫁否?’ 曰: ‘只是後世, 怕寒餓死, 故有是說, 然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 臣以爲, 雖聖人復起, 不易斯言。 我成宗大王以天縱之聖, 知節義乃國家之元氣, 故錄忠臣之後, 擢孝行之人, 旌節婦之門, 其砥礪一世如此, 猶慮王綱墜地, 當刪定《大典》時, 下列聖未發之敎乃曰: ‘失行婦女及再嫁女所生, 勿敍東西班職。’ 蓋惡其親之失節, 而不欲汚衊朝班也, 其扶植綱常, 挽回世道之意至矣。 以此防民, 猶士族婦女再適者, 比比有之, 其主婚家長, 不抵於罪, 然則再適者, 亦未嘗苛禁也, 又何必立法以勸之哉? 宋獻仝之言曰: ‘或爲踰垣之所脅, 而終失素節者, 夫豈萬萬?’ 臣愚以謂不然。 昔王凝以虢州參軍, 卒於官。 凝家素貧, 其妻李氏過開封, 止於旅舍, 主人不納。 李氏顧天已暮, 不肯去, 主人牽其臂出之。 李氏慟哭曰: ‘我爲婦人, 不能守節, 而此手爲人所執耶?’ 卽引斧自斷其臂。 如有李氏之節者, 孰能踰垣而脅之? 其或見脅於踰垣之人, 而失節者, 特一淫婦也, 在所痛繩以法也。 大匠不爲拙工改廢繩墨, 帝王豈宜爲一淫婦, 輕改不刊之典乎? 我殿下以聖繼聖, 四方萬姓, 拭目望治之日, 未聞崇奬節義之敎, 播告中外, 而遽因一人無稽之言, 大開婦人失節之門, 則有累風化, 豈淺淺哉?" 從弼商議。
- 【태백산사고본】 8책 28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300 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윤리-강상(綱常) / 사법-법제(法制) / 풍속-예속(禮俗) / 신분(身分) / 인사-관리(管理)
- [註 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