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에서 강한 내용을 의논하다. 대간들이 사찰 건립의 일과 노사신의 일에 대해 논하다
왕이 경연에 납시어 《강목(綱目)》 광무기(光武紀)를 강하게 했는데 ‘경리(經理)를 논하고 밤이 이슥해서야 잠을 잤다.’란 대문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윤금손(尹金孫)은 아뢰기를,
"광무(光武)가 강론(講論)에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일기도 서늘하오니 청컨대 전하는 날마다 경연에 납시소서."
하였다. 또 ‘내가 이를 스스로 즐기니 피곤하지 않도다.’라는 대문에 이르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묻기를,
"광무의 말이 또한 착하지 않느냐?"
하니, 영사(領事) 정문형(鄭文炯)은 아뢰기를,
"광무는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내지 않고 성정(性情)을 기르며 정체(政體)를 신중히 여기므로, 전열(前烈)을 회복해서 몸소 태평을 이룩한 것입니다."
하고, 참찬 송질(宋軼)은 아뢰기를,
"임금은 부지런해야 할 것이 있으며, 부지런하지 않아도 될 것이 있습니다. 진 시황(秦始皇)의 형석 정서(衡石程書)455) 나 수 문제(隋文帝)의 위사 전찬(衛士傳餐)456) 은 마땅히 부지런히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또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이 서조연(西曹椽)으로 있는 오량(吳良)을 천거하니 제(帝)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천거하여 나라를 돕는 것은 재상의 직책이라’ 하는 대문에 이르자, 송일은 아뢰기를,
"광무의 이 말이 대단히 좋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천거하는 법은 있으나, 그러나 한 재상도 어진이를 천거한 자가 없으니 신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합니다. 선조(先朝) 때에 홍응(洪應)이 일찍이 한 선비를 천거하니 성종께서 즉시 수용해서 당상관(堂上官)의 품계(品階)까지 제수했습니다."
하고, 특진관 박숭질(朴崇質)은 아뢰기를,
"임금이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추천으로 인해서 등용하는데, 요사이는 재상이 천거한 바 있으면 논박이 뒤따르니, 이 때문에 추천이 되지 못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과연 대간의 논박으로 인하여 그 소회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지평 노언방(盧彦邦)은 아뢰기를,
"대간의 직책이 비록 언사(言事)에 있다 하지만, 전조(銓曹)가 만약 어진 자를 천거한다면 어찌 논박하겠습니까. 하지만 채윤공은 문리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성(專城)의 책임을 맡기겠으며, 사신(思愼)은 대신으로서 그 이웃 사람을 비호하기 위하여 대간에게 허물을 돌리는데, 더구나 그 어진 자를 천거하기 바라겠습니까. 신은 못내 마음이 쓰라립니다."
하고, 특진관 이육(李陸)은 아뢰기를,
"그 문자를 이해 못하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신이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윤공이 문경 현감(聞慶縣監)이 되었었는데 그렇게 미욱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이는 녹록한 사람이고, 유순정(柳順汀) 같은 자는 문무(文武)가 겸전하니 참으로 등용할 만합니다."
하고, 숭질은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은 모두가 순정이 나이가 늙으면 국가에서 앞으로 크게 쓰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고, 문형(文炯)은 아뢰기를,
"문종조(文宗朝)에 구치관(具致寬)은 나이 46세에 병조의 낭관(郞官)이 되었습니다. 한 정승이 천거하자 문종께서는 즉시 4품의 직을 제수하셨으니 이로부터 마침내 크게 쓰였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러했는데 지금에 사람을 천거하지 않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말이 두려워서입니다."
하고, 정언 조순(趙舜)은 아뢰기를,
"윤공이 문리(文理)를 해독하지 못하는 데 대해서 사신은 시정하기를 청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따라서 변명까지 해서 임금의 과실을 그대로 굳히게 했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경연(經筵)에 입시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신은 대간으로 하여금 언사(言事)를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윤공이 비록 문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수령이 될 만하므로 나의 고문(顧問)에 답한 것이다."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사신이 임금에게 간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대간을 저지하였으니 어찌 경연에 입시할 수 있습니까."
하고, 전경(典經) 성중엄(成重淹)은 아뢰기를,
"전일에 대간이 사신을 논박하니, 사신이 유자광과 아뢰기를 ‘이 풍습은 빨리 고쳐져야 합니다.’ 했습니다. 자광이야 족히 헤아릴 것도 없지만 사신은 대신으로서 그 말이 이같으니 어떻게 좌우에 두고, 나의 고문에 답한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전일 전교에 이르시기를 ‘선릉(宣陵)에 절을 짓는 것은 새로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전대로 수리하는 것이다.’ 하셨는데, 지금 새 절을 짓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문형(文炯)은 아뢰기를,
"비록 옛 절을 그대로 둔다 해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건원릉(健元陵)의 개경사(開慶寺)도 매우 협소합니다."
하고, 이육은 아뢰기를,
"헌릉(憲陵)에 절을 세우지 않은 것은 태종(太宗)께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절이 있어도 참으로 유익할 것은 없다. 그러나 대비(大妃)께서 사사로이 창설하시는 것이고, 국가에서 세우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윤금손은 아뢰기를,
"만약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면 비록 성종의 유교(遺敎)라 할지라도 따라서는 안 되옵니다. 더구나 성종께서 본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 절을 세우시면 성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어찌 언짢게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비록 대비께서 하시는 것일지라도 전하께서 만약 불가한 점을 말씀드린다면 대비께서 어찌 응종하지 않겠습니까. 또 사신의 아뢴 바에, ‘이 풍습은 빨리 고쳐져야 한다.’는 말은 과연 조정을 경멸해서 기탄한 바가 없는 말입니다. 또 근일에 복선(復膳)457) 에 대한 전례를 상고하라 명하셨는데, 무릇 천변(天變)에 응하는 것은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이 만약 성실하지 못하오면 비록 정전(正殿)을 길이 피한다 해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전례를 상고하고 날 수를 계산해서 구차스럽게 행할 일은 아닙니다."
하고, 조순은 아뢰기를,
"보통 사람이 재궁(齋宮)을 세우는 것은 수호하기 위함입니다만 능침(陵寢)은 이미 수호군(守護軍)이 있는데 무엇하러 절을 세웁니까. 예로써 죽은 이를 섬기는 것이 임금의 효도이고, 예로서 아니하면 효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옛 절이 퇴락할 지경은 아닌데 무엇하러 새로 창설을 하십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 절은 능과 너무 가깝기 때문에 새로 지어서 거리를 멀게 하자는 것이다."
하매, 중엄(仲淹)은 아뢰기를,
"만약 능(陵)에 가까운 것이 싫다면 철거해야 합니다. 어찌 꼭 고쳐 지으려 하십니까. 요사이 전하께서 전일의 실수를 고치셨는데, 다시 과실을 지으시니 그 과하신 처사가 어느 때에 그치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비록 과한 처사라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금손(金孫)은 아뢰기를,
"헌릉(獻陵)에 절을 세우지 않은 것은, 태종께서 불교를 숭상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압니다. 지금 선릉(宣陵)에 절을 세우면 사람들이 장차 성종께서 불교를 필시 좋아하신 모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고, 언방(彦邦)은 아뢰기를,
"전일에 왕께서 하교하시기를 ‘대간이 장시간 대궐 뜰에 있는 것은 불가하다.’ 하셨습니다. 요사이 박형무(朴衡武)·양희지(楊熙止)·신자건(愼自建)의 일을 논하여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장시간 대궐 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기사관 신세련(辛世璉)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되 ‘부인은 전제(專制)하는 의(義)는 없고 삼종(三從)의 도(道)가 있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자주 청하시고 세 번 간하되 듣지 않으시면 부르짖으며 따라다니는 것이 옳습니다. 성종께서 불교를 좋아하지 않은 까닭으로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능에도 사찰을 짓지 않았는데, 지금 성종을 위하여 능 곁에 절을 지어 아침저녁 종을 울리고 북을 치는 것이 이 어찌 성종을 섬기는 효도이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규문(閨門) 안에서 만약 부덕한 일이 있으면 부르짖어 울며 따라다니는 것이 가하다 하지만, 절을 짓는 것이야 무슨 누(累)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이 일은 비단 대비만이 누가 되는 것이 아니오라, 장차 성종의 성덕에도 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성종께서 평소에 불교를 숭상하지 않았던 교서가 역사책에 소상히 나타나 있는데 후인이 누가 불교를 숭상하셨다 하겠느냐?"
하였다. 이육은 아뢰기를,
"만약 불교를 좋아하는 세대라면 저 조그만한 절 하나쯤 짓는 것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오늘날 이 거조가 있기 때문에 대간이 실덕(失德)으로 여겨서 아뢴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그 공력과 비용이 모두 내수사(內需司)에서 나오므로 국가와는 관계가 없다.’ 여기시지만 내수사의 물건도 우리 백성의 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수사는 사사의 비축으로서 전내(殿內)의 비용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만약 사섬시(司贍寺)에서 제용(濟用)할 물건을 쓴다면 불가하다."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공력과 비용은 우선 그만 두더라도 그 의(義)는 어찌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다시 대비께 청하겠노라."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사사전(寺社田)은 청컨대 감사(監司)의 아뢴 바에 의하여 학전(學田)으로 충당해 주옵소서."
하니, 왕은 이르기를,
"학조(學祖)의 밭은 성종조부터 이미 그렇게 된 것이다. 성종께서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이같이 하셨는데, 지금 만약 빼앗는다면 앞으로 중들의 토지는 다 빼앗을 작정이냐?"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학조의 밭은 지금 이미 현저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청한 것입니다. 어찌 중들의 밭이라 해서 다 공전에 속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은 이르기를,
"만약 민전(民田)이나 학전(學田)을 빼앗아 중들에게 준다면 참으로 불가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본래가 승전(僧田)인데 주어도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하매, 조순은 아뢰기를,
"이것은 본시 신미(信眉)의 밭인데 학조에 전해졌으니, 학조가 죽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중에게 전할 것입니다. 또 사신(思愼)이 전일 대간(臺諫)이 구금당함을 보고 기뻐서 치하했는데 지금 또 이와 같으니 이는 나라를 그르치는 사람입니다. 청컨대 법사(法司)에 회부하여 국문한 다음 죄를 주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해서 추론(推論)하느냐?"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심(用心)이 그릇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릇 사람의 말이란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으니, 당연히 그 옳은 것을 취하고 그 그른 것은 버려야 한다."
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그러나 주심(誅心)의 법으로써 따지자면 대신이 국가를 보좌함에 있어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사신이 이미 전하를 그릇되게 인도하였는데, 어찌 대신이라 해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신의 의도는 전하로 하여금 대간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니, 이는 간신(奸臣)입니다."
하니, 왕은 이르기를,
"나로 하여금 간하는 말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서(景敍)가 사신에게 이웃 사람을 비호했다 하니까, 마침내 자기 뜻을 말한 것인데 어찌 간신이라 이르겠느냐."
하였다. 조순은 다시 사전(私田)과 윤공(允恭) 등 여러 가지 일로서 굳이 청하기를 마지 않으니, 왕은 ‘앞에 내린 교서에 이미 다 말하였다.’ 했다. 조순은 강경히 논하고 땅에 엎드려 오래 나가지 않았으나, 왕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5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257 면
- 【분류】농업-전제(田制) / 사법-탄핵(彈劾)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재정-상공(上供)
- [註 455]형석 정서(衡石程書) :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형석(衡石)을 고른다.’ 하였음. 형(衡)은 저울대요, 석(石)은 1백 20근의 무게를 말함인데, 진시황기(秦始皇紀)에 ‘천하의 일이 대소를 막론하고 다 상(上)에게서 결제되므로 상(上)은 심지어 형석(衡石)으로 서류를 담아서 결제한 서류가 그 근수에 해당되지 아니하면 휴식하지 못했다.’ 하였음.
- [註 456]
위사 전찬(衛士傳餐) : 찬(餐)은 소식(小食)인데, 위병(衛兵)이 전달했다는 뜻임.- [註 457]
복선(復膳) : 평상시에 진상하는 수라와 같이 한다는 뜻임. 대개 임금이 천변 지이(天變地異)를 만나면 공구 수성하기 위하여 감선(減膳)하는 전례가 있음.○丙辰/御經筵。 講《綱目》光武紀, 至論經理, 夜分乃寢, 侍讀官尹金孫曰: "光武之勤於講論如是。 今日候淒涼, 願殿下日御經筵。" 又至我自樂此, 不爲疲也, 王顧問左右曰: "光武之言, 不亦善乎?" 領事鄭文炯曰: "光武不敢優游自寧, 頣養性情, 而明愼政體, 故能恢復前烈, 身致太平。" 參贊官宋軼曰: "人主有所當勤, 有所不當勤。 如秦 始皇衡石程書, 隋 文帝衛士傳餐, 此所不當勤也。" 又至'東平王 蒼薦西曹椽吳良, 帝曰: "薦賢助國, 宰相之職也。" '軼曰: "光武此言善矣。 我國亦有薦擧之法, 然無一宰相薦賢者, 臣未知其由。 先朝洪應嘗薦一士, 成宗卽收用, 至授堂上階。" 特進官朴崇質曰: "人主不能知之, 必因薦擧而用之。 近者宰相偶有所薦, 論駁隨之。 以此不得耳。" 王曰: "果因臺駁, 不得達其所懷。" 持平盧彦邦曰: "臺諫雖職在言事, 銓曹若薦賢者, 則豈得論之乎? 如蔡允恭不解文理, 何可委以專城之任? 思愼以大臣, 欲庇其隣, 反咎臺諫, 況望其薦賢乎? 臣不勝痛心。" 特進官李陸曰: "其不解文, 則臣不得知。 臣爲慶尙監司時, 允恭爲聞慶縣監。 不甚迷劣, 然此乃碌碌人也。 如柳順汀, 文武全才, 眞可用也。" 崇質曰: "朝議咸恐順汀年老, 則國家將不及大用。" 文炯曰: "文宗朝具致寬年四十六, 猶爲兵曹郞官。 有一政丞薦之, 文宗卽授四品職, 從此遂大用。 古則如是, 今無薦人者, 乃畏人言耳。" 正言趙舜曰: "允恭不解文理, 思愼非徒不請改, 又從而爲之辭, 遂君過擧。 請今後勿令入侍經筵。" 王曰: "思愼非欲使臺諫不得言事, 允恭雖不解文, 猶可爲守令, 故因予顧問言之耳。" 舜曰: "思愼不導君納諫, 而反沮臺諫, 豈可入侍經筵乎?" 典經成仲淹曰: "前日臺諫論思愼, 思愼與子光啓曰: "此風宜亟正之。’ 子光不足數, 思愼以大臣, 其言如此, 何用置之左右, 以備顧問乎? 且前日敎云: ‘宣陵創寺, 非新創, 只仍舊修之。’ 今創新寺何也?" 文炯曰: "雖仍舊寺, 非不足也。 健元陵 開慶寺亦甚小。" 陸曰: "獻陵不建寺者, 以太宗不好佛也。" 王曰: "雖有寺, 固無益矣。 然大妃私創, 非國家所建也。" 金孫曰: "如非當理, 雖成宗遺敎不可從, 況成宗素不好佛, 今爲之建寺, 成宗在天之靈, 寧不憾乎? 雖大妃所爲, 殿下若陳其不可, 則大妃其不從乎?, 且思愼所啓此風宜亟正之之言, 果蔑朝廷, 而無所忌憚也。 又近日, 命考復膳前例。 凡應天變, 必以誠心。 心若不誠, 則雖長避正殿, 有何益乎? 固非考前例, 計日數苟爲之事也。" 舜曰: "常人之所以建齋宮者, 爲守護也。 陵寢旣有守護軍, 何用建寺? 以禮事亡, 人君之孝, 不以禮則非孝也。 且舊寺不至頹圮, 何用新創?" 王曰: "舊寺近陵, 故欲新而遠之耳。" 重淹曰: "若惡其近陵, 所當撤去, 何必改創? 近日殿下纔改前失, 復有後過, 過擧何時而止也?" 王曰: "雖曰過擧, 非吾所爲。" 金孫曰: "獻陵不建寺, 人皆知太宗之不崇佛。 今於宣陵建寺, 人將謂成宗必好佛。" 彦邦曰: "前日王敎以臺諫長在闕庭爲不可。 近日論朴衡武、楊熙止、愼自建事, 未蒙兪允, 此所以長在闕庭也。" 記事官辛世璉曰: "古人云: ‘婦人無專制之義, 有三從之道。’ 殿下宜亟請至於三諫而不聽, 號泣而隨之可也。 成宗不好佛, 故恭惠王后之陵, 不作寺社。 今爲成宗, 作寺陵側, 朝夕撞鍾擊鼓, 此豈事成宗之孝乎?" 王曰: "閨門之內, 若有不德, 則號泣而隨之可也。 創寺有何累也?" 舜曰: "此非徒累大妃, 將累成宗之德。" 王曰: "成宗平日不崇佛之敎, 昭著史冊。 後人誰以爲崇佛乎?" 陸曰: "若好佛之世, 則創彼小寺, 人不爲異。 今有是擧, 故臺諫以爲失德而啓之。 且殿下以爲: ‘其功費, 皆出於內需司, 非關國家。’ 內需司之物, 無非出於我民之力矣。" 王曰: "內需司私蓄, 而以供內用。 若用司贍、濟用之物不可矣。" 舜曰: "功費則姑置勿論, 於義何?" 王曰: "當更請于大妃。" 舜曰: "寺社田請依監司所啓, 充給學田。" 王曰: "學祖之田, 自成宗朝已然。 成宗不好佛, 而尙如此。 今若奪之, 則亦將盡奪僧人田乎?" 舜曰: "學祖之田, 今已現露, 故請之。 凡僧人之田, 盡可屬公。" 王曰: "若奪民田、學田給僧人, 則固不可矣。 此本僧田, 與之何害?" 舜曰: "此本信眉之田, 而傳于學祖。 學祖雖死, 後必傳之於僧耳。 且思愼前見臺諫被囚而喜賀, 今又如是, 此誤國之人也。 請下法司, 鞫而罪之。" 王曰: "旣往之事何可追論?" 舜曰: "非欲追論, 乃言其用心之誤也。" 王曰:"凡人之言, 有是有非, 當取其是, 而捨其非。" 舜曰: "上敎允當。 然以誅心之法論之, 大臣輔國不當如是。 思愼旣誤殿下, 何可以大臣, 而容恕乎? 思愼之意, 正欲殿下不聽臺諫之言, 此奸臣也。" 王曰: "非欲使予不聽諫言, 景叙謂: ‘思愼庇護隣近。’ 故乃言其志耳, 何可謂之奸臣?" 舜更以私田、允恭等數事, 固請不已, 王曰: "前敎已悉。" 舜强論伏地, 久而不出, 王竟不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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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