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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18권, 연산 2년 9월 14일 정사 3번째기사 1496년 명 홍치(弘治) 9년

홍문관 부제학 김수동 등이 무편 무당한 정치를 할 것 등에 대해 상소하다

홍문관 부제학 김수동(金壽童)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보건대, 기자(箕子)345)무왕(武王)에게 고하는 말에 이르기를, ‘치우침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이[無偏無陂] 하여 왕의 의(義)를 따르며, 〈사사로이〉 좋아하는 일을 지음이 없이 하여 왕의 도를 따르며, 미워하는 일을 지음이 없이 하여 왕의 길을 따르소서. 무편(無偏)하고 무당(無黨)하면 왕도(王道)가 탕탕(蕩蕩)하고, 무당하고 무편하면 왕도가 편편[平平]하고, 무반 무측(無反無側)하면 왕도가 정직(正直)하리니, 〈그러면〉 그 극(極)에 모여서 그 극에 돌아갈 것입니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이의 말이, ‘편피 호오(偏陂好惡)는 자기의 사사로움이 마음에서 나는 것이요, 편당 반측(偏黨反側)은 자기의 사사로움이 일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옛부터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이 그 누가 공평·광대한 도를 따르려 하지 않으리오마는 언제나 하지 못함을 근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개 사(私)에 가리우고 제 마음대로 하는 것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심이 한 번 싹트면 시비에 어두워져서 모든 일에 편당·반측하지 않음이 없어 끝내는 구원할 수 없게까지 되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전하를 뵈옵건대, 빛나게 선왕을 계승하여 정력을 다해서 치성을 도모하여 바야흐로 위에 건극(建極)하였으니, 신민(臣民)이 극에 모여 극으로 돌아갈 기회입니다. 그런데도 정사에 임하신 지 두 돌에, 아직도 탕평·정직의 정치가 있음을 듣지 못하고 편당·반측의 일을 많이 보게 되니, 심히 전하에게서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출모(出母)를 끊어야 한다는 것은 선왕의 큰 예법이 있고 선왕의 엄한 가르침이 있어서 결탄코 어길 수 없는 것인데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시어 지나치게 비례(非禮)를 행하며, 조역(兆域)346) 의 수호가 참람하게도 능침(陵寢) 같이 하니, 이것은 전하의 정이 사(私)에 가린 것이요, 왕도의 탕탕(蕩蕩)함이 아닙니다. 작명(爵命)은 임금의 큰 권력[大柄]으로 참람히 할 수 없는 것인데도, 공신이라는 연고만으로 혹 탐탁·천용(貪濁賤庸)한 사람에게 함부로 베풀며, 혹은 당파를 지어 정사를 어지럽히는 사람에게 그릇 미치니, 이것은 전하의 은혜가 사(私)에 가린 것이요, 왕도의 편편한 것이 아닙니다. 아아! 성종(成宗)께서 이미 정한 제의(祭儀)를 전하께서 고치며 성종께서 이미 물리친 소인을 전하께서 영화롭게 하여, 일체를 성종의 뜻을 반대하려 하시니, 전하의 마음이 편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일의 시초가 과오에서 나왔더라도 뉘우치고 고치면 이것이 대단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간함을 좇는 도량이 넓지 못하고 허물을 고치는 마음이 꺼리는 바가 있으니, 어찌 전하의 학문·성정(誠正)의 공이 미진하여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종 대왕은 성인(聖人)의 천성으로 생이지지(生而知之)하셨지만, 오히려 배우는 데에 뜻을 겸손히 하여 날마다 경연에 납시고, 낮에 찾아 묻는 것이 부족하여 밤에까지 계속하시며, 한추위나 한더위라도 일찍이 그만둔 일이 없이, 옛날 제왕(帝王)들의 치란(治亂)의 사실과 지금의 정사의 득실(得失)의 연유를 강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사람은 모든 말을 하였고, 말하는 것을 들어 주지 않음이 없어서, 상하간에 막힘이 없고 정의가 서로 맞아서 26년 간의 태평을 이룬 것은 전하께서도 친히 보신 일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옥체가 미령하시어 오래도록 경연을 폐지하시었으며, 여러번 개강(開講)을 명하시었지만 조회에 임하여서는 곧 정지하니, 공경(公卿)과 백료(百僚)가 나와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현사(賢士)를 접하는 날은 적고 환시(宦寺)를 친근하는 시간이 많으니, 성학(聖學)은 빛나는 덕에 어긋나고 시정(時政)은 여러 사람에게 묻는 일이 없어 공론(公論)이 펴지지 못하고 사특한 의논이 행하게 되었는데, 한 벼리[綱]가 어지러워지면 1만 코[目]가 다 떨어지는 것이니, 심히 조정의 복이 못 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성종으로 법을 삼아서 그 뜻을 이어 일을 계속하는 큰 효도를 두터이 하지 않으십니까. 바라옵건대 황극(皇極)의 정직을 따르시고 사정의 편피(偏陂)를 끊으시며, 널리 공론에 좇아 여망(輿望)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142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註 345]
    기자(箕子) : 중국 주(周)나라의 현신.
  • [註 346]
    조역(兆域) : 무덤이 있는 지역.

○弘文館副提學金壽童等上疏曰:

臣等竊觀, 箕子武王之言曰: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 釋之者曰: "偏陂、好惡, 己私之生於心者也; 偏黨、反側, 己私之見於事者也。" 自古願治之主, 孰不欲遵公平廣大之道, 而常患於不能者何哉? 蓋由蔽私, 而自用也。 私心一萌, 眩於是非, 凡事之偏黨反側者, 無不爲己, 終至於不可救, 豈不懼哉? 伏覩, 殿下光紹前烈, 勵精圖治, 方建極于上, 臣民會極歸極之機也, 而臨政再期, 未聞有蕩平正直之政, 多見其偏黨反側之事, 甚非所望於殿下者也。 如出母當絶, 有先王之大禮, 有先王之嚴敎, 斷不可違越, 而建廟立主, 過用非禮, 兆域守護, 僭擬陵寢, 是則殿下之情蔽於私, 而非王道之蕩蕩也。 爵命人主之大柄, 不可僭也, 而徒以功臣之故, 或濫施於貪濁、賤庸之人, 或誤及於植黨亂政之人, 是則殿下之恩, 蔽於私而非王道之平平也。 嗚呼! 成宗已定之祭儀, 殿下改之; 成宗已斥之小人, 殿下榮之, 一切取成宗之志而反之, 未審殿下之心以爲安乎? 夫事之始也, 雖出於過誤, 悔而改之, 斯爲盛美。 今殿下從諫之量有未弘, 改過之心有所憚, 豈非殿下學問誠正之功, 有所未盡也? 我成宗大王聖性生知, 猶遜志于學, 日治經筵, 晝訪不足, 繼之以夜, 雖隆寒盛暑, 未嘗或輟, 古昔帝王治亂之迹, 當今政事得失之由, 靡不講求。 人無不言, 言無不聽, 上下無壅, 情志交孚, 以致二十六年之太平, 亦殿下之所親見也。 殿下卽位以來, 玉體違豫, 久廢經筵, 屢命開講, 臨朝輒停, 公卿百僚無由進見, 接賢士之日少, 親宦寺之時多, 聖學乖於緝熙, 時政闕於延訪, 公論不伸, 邪議得行, 一綱之紊, 萬目皆墜, 甚非朝廷之福也。 殿下何不以成宗爲法, 而敦繼志述事之大孝乎? 伏望遵皇極之正直, 絶私情之偏陂, 夬從公論, 以副輿望。


  • 【태백산사고본】 5책 1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142 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