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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28권, 연산 3년 10월 7일 을해 2번째기사 1497년 명 홍치(弘治) 10년

삼위 선유관 동청례가 보고한 사행의 일정 내용

삼위 선유관(三衛宣諭官) 동청례(童淸禮)가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삼위(三衛)의 야인(野人) 이목장합(李木長哈) 등 70사람이 지난 7월 초순에 만포(滿浦)에 와서 우리 나라 사신(使臣)을 기다리다가 신(臣)의 선성(先聲)을 듣고서 3사람은 먼저 그 추장에게 알리기 위해 돌아갔고, 4사람만 남아 기다리고 있으므로 신은 말하기를, ‘지금 내가 하사할 물건을 많이 싸가지고 왔다. 만약 너희들이 나를 거년에 인도하던 길에서 영접한다면 나는 끝내 가지 않겠으니, 전자에 약속했던 만거(滿車)의 길이 자못 평탄한즉 그곳으로 와서 영접해 달라.’ 하였더니, 4사람이 모두 ‘약속대로 하리다.’ 하고 먼저 떠나갔습니다.

8월 23일. 우위 추장(右衛酋長) 보하토(甫下土)가 삼위(三衛) 야인(野人) 50명을 거느리고 와서 신을 만포(滿浦)에서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24일에 관찰사가 보하토 등을 선위(宣慰)하고 물건을 주는데 차등을 두었습니다.

25일. 신은 배를 타고 떠나서 저녁에 고산리(高山里)에서 잠을 자고 보하토 등은 강을 건너 황성평(皇城坪)에서 잤습니다.

26일. 신은 강을 건너 보하토 등과 만거(滿車)의 길을 경유하여 10여 리를 더 가니 우라 산성(于羅山城)야인 11명이 와서 영접하였고, 또 50리 쯤 가서 이산(理山)595) 비라(飛羅)596) 에서 야숙(野宿)하였습니다.

27일. 우라 산성(于羅山城)야인 11명에게 각각 면포(綿布) 1필과 종이 2권 씩을 주고 드디어 통행하여 겨우 10여 리를 가니 땅 이름이 삼기(三岐)라 하였습니다. 그 동북에 지름길이 있으니 바로 건주위(建州衛)로 가는 길이었고 그 서쪽에는 시냇물이 있으니 바로 이산 비라의 상류였습니다. 이 시냇물을 타고 내려 가면 작은 오솔길이 있으니 바로 이산(理山)을 가리키는 길이었습니다. 삼기(三岐)로부터 시냇물을 모두 20여 곳이나 건너서 40여 리를 가니 재[嶺]가 있는데, 이름이 울지(鬱地)였습니다. 그 재는 높고 가파르지 않으며 수목만이 매우 빽빽했습니다.

또 10여 리를 더 가서 산기슭에서 노숙(露宿)을 하는데, 우라 산성(于羅山城)야인(野人) 10여 명이 와서 고하기를, ‘우리들이 고려와 본디 원수로 지낸 일이 없었는데, 기해년에 우리 노약(老弱)들을 엄습하여 죽였으므로 매양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심히 아픕니다만, 지금부터 서울에 올라가 숙배(肅拜)를 드리기 원한다.’ 하므로 신이 그 성명을 기록해 가지고 왔습니다.

28일. 길을 떠나 겨우 30리를 가자 풍설(風雪)이 갑자기 몰아쳐서 유숙을 하니 바로 만거평(滿車坪)이었습니다.

29일. 길을 떠나 10여 리를 가니 평야(平野)가 있는데, 넓이는 2, 3리 가량이요 길이는 30리 가량 되며 땅이 매우 비옥하였습니다. 동행하는 야인(野人)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땅에 살고자 한 적이 오래였으나 고려가 두려워서 감히 못했소. 지금엔 이미 귀순(歸順)하였으니 명년 봄쯤 이사하고 싶소.’ 하였습니다. 또 4, 5리를 가니 고개가 있는데, 이름은 진고개(陣高介)라 했으며, 큰 나무를 베어 길을 막아 놓고 판자를 세워 방패와 같이 만들었으니, 이는 바로 야인(野人) 김산적하(金山赤下)가 설험(設險)한 것이었습니다. 동행하는 야인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는 바로 고려가 쳐들어올 적에 원군(援軍)을 머물러 둔 곳이다.’ 하였습니다.

또 7, 8리 가니, 인가(人家) 8집이 있는데 바로 관로(管老) 등이 새로 이사한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밥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다투어 신 등을 먹이는데 얼굴에 기쁜 빛이 있지 아니한 자가 없었습니다. 또 15리 쯤 가니 인가가 4집이 있는데 바로 김산적하(金山赤下)의 도당이라 모두 문틈으로 엿보기만 하고 영접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또 1, 2리를 가서 포주강(蒲州江)에 당도하니, 김산적하 등 30여 명이 혹은 화살통을 차고 혹은 칼을 차고 말 탄 자와 걷는 자가 서로 사이사이 끼었는데, 한 사람이 갑옷을 입고 강상(江上)에 와서 칼을 휘두르다가 활을 당기어 땅에다 쏘고 크게 외치면서 이리저리 치닫더니, 강 건너편에서 이쪽의 동행하는 야인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무슨 까닭으로 고려 사신을 끌고 여기에 왔느냐. 고려 사신이 일찍이 너희들 사는 데 와서 너희들을 먹여주고 싸다주고 하더니 두어 달도 못 가서 너희 조상을 목베어 갔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이 끌고 다시 왔으니 누구를 해치자는 거냐.’ 하고 마침내 신을 가로막고 건너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부득이 강상(江上)에서 머물렀던 것입니다.

9월 1일. 산적하(山赤下)들이 신을 가로막기를 어제와 같이 하므로 신은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신의 형(兄) 아망합(阿亡哈)이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산적하의 마을을 경유하여 강을 건너와서 하는 말이 ‘저 무리들은 두려울 것이 없으니 만약 끝끝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면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가자.’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산적하(山赤下)가 사람을 보내어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가서 보고 싶은데 허락을 해 줄는지 몰라서 주저하는 것이다.’ 하므로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나를 건너가게 하든지 나를 가로막든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너희들 사는 곳이 이 강에서 겨우 1, 2마장 거리인데, 어찌 반드시 몸소 네 마을을 밟아야 만이 너희들의 지름길을 안단 말이냐. 너희가 과연 나를 보고자 하거든 빨리 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산적하(山赤下) 등 7인이 강을 건너와서 두 번 절을 하고 앉으므로 신이 묻기를,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나를 가로막았느냐.’ 하였더니, 산적하의 말이 ‘내가 일찍이 고려에게 죄를 지었으므로 삼위(三衛)와 내통하여 우리를 해칠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음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만약 너를 공격하려고 했다면 당연히 군사를 거느리고 올 것이지, 어찌 이처럼 고단하고 약하게 오겠느냐. 너희들이 일찍이 7살 난 아이를 돌려보내겠다고 약조하고 마침내 약속을 저버렸으니, 죄가 하나요, 변방의 우리 백성을 사로잡아 갔으니, 죄가 둘이요, 지금 또 나를 가로막았으니, 죄가 셋이다. 너희들이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이는 너희가 너희를 스스로 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만약 마음을 고친다면 마땅히 너희에게 따라가기를 허하겠다.’ 하였습니다.

산적하는 ‘그렇게 하겠다.’ 응락하고, 도로 건너가서 배 10여 척을 모아 신을 건너주려고 하는데, 야인 4명이 와서 정지를 시키고 다시 떠들썩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한 야인이 와서 고하기를, ‘우리 집 앞 여울로 건너갈 수 있소.’ 하므로, 신은 행장을 단속해서 물러오니, 산적하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동악(同惡)의 무리와 다투어 배를 내어 와서 영접했는데, 신은 짐바리를 풀지 아니하고, 즐겨 건너갈 것 같이 아니하니, 그 사람이 건너기를 심히 경근하게 청하므로 신은 마침내 건너가서 산적하의 집에 당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산적하는 그 아비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술 4, 5병을 들고 와서 대접하므로 신은 그 아비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 나라와 본시 원혐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위원(渭原)에서 장난을 하였느냐?’ 하였더니, 그 아비의 말이 ‘불초한 자식들이 두 가지 일에 원한을 품고 감히 불공(不恭)한 짓을 한 것입니다.’ 하므로, 신은 ‘그 두 가지 일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낭보을간(浪甫乙看)이 나와 7촌(寸) 친척인데, 예전에 회령(會寧) 사람이 까닭 없이 꾀어 죽였으며, 또 임인년에 고려에서 부령(富寧)의 도민(逃民)을 체포하는데 우리 친척이 역시 구속당해 갔으므로 이 두 가지로 해서 자식들이 한을 품은 것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국가에서 보을간(甫乙看)을 죽인 것을 그 이서응합(伊鋤應哈)이란 자가 국가를 모반한 때문이다. 보을간의 아들이 6형제인데 그중 3형제는 그 아비와 한때 피살되었고, 남은 3형제는 빠져나가서 복수할 것을 꾀하다가 한 자식이 또 전사(戰死)하고, 그 후로 두 아들과 조카가 서로 이어서 귀순했는데 너는 도리어 7촌의 친척으로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느냐. 허수라(虛誰羅) 야인(野人)부령의 도민들을 숨겨주었으니, 그 죄가 진실로 죽여 마땅하거늘 국가에서 잡아갔다가 곧 석방하여 돌려보냈으니, 그 은혜가 지극히 큰데 너는 어찌 이것에 핑계를 하느냐? 달한(達罕)은 바로 너의 추장이다. 그 선조가 다 국가에 피살되었으니, 달한이 만약 네 마음 같으면 어찌 즐겨 귀순하겠느냐.’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러 야인들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신이 우리들의 본말(本末)을 잘 알고 있으니 여러 말 할 것이 없다.’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지나쳤소. 사신이 과연 우리를 사랑해 준다면 나는 당연히 수행하여 오직 명령에 복종하겠소.’ 하였습니다.

신이 또 5리 쯤 가서 유숙하는데, 동행한 야인(野人)이 신에게 말하기를, ‘예전에 중국 사신이 이곳에 와 밤을 나면서 호각을 불어, 사로잡혀온 자들이 듣고 빠져 도망해 왔으니, 지금 사신도 역시 불어야 합니다. 또 이 땅이 화라온(火剌溫)·올적합(兀狄哈)과 이웃이 되었기 때문에 절도(竊盜)가 많으니 더욱 마땅히 호각을 불어서 방비해야 한다.’ 하므로 신은 그 말에 따랐습니다.

2일. 20리 쯤 가니 야인 왕부리합(王夫里哈) 등이 살고 있으며, 또 30여 리를 가서 아라가사리(阿羅加舍里)에 당도하니, 건주위 도독(建州衛都督) 나하(羅下)의 아들 나오장(羅吾將)이 2, 3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사람을 시켜 호각을 불며 영접나와 하는 말이, ‘내가 의물(儀物)을 갖추어 명령을 맞으려고 하였는데, 지금 사신이 갑자기 와서 예식대로 할 겨를이 없었소.’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매우 아름다워 나이는 겨우 23세인데 신장이 8자 쯤 되고 기상도 준수하고 점잖았습니다. 그 아비의 작(爵)을 승습하여 추장(酋長)에 다음 가니 바로 신의 6촌(寸) 친척이었습니다.

신이 드디어 유숙하면서 여러 야인들과 쇄환(刷還)의 일을 이야기하는데, 나오장(羅吾將)이 곁에서 듣다가 하는 말이 ‘나도 역시 인물(人物)을 쇄환하고 싶은데, 다만 사신이 내 마음이 옥(玉) 같은 줄 모르고, 도리어 나더러 일찍이 도절(盜竊) 했다고 할까 걱정이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내가 내 눈으로 본 일인데 어찌 그럴리가 있겠느냐. 지금 비록 쇄환할지라도 단연코 너를 의심할 리가 없다. 그러니 네가 만약 능히 쇄환을 한다면 국가는 너의 효순(效順)한 그 뜻을 충분히 알 것이다.’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내 부하가 일찍이 사로잡은 고려 사람을 당장 얽어다 바치겠다.’ 하고, 곧 한 사람을 달려 보내므로 신은 그 사람에게 붉은 면포(綿布) 한 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건주위(建州衛) 야인 조삼파(趙三波)의 아들 8형제가 각기 술 한 그릇씩을 가지고 와서 신을 먹이며 말하기를, ‘삼위(三衛)의 추장이 이미 귀순(歸順)하였으니, 우리들도 역시 귀순하고 싶다.’ 하므로, 신은 각각 면포 한 필과 종이 한 권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대대로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3일. 30리 쯤 가니 야인(野人)의 집이 10여 호가 있는데 이는 바로 나오장(羅吾將)이 사는 곳이었고, 또 20리를 가니 50여 집이 있는데 바로 달한(達罕)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10리도 다 못가서 달한의 아들 보라다(甫羅多)와 좌위 추장(左衛酋長) 토로(土老) 등이 사람 10여 명을 거느리고 다 술을 들고 와서 영접했습니다. 거기서 5리 쯤 가니 달한이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전립[笠]을 쓰고 녹사(綠紗)·흉배(胸背)597) 를 입고 사람을 시켜 소라[螺]를 불리며 와 영접했는데, 말 위에서 은 술잔에 술을 부어 신을 먹이고 앞서 인도하여 그 집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달한으로 하여금 긴 상을 설치하게 한 뒤, 서계(書契)를 그 위에 놓고, 달한과 그 군하(群下) 1백여 사람을 사배(四拜)하게 하고, 동서로 열지어 앉힌 다음에 선온(宣醞)598) 을 먹이며 물품을 나누어 주고 또 사목(事目)에 대한 뜻을 말하니, 달한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인하여 신에게 닭구이와 소주를 대접하고 서로 더불어 수작하는데, 비파(琵琶)를 타고, 시시음(屎屎音)599) 을 당기고 박판(拍板)을 치곤 하였습니다. 달한이 취하여 춤추면서, 제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소란을 피워 비록 금백(金帛)을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이 항상 공포에 싸여 다리를 펴고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니, 어찌 오늘처럼 은사(恩賜)를 받고 즐겁겠느냐.’ 하였습니다. 술자리가 파하자 달한은 또 신을 침방으로 청하여 다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풍악놀이를 하면서 그 아내를 시켜 술을 권하게 하여 실컷 마시고 파했습니다.

온하위(溫下衛) 야인 박고리(朴古里) 등이 지난 8월에 만포(滿浦)에 와서 고하기를 ‘건주위(建州衛) 심자라로(沈者羅老)의 둔(屯)에 고려에서 사로잡혀온 표(表)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으므로 우리들이 쇄환하려 하니 자라로(者羅老) 등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사로잡혀 온 사람이 마침내 도망가자 자라로 등은 우리더러 꾀어냈다 하고 2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 마을을 4일 동안이나 포위하므로 우리들은 대항할 수가 없어 말 1필과 소 2마리를 주었으니, 원컨대 국가에서 건주위(建州衛)에 타일러서 다시 소란을 일으키지 않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건주위에 당도하여 그 추장(酋長)에게 물으니, 달한은 ‘모르는 일이다.’고 대답하는데, 자라로 둔에 사는 야인(野人)이 마침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이것은 추장이 모르시는 일입니다. 당초에 온하위가 고려 사람을 우리 둔(屯)에 팔려 하므로 우리 둔에서 샀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온하위(溫下衛)에서 도로 사가려 하면서 핑계하기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하므로, 우리 둔에서 대답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쇄환할 일이지, 어찌 너희에게 주겠느냐?」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했는데 이윽고 그 사람이 도망했으니 이는 반드시 온하(溫下) 사람이 유인해 간 것입니다.’ 하기에, 신은 말하기를, ‘온하위가 처음에는 비록 우리 변방 백성을 사로잡아 갔지만 그 뒤로 바로 곧 쇄환라려 하는 것을 너희가 허락하지 아니하고 너희들 역시 쇄환하지 아니하였으니, 자못 귀순(歸順)할 뜻이 없다고 볼 수밖에 더 있느냐.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허물하지 아니할 것이니, 이제부터는 다시 그들을 요란하게 하지 말라.’ 하자,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감히 경종(敬從)하지 아니하리까.’ 하였습니다.

신은 건주위(建州衛)에게 묻기를 ‘고사리(高沙里)와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거피선(車皮船)을 매복한 것은 누가 한 짓이냐?’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이는 필시 연전에 위원(渭原)에서 장난한 자의 소행일 것이요. 그러나 사신이 왔다 간 뒤로부터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을 보증하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그 배는 새로 만든 배이고 해가 지난 묵은 배가 아니다.’ 하니, 그는 말하기를, ‘대범 배를 만들어 엎어 묻으면 나중에 파내도 썩은 빛이 없습니다. 사신은 그 새 것 같음을 믿지 마오.’ 하였습니다.

신의 형 아망합(阿亡哈)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아우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제종(諸種)의 야인들이 귀순(歸順)했다고 아뢴 것이니, 후일에 만약 변방을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국가에서 반드시 아우를 치죄할 것인즉, 나의 사는 곳이 비록 멀지만 장난친 자를 수색해서 잡겠다. 그리고 장난치는 자들이 반드시 달빛을 타고 강을 건너갈 것이니, 무릇 달 밝은 때는 변장(邊將)이 군사를 매복하고 기다리다가 만약 적이 강을 건너거든 구태여 언덕에 오를 적에 쫓아 잡을 것이 아니라 가만히 그 배를 탈취하여 강 가운데 흘려보내어 건너지 못하게 하고, 날이 밝으면 수색해서 포박하여 그 마을 가운데에 가서 죄를 성토하고 베이면 동악(同惡)들이 공포에 떨어 감히 다시 변방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4일. 달한 등이 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신 등을 위로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오늘날 은사(恩賜)를 받았으니 영광이 더할나위 없은즉, 이제부터는 부하로 하여금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단속하라.’ 하니, 달한은 대답하기를, ‘큰 무리는 앞으로 영원히 근절될 것이오. 그러나 그 소소한 무리들이 절도질하는 것 쯤은 반드시 없다고 보증하기는 어렵소. 고려에서 성을 쌓고 문을 만들어서 엄한 법으로써 제지하여도 그 백성이 오히려 강도질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가에서 3명의 노복(奴僕)을 부리고 있는데 그 집물(什物)을 잃어버려도 어느 놈이 도둑질해 갔는지 오히려 모르는 판이거늘, 하물며 지금 야인이 초야에 흩어져 사는데 어느 놈이 장난친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소. 우리들이 비록 탐색하고 싶지만 그들이 만약 활을 쥐고 풀 속에 잠복하였다면, 우리 역시 몸을 해칠까 두려워서 끝내 탐색을 못할 것이니, 이제부터 만약 장난을 하는 자가 있으면 구태여 대군(大軍)을 발동시킬 것이 아니라 단지 비장(裨將)만 보내어 우리들로 하여금 수색해 잡으라 한다면 마땅히 힘을 다해 잡아 내어 관군에게 넘길 것이니, 국가에서 공공연히 포주(浦州) 강변에서 베어 우리 야인으로 하여금 함께 보게 한다면 비록 절도질하는 자라도 역시 영원히 근절될 것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역시 믿을 수 없으니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데 대인이 싫어하지 않겠소? 지금으로부터 화와 복이 전적으로 대인에게 달려 있소. 지금 나를 따라온 군졸(軍卒)이 자못 많아 그 도로의 험하고 평단한 것을 모두 역력히 알았으니, 국가에서 만약 공격을 하려면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오. 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대인(大人)도 일찍이 듣지 못했소?’ 하니, 달한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런 강한 자도 오히려 토벌하기를 이와 같이 쉽게 하였는데, 하물며 이 땅은 우리 나라에서 거리가 험한 길로 와도 사흘 길이며 평탄한 길로 오면 겨우 이틀 길밖에 아니 되니, 대인이 만약 귀순한다면 영원한 세대를 편안히 업에 종사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자손이 씨가 없을 것이오. 내 말이 일면으로는 대인에게 공갈치는 것 같지만 일면으로는 대인을 보호하는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오.’ 하니, 달한은 좌우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도 이 말을 체념(體念)하라.! 이 땅의 도로가 확실히 올적합(兀狄哈)의 사는 곳보다 평이하니, 만약 장난을 하면 와서 토벌하기가 진실로 쉬울 것이다. 올적합대금(大金)으로도 능히 제어하지 못했는데 지금 고려는 능히 깨뜨렸으니 하물며 우리들이겠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고려에서 만약 도로를 다 알고 있다면, 장난하는 자가 스스로 굴복할 것이니, 사신은 모름지기 도로를 소상히 알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5일. 신은 도독(都督) 나오장(羅吾將)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달한(達罕)이 사는 데와 거리는 20여 리 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나오장이 부하를 거느리고 술을 들고 신을 5리 밖에까지 나와 영접하였으며, 그 집에 당도해서는 소를 잡고 잔치를 배설하여 신 등을 공대하므로, 신이 사물(賜物)을 주자 나오장은 절하고 받으며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마침내 그 집에서 유숙하였습니다.

6일. 신은 좌위(左衛)에 당도하였는데 그 지역은 나오장(羅吾將)의 집에서 거리가 60여 리였습니다. 추장 토로(土老)가 부하 40여 명을 거느리고 사모(紗帽)를 쓰고 대홍(大紅)색 곤룡(袞龍) 단령(團領)을 입고 사람을 시켜 작은 호각을 불리며 5리 밖에까지 환영을 나왔습니다. 서로 말 위에서 술을 마신 뒤 앞서 인도하고 갔는데, 그 집에 당도하니 토로 등은 서계(書契)에 절을 하고 사물(賜物)을 받았습니다. 신은 효유하기를 달한에게 하듯이 하니, 토로는 말하기를, ‘삼위(三衛)는 모두 한마음이라 다시 딴 말이 없을 것이며, 뒤에 만약 장난을 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가까운 곳에 나아가 고하겠소.’ 했습니다. 드디어 술자리가 벌어져 날이 저녁때가 되어서야 파했는데, 토로의 아내가 옷을 잘 단장하고 여종 5, 7명을 거느리고 사람을 물리친 후 와서 절을 하였습니다.

7일. 신이 좌위(左衛)에 머물러 추장 보하토(甫下土)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마땅히 대인의 사는 곳에 가서 사물(賜物)을 반급(頒級)하여, 부락 사람들로 하여금 화친의 뜻을 인식시키고 싶소.’ 하였더니, 보하토가 하는 말이 ‘본위(本衛)가 화라온(火剌溫)·올적합(兀狄哈)과 틈이 벌어졌기 때문에 내가 지금 딴 곳에서 살고 있으므로, 비록 그곳에 간다 하여도 역시 본위는 아니니, 이곳에서 사물을 받고 싶소.’ 하므로, 신은 마지 못해 마침내 증여를 하였습니다.

보하토는 자기의 거지(居地)가 아니라는 점에서 잔치를 베풀지 못하고 마침내 소 2마리를 잡아서 신의 행주(行廚)로 보냈습니다. 삼위(三衛)의 추장과 그 부하들이 똑같은 말로 신에게 고하기를, ‘우리들의 고변(告變)하는 것이 단지 만포(滿浦)에만 허여되었기 때문에 먼 데 사람이 달려와 고하자니 늦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컨대 지금으로부터 삼위가 각각 가까운 고을에 고할 수 있도록 허하여 주오. 그리고 우리들의 조공(朝貢)하는 것도 역시 전례에 속하게 하여 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허혼(許渾)이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므로 그 처자들이 통심(痛心)하지 않는 자가 없소.’ 하였습니다.

8일. 신이 출발하여 돌아오는데, 보하토달한의 아들 다지합(多之哈)과 신의 형 아망합(阿亡哈) 등이 삼위의 제종(諸種)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호송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아라가사기리(阿羅可舍其里)에서 유숙하였는데, 야인 가음가(家音可) 등이 소와 술을 가지고 와서 신 등을 공대하므로 신은 종이와 선자(扇子)600) 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또 야인 마가고대(馬可古大)에게 청홍(靑紅)색 면포(綿布) 등의 물건을 주어서 우라산성(于羅山城)의 비장(裨將) 청영합(靑英哈)·남대(南大) 등에게 부쳐주게 하였습니다.

보하토(甫下土)는 말하기를 ‘사신께서 물으신 코 베인 사람은 지금 가음가(家音可)의 집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내놓으라고 책한다면 저들이 나더러 밀고했다고 하여 반드시 나에게 원망을 맺을 것이니, 사신이 본국에 가서 가음가가 떠나는 것을 기다려서 바로 내놓으라고 책하면 응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하므로, 신이 가음가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나라를 사모하여 나를 대우하기를 심히 후하게 하니, 그 마음이 가상하다. 다른 날에 국가에서 비록 조그마한 물건을 내려 줄지라도 너희들은 반드시 친히 와서 받아가라.’ 하니, 모두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개개인의 성명을 기록해 왔습니다.

9일. 야인(野人) 왕사로(王斜老) 등 10여 명이 그 말과 소로써 자작지(自作只)에 사로잡혀 온 양가(良家) 여자 연수(延壽)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신은 저녁에 포주(蒲州) 강변에서 유숙하는데, 야인 오로도(吾老道)가 와서 고하기를, ‘지난 5월에 산을 타고 위원(渭原) 땅을 가다가 세 노인이 둥우리에서 매[鷹]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전일 같으면 당장에 사로잡아 왔을 것이지만 지금은 귀순했기 때문에 단지 응자(應子)만 빼앗아 왔소.’ 하였습니다.

나오장(羅吾將)으로부터 보내온 야인이 신에게 말하기를, ‘사로잡혀 온 사람 최효종(崔孝宗)을 사신이 계신 곳으로 데려오려 하나 최효종이 믿지 않아 즐겨 따라오지 않으므로 내가, 사신이 증여한 붉은 면포(綿布)를 가져다 보이니, 효종이 마침내 깨닫고 곧 떠나 왔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 효종이 이미 본국(本國)으로 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드시 도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어 밤에 잘 적에는 포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효종은 혹시 다른 곳으로 전매(轉賣)되지 않나 염려하여 풀어 준 것을 기화로 마침내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곧 나무에 글월을 새겨서 여러 길목에 나누어 돌려, 산을 다니는 야인에게 억류하지 못하게 타일렀습니다.’ 하더니, 신이 만포(滿浦)에 당도하매 수하(水河)의 진장(鎭將)에게 공문을 보내서 효종(孝宗)의 돌아온 것을 보고하게 했습니다.

10일. 5리 가량을 가느라니 산적하(山赤下)가 그 부모와 함께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신 등을 길가에서 접대하고, 인하여 연전에 사로잡아 간 위원(渭原)의 여자를 신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신은 저녁에 울지(鬱地)의 동구(洞口)에서 유숙하였습니다.

11일. 울지의 산기슭에서 유숙하는데, 초저녁에 온하위(溫下衛)에 사는 사람 40여 명이 다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고, 또 산 소 한 마리를 기증(寄贈)해 왔습니다.

12일. 신은 삼위(三衛)로부터 호송해 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13일. 신은 만포 첨사(滿浦僉使) 이윤종(李胤宗)과 호송해 준 야인을 위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를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8책 2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284 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외교-야(野) / 역사-전사(前史)

  • [註 595]
    이산(理山) : 우리 나라 군명.
  • [註 596]
    비라(飛羅) : 호어(胡語)에 간수(澗水)를 비라라 한다.
  • [註 597]
    흉배(胸背) : 소매 없는 옷.
  • [註 598]
    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한 술.
  • [註 599]
    시시음(屎屎音) : 그 제도는 해금(奚琴)과 거의 같다.
  • [註 600]
    선자(扇子) : 부채.

○三衛宣諭官童淸禮復命啓: "三衛野人 李木長哈等七人, 去七月初到滿浦, 待我國使臣。 及聞臣先聲, 三人先還, 報其酋長, 四人留待。 臣語之曰: ‘今吾多齎賜物, 若汝輩迎我於去年之路, 則我終不敢行矣。 前所約滿車路頗平坦, 可來迎也。’ 四人曰: ‘固當如約。’ 遂先去。 八月二十三日, 右衛酋長甫下土率三衛野人五十, 迎臣于滿浦。 二十四日, 觀察使宣慰甫下土等, 贈物有差。 二十五日, 臣乘舟, 夕宿高山里甫下土等越江宿皇城坪。 二十六日, 臣越江, 與甫下土等由滿車路, 行十餘里, 于羅山城 野人十一來迎。 又行五十里許, 至理山飛羅野宿。 【理山我國郡名。 胡語謂澗水爲飛羅】 二十七日, 贈于羅山城 野人十一各綿布一匹, 紙二卷, 遂偕行。 僅十餘里, 有地名曰三岐, 其東北有捷徑, 乃指建州衛路也。 其西有溪水, 卽理山飛羅上流也。 沿此溪有小徑, 乃指理山路也。 自三岐, 渡澗水, 凡二十餘處, 經四十餘里, 有嶺曰: 鬱地。 其嶺不高峻, 樹木甚密。 又行十里, 露宿山麓。 于羅山城 野人十餘來告曰: ‘我輩與高麗素無讎怨, 己亥年掩殺我老弱。 每念至此, 心甚痛焉。 願自今上京肅拜, 臣錄其姓名而來。’ 二十八日, 行纔三十里, 風雪驟至, 遂留宿, 乃滿車坪也。 二十九日, 行十餘里, 有平野, 廣可二三里, 長可三十餘里, 而地甚肥厚。 同行野人語臣云: ‘吾輩欲居此地久矣, 畏高麗不敢也。 今旣歸順, 欲於明春移居。’ 又行四五里, 有嶺曰陣高介。 斬大樹, 橫路竪板如盾形, 乃野人 金山赤下設險也。 同行野人語臣云: ‘此乃高麗入征時, 留援軍處也。’ 又行七八里, 有人家八戶, 乃管老等新徙處也。 其人爭持飯肉饋臣等, 莫不有喜色。 又行十五餘里, 有人家四戶, 乃金山赤下黨與也。 皆自門隙窺覘, 無迎接之意。 又行一二里, 到浦州江山赤下等三十餘人或佩橐鞬, 或帶劍, 騎步相間, 一人着甲至江上, 或揮劍, 或彎弓射地, 大叫馳突, 隔江呼同行野人曰: ‘汝輩何爲引高麗使臣至此? 高麗使臣嘗抵汝居, 啗汝賚汝, 不數月興兵斬汝祖先而去。 今汝引而復來, 欲害誰邪?’ 遂阻臣使不得渡, 臣遂留江上。 九月初一日, 山赤下等阻臣如昨, 臣無如之何。 臣兄阿亡哈率麾下十八人, 由山赤下之里, 渡江而來曰: ‘彼輩不足畏, 若終不許渡, 當轉向他處。’ 已而, 山赤下遣人語臣曰: ‘我欲往見, 第未知許否趑趄耳。’ 臣罵曰: ‘濟我阻我, 任汝爲之。 汝居距此江僅一二里, 何必身履汝里然後, 始知汝徑路乎? 汝果欲見我, 可速來也。’ 山赤下等七人渡江來, 再拜而坐。 臣問曰: ‘汝何阻我?’ 山赤下曰: ‘我曾得罪於高麗。 慮三衛通謀害我, 故欲救死耳。’ 臣曰: ‘若欲擊汝, 當擧兵而來, 豈單弱如此乎? 汝曾約刷還七歲兒, 竟負約, 罪一也; 虜邊民, 罪二也; 今又阻我, 罪三也。 汝終不悛, 是汝自伐也。 汝若革心, 當許汝從行。’ 山赤下曰: ‘諾。’ 乃還渡, 聚船十餘, 欲濟臣。 有野人四輩來止之, 復呼噪馳逐, 有野人來告臣曰: ‘我家前灘可涉。’ 臣乃裝載而退。 山赤下等大懼, 其同惡者爭發船來迎。 臣不解駄物, 若不肯渡者, 其人請渡甚勤, 臣乃渡, 行至山赤下家。 山赤下與其父及里中人, 携酒四五壺來饋。 臣語其父曰: ‘汝於我國, 素無讎怨, 何爲作耗於渭原?’ 其父曰: ‘不肖兒輩, 嗛其二事, 敢爲不恭。’ 臣問: ‘二事云何?’ 曰: ‘浪甫乙看於吾七寸親也。 昔會寧人無故誘殺。 且壬寅年, 高麗富寧逃民, 吾戚亦見拘縶。 此二事兒輩嗛之。’ 臣曰: ‘國家殺甫乙看者, 以其伊鋤應哈謀背國家也。 甫乙看之子六人, 而其三子與其父一時被殺, 其三子得脫, 乃謀復讎, 而一子又戰死。 厥後二子及姪, 相繼歸順矣。 汝反爲七寸親, 欲復讎耶? 虛誰羅 野人容隱富寧逃民, 罪固當死。 國家拘執, 旋卽放還, 恩至大矣。 汝何諉之於此乎? 達罕乃汝酋長也。 其先祖皆見殺於國家。 達罕若如汝心, 豈肯歸順?’ 諸野人等語其人曰: ‘今使臣悉知我輩本末, 不宜多言。’ 其人曰: ‘吾過矣。 使臣若果愛我, 我當隨行, 惟命是從。’ 臣又行五里許而宿。 同行野人語臣曰: ‘昔中原使臣來此夜宿吹角, 被虜者聞之脫來, 今使臣亦當吹之。 且此地與火剌溫兀狄哈爲隣, 故多盜竊, 尤宜吹角以備之。’ 臣從其言。 初二日, 行二十里許, 有野人 王夫里哈等居之。 又行三十餘里, 到阿羅可舍其里, 建州衛都督羅下羅吾將率二三騎, 使人吹角來迎曰: ‘我欲備儀物迎命, 今使臣忽至, 未暇如禮。’ 其人甚美, 年纔二十三, 身長可八尺, 氣象俊偉。 襲其父爵, 亞於酋長, 乃臣六寸親也。 臣遂留宿, 與諸野人語及刷還事, 羅吾將在傍聞之曰: ‘吾亦欲刷還人物, 第恐使臣不知我心如玉, 反謂我亦嘗盜竊也。’ 臣曰: ‘吾所目覩, 安有如此? 今雖刷還, 斷無疑汝之理。 汝若果能刷還, 國家知汝效順之意。’ 曰: ‘然則吾麾下曾買高麗人, 當縛致。’ 卽馳遣一人, 臣贈其人紅綿布一匹。 建州衛 野人 趙三波之子八人各携酒一器, 飮臣曰: ‘三衛酋長旣歸順, 我輩亦欲歸順。’ 臣給綿布各一匹、紙各一卷, 此輩世世爲邊患者也。 初三日, 行三十里許, 有野人家十餘, 卽羅吾將所居。 又行二十餘里, 有五十餘家, 卽達罕所居。 未至十里, 達罕甫羅多及左衛酋長土老等率十餘人, 皆携酒來迎。 行五里許, 達罕率麾下三十餘人, 着笠衣綠紗胸背, 令人吹螺來迎, 馬上以銀盃酌酒饋臣, 先導至其家。 臣令達罕設長床, 置書契于其上。 達罕與群下百餘人皆四拜後, 東西列坐, 饋宣醞、頒賜物。 又語事目之意, 達罕等叩頭, 仍饋臣以炙雞、燒酒, 相與酬酢, 或彈琵琶, 或引屎屎音, 【其制與奚琴略同。】 或擊拍板。 達罕醉舞, 語群下曰: ‘作耗雖得金帛, 心常恐怖, 不得伸脚而寢。 豈如今日受恩賜爲可樂乎?’ 旣罷, 達罕又邀臣于寢處, 更設酒殽作樂, 使其妻行酒, 極歡而罷。 溫下衛 野人 朴古里等, 去八月告滿浦曰: ‘建州衛 沈者羅老屯, 有高麗被虜姓人。 我輩欲刷還, 者羅老等不許。 厥後其被虜人乃逃, 者羅老等謂我輩 ‘招誘’ 乃率二百餘騎, 圍我里四日。 我輩不敢抗, 給馬一匹、牛二頭。 願國家諭建州衛, 使不復擾。’ 臣到建州衛, 問其酋長達罕, 答以不知。 者羅老屯所居野人適在坐曰: ‘此事酋長所不知也。 初, 溫下衛高麗人于我屯, 我屯買之。 厥後溫下衛欲還買, 托曰: 「欲還其本國。」 我屯答曰: 「若然則我自刷還, 豈與汝乎?「 遂不許。 已而, 其人逃, 是必溫下人招誘耳。’ 臣曰: ‘溫下衛初雖虜我邊氓, 其後乃欲刷還而汝不許, 汝亦不自刷還, 殊無歸順之意, 然旣往勿咎。 自今毋更擾彼輩。’ 其人曰: ‘敢不敬從?’ 臣問建州衛曰: ‘高沙里相望處, 埋車皮船, 是誰所爲也?’ 曰: ‘此必前年作耗渭原者事也。 自使臣來往之後, 保無此事矣。’ 臣曰: ‘其船乃新造, 非經年舊船也。’ 曰: ‘凡造船覆而埋之, 及發無腐朽之色。 使臣毋恃其如新也。’ 臣兄阿亡哈語臣曰: ‘吾弟此去, 必啓諸種野人歸順, 而他日若有犯邊者, 國家必治吾弟矣。 吾居處雖遠, 當尋捕作耗者也。 且作耗者必乘月渡江, 凡月明時, 邊將伏兵以伺, 若賊渡江, 不須登時捕逐, 乃暗取其船, 流之江中, 使不得渡, 厥明搜捕縛手, 詣其里中, 聲罪斬之, 則同惡者畏怖, 不復犯邊矣。’ 初四日, 達罕等宰牛置酒, 宴慰臣等。 臣語之曰: ‘大人今日受恩賜, 榮幸極矣。 自今毋令麾下作耗。’ 達罕曰: ‘大黨則從此永絶, 其小小竊發者, 難保其必無也。 高麗築城、設門, 嚴法以制之, 其民尙有强盜者。 且如人家役使三箇奴僕, 而失其什物, 尙不知某人偸去, 況今野人散居草野, 安知某人作耗乎? 我輩雖欲探討, 若操弓矢, 竄伏草間, 則我輩亦畏害身, 終不能强探。 自今如有作耗者, 不須起大軍, 只遣裨將, 命我輩搜捕, 則當盡力捕之, 以付官軍, 國家顯戮於蒲州江邊, 使我野人共視, 則雖竊發者, 亦可永絶。’ 臣曰: ‘大人之言是矣, 然亦不可信。 我欲一言, 大人無乃見惡乎? 自今禍福專在大人。 今隨我軍卒頗多, 而其道途險夷, 皆歷知之。 國家若欲擊之, 其勢甚易。 大金乃我遠祖, 其强莫盛, 欲征兀狄哈, 竟不得(言)〔焉〕 。 近年兀狄哈犯東北鄙, 我成宗大王興大軍以征, 焚蕩室廬, 使不得安居。 兀狄哈四散爲奴虜於諸種野人。 大人曾聞否?’ 達罕叩頭。 臣又曰: ‘彼强者尙伐之如此其易, 況此地距我國由險路則可三日程, 由坦道則纔二日程。 大人若效順, 則永世安業, 不然, 子孫無遺育矣。 我言一則恐嚇大人, 一則佑大人者也, 毋忘此言。’ 達罕呼左右曰: ‘汝等體念此言。 此地道路固易於兀狄哈, 若有作耗, 其來伐之誠易矣。 兀狄哈 大金所不能制, 今高麗能破之, 況我輩乎?’ 又曰: ‘高麗若盡識道路, 則作耗者自服矣。 使臣須審知道路而去。’ 初五日, 臣到都督羅吾將家, 距達罕所居可二十餘里矣。 羅吾將率麾下, 携酒迎臣于五里。 及到其居, 宰牛宴臣等。 臣給賜物, 羅吾將拜受甚喜, 臣遂留宿。 初六日, 臣到左衛, 其地距羅吾將家六十餘里。 酋長土老率麾下四十餘人, 着紗帽、衣大紅袞龍團領, 令人吹小角, 出迎五里, 馬上相飮, 先導而行。 到其家, 土老等拜書契, 受賜物。 臣諭之如語達罕, 土老曰: ‘三衛一心也, 更無他語。 後有作耗者, 當於附近處進告。’ 遂設酌, 日夕而罷。 土老妻盛飾, 率婢五七, 辟人來拜。 初七日, 臣留左衛, 語酋長甫下土曰: ‘今日當往大人所居, 以頒賜物。 欲令部落知和親之意。’ 甫下土曰: ‘本衛與火剌溫兀狄哈構釁, 故我今住他處。 雖到其處, 亦非本衛, 願於此處受賜。’ 臣不得已乃贈之。 甫下土以非其所居, 不得設宴, 乃解牛二頭, 付臣行廚。 三衛酋長及群下同辭告臣曰: ‘我輩告變, 只許於滿浦, 故遠人奔告, 不能無稽緩。 願自今許三衛各於近邑告之。 且我輩朝貢, 請依前例。’ 又曰: ‘許渾濫殺無辜, 其妻子莫不痛心。’ 初八日, 臣發還, 甫下土達罕多之哈, 臣兄阿亡哈等率三衛諸種二百餘人護送。 夕宿阿羅可舍, 其里, 野人 家音可等以牛酒饋臣等, 臣贈紙及扇子。 臣又付野人 馬可古大以靑紅綿布等物, 使寄于羅山城裨將靑英哈南大等。 甫下土曰: ‘使臣所問割鼻人, 今在家音可之家。 然今若責出, 彼謂我潛告, 必構怨於我。 使臣到本國, 待家音可之去, 乃責出則不得不從。’ 臣語家音可等曰: ‘爾輩向慕我國, 待我甚厚, 其心可嘉。 他日國家雖少賜物, 汝輩宜親來受之。’ 皆曰: ‘諾。’ 臣錄頭頭人姓名而來。 初九日, 野人 王斜老等十餘, 以其馬牛, 買自作只被虜良女延壽以來。 臣夕宿蒲州江上, 野人 吾老道來告曰: ‘去五月, 山行于(渭源)〔渭原〕 地, 見有三老人下巢鷹。 若如前日, 則當虜來。 以今歸順, 故只奪鷹子。’ 羅吾將所遣野人來語臣曰: ‘欲將被虜人崔孝宗, 詣使臣所在, 孝宗不信, 不肯行。 我將使臣所贈紅綿布示之, 孝宗乃悟卽行。 我意謂, 孝宗旣知向本國, 必不逃, 夜宿不縛。 孝宗慮或轉賣他處, 幸其見解乃逃。 我卽刻木, 分移諸路, 諭山行野人, 使不拘留也。’ 及臣到滿浦, 移文于水下鎭將, 使報孝宗之還。 初十日, 行五里許, 山赤下與其父母, 持牛酒, 饋臣等于路, 仍以前年虜去渭原女子付臣。 臣夕宿鬱地洞口。 十一日, 宿鬱地山麓。 初昏, 溫下衛所居四十餘人皆携酒來慰, 又贈生牛一頭。 十二日, 臣率三衛護送野人二百餘越江。 十三日, 臣與滿浦僉使李胤宗宴護送野人。" 傳曰: "知道。"


  • 【태백산사고본】 8책 2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284 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외교-야(野)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