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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12권, 연산 2년 1월 1일 경진 2번째기사 1496년 명 홍치(弘治) 9년

승정원에 내수사의 단자를 내리다

승정원(承政院)에 내수사(內需司)의 단자(單子)를 내리고 전교하기를,

"유점사(楡岾寺)낙산사(洛山寺)에 소금을 공급하라는 분부에 선왕의 수결이 있으니, 이제 와서 폐기할 수 없다. 비록 《속록(續錄)》001) 에는 실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그때에 이 조항을 다시 계품(啓稟)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니, 예전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니, 승지(承旨)들이 다시 아뢰기를,

"이 일이 《속록(續錄)》에 실리지 않았는데, 지금 만약 공급한다면 뒤에 반드시 예가 될 것이며, 또 소금은 백성의 힘에 의해 나오는 것이므로 그릇되게 써서는 안 되옵니다. 내수사로서는 만약 노비(奴婢)나 곡식에 관한 일이라면 직계(直啓)할 수 있으나, 지금 승려(僧侶)의 장고(狀告)만을 듣고서 승정원(承政院)에 통지하지도 않았으니, 사체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정진 등의 일은 대간이 여러 달을 두고 논계하고 정부(政府)도 여러 번 아뢰었사온데, 오히려 ‘애매하다.’고 분부하시니, 신들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신들의 정상을 잘 모르시는 것 같사옵니다. 당초에 그들이 탄핵받을 적에 스스로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죄를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터무니 없는 말을 꾸며 내어 의옥(疑獄)이 되게 한 것이온데, 그 술책은 3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윤채(尹埰)의 사위 이계금(李繼金)이 그 친구 이귀종(李貴宗)에게서 들었다는 말이 ‘중흥동(重興洞)에서 잔치놀이를 한 자는 너희 장인이 아니고, 실로 다른 사람이 한 일이다.…’하더라는 것이요, 하나는, 윤채의 아들 동손(仝孫)삼계 부정(森溪副正)에게서 들었다는 말이 ‘석보수(石保守)가 내게 하는 말이 실로 무풍정(茂豊正) 허함(許瑊)·정자지(鄭子芝) 등이 기생을 데리고 잔치놀이를 했다.…’하더라는 것이요, 하나는, 윤채의 종 정동(鄭同)이 기녀(妓女) 영감당(詠甘棠)에게 들었다는 말이 ‘전일에 적선아(謫仙兒)가 그 지아비 무풍정과 잔치놀이를 했다.…’하더라는 것입니다. 금부에서 이 3가지 일을 가지고 사실을 추궁하니, 이 계금은 거짓으로 정상을 말해 놓고서 곧 언문 편지를 이귀종(李貴宗)에게 통하여 그 말을 맞추려다가 그 일이 또 탄로되자, 계금이 자복하기를, ‘이귀중은 나의 친한 벗이니, 반드시 내 말을 들을 것이므로 처부(妻父)의 죄를 면해 주려 짐짓 거짓말을 꾸몄다.’하였으며, 그 밖에 석보수(石保守)·영감당(詠甘棠)의 말도 모두 근거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옥경(玉京)의 진술에 ‘처음에 윤채를 따라서 상지관(相地官) 조윤(趙倫)과 함께 윤채양주(楊州) 농장에 갔었는데, 조윤은 먼저 서울로 돌아가고, 나는 윤채삼계 부정(森溪副正) 등과 함께 중흥동(中興洞)에서 놀았다.’하니, 조윤의 진술이 과연 옥경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윤채 역시 자복하기를, ‘서울로 돌아올 때에 삼계 부정의 집에 이르러, 옥경을 시켜 해금(嵇琴)을 타게 하고 소찬(素饌)으로 술을 마셨을 뿐이다.’하였습니다. 옥경이 또 진술하기를, ‘그 뒤에 또 윤채를 따라서 두 번째 삼계 부정의 집에 갔었는데, 윤채삼계 부정에게 하는 말이 전일에 중흥동에서 잔치놀이 한 일을 내 아버지가 듣고서 크게 나무랐다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일의 정상이 분명하오며, 옥경의 말이 형장(刑杖)에 인한 것이 아니고 평문(平問)에서 나왔으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사옵니다. 만약 윤채 등이 실지로 범하지 아니하였다면, 비록 죽게 되더라도 다만 스스로 해명을 요할 따름이옵지, 어찌 반드시 다른 사람을 무고하여 끌어들이겠습니까. 윤채 등은 본디 간사하여 성종조(成宗朝)에 중죄를 받았으니, 이런 일을 그가 하지 않았다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실로 크게 명교(名敎)에 관계되오니, 불가불 국문을 끝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60 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재정-상공(上供) / 수산업-염업(鹽業)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註 001]
    《속록(續錄)》 : 《대전속록(大典續錄)》의 약칭. 성종 23년(1492)에 이극증(李克增) 등이 왕명에 의하여 편찬한 것인데,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의 새 법령 중에서 항구성이 있는 것을 가려 《경국대전》을 본떠서 만들었다.

○下內需司單子于承政院, 仍傳曰: "楡岾洛山給鹽之敎, 有先王親押, 今不廢也。 雖云《續錄》不載, 必其時以此條不更啓稟而不錄, 其令依舊施行。" 承旨等更啓: "(比)〔此〕 事不載《續錄》, 今若給之, 則後必爲例。 且鹽亦出於民力, 不宜枉費也。 內需司若奴婢及穀食等事, 則可直啓, 今取僧人狀告, 不關白政院, 奈事體何?" 又啓: "鄭溱等事, 臺諫累月論啓, 政府亦累啓之, 而猶敎曰: ‘曖昧。’ 臣等恐上於臣等情狀, 有所未悉也。 當初被劾, 自知不免, 謀欲脫罪, 搆成無實之言, 使爲疑獄者, 其術有三。 一則尹埰之壻李繼金聞於其友李貴宗曰: ‘重興洞遊宴者, 非汝婦翁也, 實他人所爲。’ 云云。 一則曰: ‘之子仝孫聞於森溪副正, 曰: 「石保守語予曰, 實茂豐許瑊鄭子芝等, 携妓遊宴。」’ 云云。 一則曰: ‘之奴鄭同, 聞於女妓詠甘棠曰: 「前日謫仙兒與其夫茂豐正遊宴。」 云。’ 禁府以此三事究實, 則繼金詐現, 乃通諺簡于貴宗, 欲實其言, 而其事又露, 繼金自服曰: ‘貴宗吾親友, 必聽吾言。 故欲脫妻父罪, 詐飾虛言。’ 云。 其餘石保守、詠甘棠之言, 亦皆出於無根。 且 玉京供云: ‘初從尹埰, 與相地官趙倫, 往 楊州農莊, 則先還京, 我與森溪副正等遊於中興洞。’ 所供, 果同玉京之言, 故亦自服曰: ‘還京時’ 到森溪副正家, 令玉京調嵇琴, 素饌飮酒而已。’ 玉京又供云 ‘其後’ 又從尹埰, 再到森溪家, 森溪曰: ‘前日重興洞遊宴事, 父聞之大責。’ 云云。 以此觀之, 事狀分明。 且玉京之言, 〔不〕 因刑杖, 出於平問, 則其言非誣可知。 若等實非所犯, 雖至死, 但要自明而已, 何必誣引他人耶? 等本以奸詐, 得重罪於 成宗朝。 如此之事難保其不爲, 此實大關名敎, 不可不畢鞫。" 不聽。


  •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60 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재정-상공(上供) / 수산업-염업(鹽業)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