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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25권, 연산 3년 7월 7일 병오 1번째기사 1497년 명 홍치(弘治) 10년

집의 강경서 등이 신자건 등의 일과 야인들에게 동청례를 파견하는 일 등에 대해 논의하다

왕이 경연에 납시었다. 《강목(綱目)》에서 광무기(光武紀)를 강하는데, 특진관(特進官)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광무(光武)는 옛사람이 일컫기를 ‘그 밝음이 능히 만 리 밖을 내다본다.’ 하였는데, 양송(梁松)의 참소를 듣고 드디어 마원(馬援)을 멀리하여, 신식후(新息侯)의 인(印)을 추탈(追奪)하였습니다. 이는 소인의 감언 이설이 그르친 것입니다. 고금의 제왕이 남의 말을 들을 때는, 반드시 자세히 살펴야 능히 그 시비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서책을 보는데도 반드시 제왕이 행사한 자취를 더듬어서, 그 치란(治亂)과 득실의 연유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집의(執義) 강경서(姜景敍)는 아뢰기를,

"이조(吏曹)의 관리는, 비록 신 등이 아뢰지 않더라도 의당 국문해야 합니다. 홍문관(弘文館)은 대간(臺諫)과 같은데, 어찌 단 한 사람만을 의망(擬望)합니까. 대저 임금은 인후(仁厚)가 남발되고 결단성이 부족하면 아니되오니, 청컨대 쾌히 결단을 하옵소서."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신자건(愼自健)·한훈(韓訓)·양희지(楊熙止)·안처량(安處良)의 일을 아뢰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유자광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매우 옳습니다. 대간이 아니라면 왕이 어떻게 이 말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재상은 비록 아뢰고 싶지만, 그 직무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못하는 것입니다. 대간이 처량(處良)을 사물에 어둡다 하니, 만약 그렇다면 어찌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간이 과연 다 어질다면 말한 바가 공정할 것이지만, 간혹 어질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간의 말만을 듣고서 경솔히 한 방면의 소임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처량은 일찍이 도승지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바 있으니, 어찌 어두운 사람에게 이와 같은 직을 제수하였겠습니까. 마땅히 좌우에게 수의하시여 모두 다 불가하다고 한 연후 결단하옵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대신에게 수의하였는데, 모두 갑자기 체임(遞任)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유시를 내려 스스로 면려(勉勵)하게 해야 하므로 갈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강경서는 또 아뢰기를,

"동청례(童淸禮)가 연전에 이미 갔다 왔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다시 보내는 것입니까. 예로부터 이적(夷狄)과 상통하면 끝에 가서는 반드시 걱정이 생기는 법입니다."

하니, 왕이 좌우에게 물었다. 특진관(特進官)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연전에 동청례가 갔을 적에, 야인(野人) 수백 명이 와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사자를 보내 왔으니 이제는 다시 살았다.’고 하므로 청례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마땅히 적을 포박해와야 한다.’ 하니 그자들의 말이 ‘우리들이 명색은 비록 추장이라 하지만 실로 통속(統屬)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포박해 오겠는가. 다만 사신이 갈 적에 적인(賊人)의 집을 가르쳐 주겠다.’ 하고 드디어 나와서 명령을 환영하고 적인의 집을 참으로 가리켜 주면서, 또 말하기를 ‘명년에 만약 다시 오게 되면 당연히 평탄한 길로 인도하리니,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했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서 매양 토벌을 할 적에는 도로를 알지 못하여 마치 눈먼 뱀이 갈대밭에 달아나는 것과 같으니, 만약 도로를 잘 안다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또 국가가 대마도(對馬島)에 대하여는, 많은 포목과 곡물을 수송하여 호의를 통하면서, 서방의 야인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니, 지금 그자들의 청에 의하여 사신을 보내시면, 서방 방수(防守)의 노고는 생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동청례를 보내겠다고 의사를 표시하고서 도로 중지한다면, 그들의 배반은 전과 같을 것입니다."

하니, 자광(子光)이 아뢰기를,

"증여(贈與)하는 물품이 너무도 적습니다. 비록 친구에게 서로 기증하는 물품이라도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하고, 극균(克均)은 아뢰기를,

"대마도에는 심지어 공인(工人)까지 보냈는데, 지금은 조정의 의론이 서로 어긋나므로 넉넉하게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해년 정토(征討)할 적에, 신은 처음에 적의 소굴이 매우 가깝다고 듣고 행군하여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신은 홀로 몇 명의 기병과 더불어 강변으로 내려와 길을 얻은 다음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습니다. 신의 뜻은, 그들의 부락과 도로의 원근을 알고자 하는 것은 후일에 용병(用兵)할 계획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의 청에 의하여 보내는 것이니, 욕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경서(景敍)는 아뢰기를,

"일시 동인(一視同仁)하는 것이 왕자의 정사요, 도로를 알아서 공격하려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 옛부터 제왕은 오랑캐를 일로 삼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의 종류가 매우 많은데, 어찌 사람마다 물건을 줄 수 있습니까. 오는 자는 후대하며 가는 자는 쫓지 말고, 스스로 나의 변방[邊鄙]만을 굳건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극균이 아뢰기를,

"경서(景敍)는 한갓 문학만을 일삼아 변방의 사정을 알지 못하기에, 그 말이 이같습니다. 스스로 변방을 굳건히 하고 오랑캐를 일삼지 않는다는 것은, 경상(經常)의 말입니다. 그러나 나랏일을 하자면 진실로 권의(權宜)의 행동도 해야 하는 것이옵니다. 신이 지난날 변방에 있을 적에, 군사 한두 사람으로 농민 백여 명을 수호했습니다. 어찌 한두 사람으로써 백여 명의 군중을 수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정은 중국의 예와 달라서 군사가 매우 적은데, 어떻게 변방을 튼튼히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경서의 말과 같다면, 간우(干羽)로 양계(兩階)에서 춤을 추고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하는 일을 지금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경서는 아뢰기를,

"논계(論啓)한 여러 가지 일이 하나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사오니, 신 등은 직책이 언책(言責)에 있으니만치 마음이 실로 통분하고 민망하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뢴 여러 가지 일을 모두 들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청례(淸禮)를 보내는 일은, 변방의 일을 맡은 재상이 어찌 익히 생각하지 않고서 말했겠는가."

하였다. 자광이 아뢰기를,

"변방 일에 대하여는 마땅히 장신(將臣)의 말을 좇아야 하옵니다."

하매, 경서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개주(介胄)408) 한 장수는, 정벌(征伐)을 중하게 여기고, 진신(搢紳)의 선비는 화친을 고수하여 각기 소견을 고집하옵니다. 지금 만약 청례를 보내고자 하시면 아무쪼록 다시 수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옵소서. 또 자건(自建)의 일은 더욱 쾌히 좇아야 하오며, 이조의 관리들도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247 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註 408]
    개주(介胄) : 무장을 말함.

○丙午/御經筵, 講《綱目》 《光武紀》, 特進官柳子光曰: "光武稱明見萬里之外, 而聽梁松譖, 遂疎馬援, 追奪新息侯印, 此小人甘言以誤之也。 古今帝王當聽言之時, 必審察然後, 能辨其是非矣。 至於觀書, 必尋繹帝王行事之跡, 思其治亂得失之所由。" 執義姜景叙曰: "吏曹官吏雖非臣等之啓, 固當命鞫。 弘文館與臺諫同, 豈可單擬乎? 大抵人主仁厚有餘, 剛斷不足則不可, 請夬斷。" 不聽。 更啓愼自建韓訓楊熙止安處良事, 不答。 子光曰: "臺諫之言甚是。 非臺諫則王何以得聞此言乎? 宰相雖欲啓之, 非其職事, 故未敢耳。 臺諫以處良爲茫昧。 若然, 則何可用也? 然臺諫果皆賢也, 則所言公矣。 間或有不賢之人, 則豈可一聽臺諫之言, 輕遞方面之任乎? 況處良曾經都承旨與副提學。 豈應茫昧之人, 授如此之職乎? 宜收議于左右, 皆曰不可, 然後斷之。" 王曰: "已議于大臣, 皆曰: ‘不可遽遞, 當下諭, 使自勉勵。’ 故不遞耳。" 景叙又啓: "童淸禮前年旣往還, 今何用更遣? 自古交通夷狄, 終必有患。" 王問左右, 特進官李克均曰: "前年淸禮之往, 野人數百來云: ‘國家遣使, 今復蘇矣。’ 淸禮語之曰: ‘汝宜縛賊來。’ 彼曰: ‘我等名雖酋長, 實無統屬, 何能縛致? 但於使臣之往, 當指賊人家。’ 遂出來迎命, 果指賊人家。 且云: ‘明年若更來, 則當導以坦道。 然後可知我等情狀。’ 臣意以爲, 國家每當加討, 未諳道路, 如肓蛇走蘆田。 若備諳道路, 則何有如此乎? 且國家於對馬島, 多輸布穀以通好, 西方野人則不然。 今因彼人之請, 遣使則西方防戍之勞可省矣。 且已諭遣淸禮之意, 而還止則彼人之叛, 將如前矣。" 子光曰: "贈與之物甚少, 雖朋友間相贈, 豈宜如是?" 克均曰: "對馬島則至遣工人, 今者朝議牴牾, 故不得從優耳。 然丁亥年征討時, 臣初聞賊巢甚近, 及行軍, 登山失路, 臣獨與數騎, 下江邊得路然後, 率軍出來。 臣意, 欲知彼部落道路遠近者, 將爲後日用兵之計耳。 且今因彼之請而遣之, 未爲辱也。" 景叙曰: "一視同仁, 王者之政。 欲知道路而擊之, 不仁也。 自古帝王不事於外夷。 且彼類甚多, 豈可人人而贈物乎? 莫若來者厚待, 去者不追, 自固我邊鄙而已也。" 克均曰: "景叙徒事文學, 未諳邊鄙, 故其言如此。 自固邊鄙, 而不事於外, 乃經常之言, 然爲國固當爲權宜之擧。 臣曩在邊圉, 軍士一二人護守農民百餘, 豈可以一二人能護百餘之衆乎? 我朝非中國例, 軍士甚少, 何以固邊鄙乎? 若如景叙之言, 則舞干羽于兩階, 修文德以來之, 今可行之乎?" 景叙曰: "論啓累事, 一不蒙允。 臣等職在言責, 心實痛悶。" 王曰: "所啓數事, 皆不可聽。 遣淸禮事, 知邊事宰相豈不熟計而言之?" 子光曰: "邊事宜從將臣之言。" 景叙曰: "自古介冑之士, 重征伐; 縉紳之士, 守和(觀)〔親〕 , 各執所見。 今若欲遣淸禮, 須更收議施行。 且自建事尤宜快從, 吏曹官吏亦不可不鞫。"


  • 【태백산사고본】 7책 2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247 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