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곤이 불교를 숭봉하는 일, 신계원의 제수 등에 대해 아뢰다
대사헌 구치곤(丘致崑) 등이 아뢰기를,
"전 해에 대간들이 소상재(小祥齋)를 마련함이 온당치 못함을 들어 논란한 지 여러 달에 이르렀지만 윤허를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대상재(大祥齋)를 마련하니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전의 하교에 이르시기를, ‘공씨(孔氏)의 도를 일으키고, 석씨(釋氏)의 교를 줄어들게 한다.’ 하였으며, 도첩(度牒)510) 이 없는 중을 환속시키지 못하는 수령(守令)을 파면하였으니, 이 때문에 중외에서는 전하께서 불교를 숭상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우리 태종 대왕은 사사(寺社)의 농장과 노비를 혁파하였으니, 그 성덕(聖德)이 지극합니다. 세종께서도 초년에는 태종이 남긴 뜻을 이어받아 절대로〈불교를〉 숭봉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가서 내불당(內佛堂)을 문소전(文昭殿) 북쪽에 창건하매 온 조정이 논란하여 간하였습니다. 그때 성균관의 유생들은 이르기를, ‘이단(異端)이 바야흐로 일어나려 하니 우리 도가 쇠해질 것입니다. 헛되이 구속되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세종께서는 처음에는 숭봉하지 않다가도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처음에 어찌 이러하실 것입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마침을 조심하기를 시초에서 한다.’고 하였으니, 시초에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신계원(愼繼源)은 전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을 제수받아 부임한 지 오래되었지만 어미가 늙었다 하였으므로 참작해서 경기도 죽산(竹山)으로 옮겨 주었는데 이계동(李季仝)이 경기 감사가 되자 상피(相避)하는 관계로 〈신계원을〉 진천(鎭川)으로 바꾸었으나 그때 어미 나이 이미 73세였지만 아무 말없이 부임[就職]하였습니다. 〈신계원이〉 지금은 김포 현령(金浦懸令)으로 있는데, 품관(品官) 중 한환(韓懽) 같은 자가 작폐(作幣)하는 것을 싫어하고 꺼리며, 읍이 또 쇠잔하기 심하므로, 어미를 시켜 말씀을 올려서 국가를 기만하니 매우 불가합니다. 임지로 돌아가게 하소서. 선릉 참봉(宣陵參奉)을 모두 참직(參職)511) 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선왕조에서 신구 광릉(光陵)·창릉(昌陵)·순릉(順陵) 참봉을 모두 직장(直長)에 제수하였으니 지금도 이 준례에 의거함이 가할까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가 독서(賜暇讀書)하는 일 및 시학(視學) 등의 일은 일체 거행하겠으나, 그 나머지는 모두 들어 주지 않겠다."
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20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174 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 사상-불교(佛敎) / 인사-관리(管理)
○乙未/大司憲丘致崐等啓: "前年臺諫論設小祥齋未便, 至累朔不得蒙允, 今又設大祥齋, 不勝缺望。 前敎云: ‘興孔氏之道, 衰釋氏之敎。’ 又罷守令之不能刷無度牒僧人者。 以此, 中外洞知殿下不崇佛敎也。 我太宗大王革寺社臧獲, 其聖德至矣。 世宗初年, 繼太宗遺意, 絶不崇奉。 至其晩年, 創內佛堂于文昭殿北, 擧朝論諫。 其時成均館儒生等云: ‘異端方興, 吾道將衰, 不可虛拘。’ 遂空館而去。 夫世宗始不崇奉, 而終至於此。 今殿下卽位之初, 豈宜如是? 古人云: ‘愼終于始。’ 請謹其始。 愼繼源前授昌寧縣監, 赴任已久, 以母老量移京畿 竹山。 及李季仝爲京畿監司, 以相避換鎭川, 其時母年已七十三, 然猶無辭就職。 今爲金浦縣令, 厭憚其品官如韓懽者作弊, 而邑又殘甚, 敎母上言, 以欺國家, 甚不可也, 請令還任。 宣陵參奉皆陞參職, 先王朝新舊光陵、昌陵、順陵參奉, 皆授直長, 今依此例, 爲可。" 傳曰: "如賜暇讀書及視學等事, 一切擧行, 餘皆不聽。"
- 【태백산사고본】 5책 20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174 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 사상-불교(佛敎)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