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제에 대하여 김극뉴 등 간원이 헌의하다
이에 앞서 김극뉴(金克忸)·이의무(李宜茂)·김일손(金馹孫)·한훈(韓訓)·이주(李胄) 등이 간원에 있을 적에 헌의(獻議)하기를,
"신들은 머리를 조아려 아룁니다. 한 경제(漢景帝) 원년에 승상(丞相) 신도가(申屠嘉) 등이 상주(上奏)하여, ‘공이 고황제(高皇帝)처럼 클 수가 없으니 고황제를 태조(太祖)의 묘(廟)로 하고, 덕이 문황제(文皇帝)같이 거룩할 수가 없으니 문황제를 태종(太宗)의 묘(廟)로 하여, 천자(天子)가 대대로 사당에 헌제(獻祭)해야 합니다.’하니, 가하다고 제(制)하였었고, 선제(宣帝) 본시(本始) 원년에 유사(有司)가 효무제(孝武帝)를 추존(追尊)해서 세종(世宗)으로 하고 천자가 대대로 헌제(軒祭)할 것을 청하니 가하다고 제하였으며, 또 송(宋)나라 태상경(太常卿) 성차중(盛次仲) 등이 아뢰기를, ‘인종(仁宗) 신고(神考)는 마땅히 추숭(追崇)해야 하며, 종석(宗祏)은 하늘로 더불어 다함이 없다.’하여, 삼성(三省)에서 표청(表請)하여 부외(付外)하여 시행하였으니, 이상의 두어 임금은 당시에 모두 친(親)이 다하지 않았으나, 한·송의 신자들은 옛 임금의 은택을 생각하고 사왕(嗣王)의 효도를 넓히기 위하여 이와 같이 미리 불천(不遷)의 규례를 정하였으니, 이것은 만세의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太祖)·태종(太宗)의 공과 덕은 더 말할 나위 없거니와 세종(世宗)의 덕은 한 문제(漢文帝)의 공순하고 검박한 것보다 나으시고, 세조(世祖)의 공은 효무제(孝武帝)의 위엄이 사이(四夷)를 굴복시킨 것보다 더하시며, 우리 성종(成宗)의 덕은 일국 신민의 마음에 밴 것이 깊고 또 후하여, 승하(昇遐)하시던 날에 비록 심산 소곡일지라도 슬퍼하고 사모하며 분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정히 송인종과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신들은 원하옵건대, 한·송의 고사에 의하여 예관에게 맡겨서 신민의 한없는 설움을 위로해 주소서. 신들이 또 생각하오니, 문종(文宗)의 원비(元妃) 권씨(權氏)는 노산(魯山)695) 이전에 돌아가셨는데, 일시에 추폐(追廢)되어 문종께서는 종묘(宗廟) 한 방 안에서 독향(獨享)을 하시고 지금까지 배존(配尊)의 주(主)가 없으시니, 이는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성종께서 일찍이 적몰(籍沒)했던 장획(臧獲)696) 을 노산(魯山)의 궁인(宮人) 송씨에게 도로 내주어 그 생활을 유지하게 하고, 그 족속들을 용서하여 모두 벼슬길을 틔워 주셨으니, 성종의 지극하신 뜻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소릉(昭陵)과 묘주(廟主)를 복위(復位)하여 도로 문종(文宗)에 배향하시면, 종석이 매우 다행입니다.
또 상고하옵건대, 예전에는 천자·제후(諸侯)가 상(喪)이 끝나면 협제(祫祭)를 두어 은제(殷祭)의 근본을 삼았는데, 협제는 선조(先祖)의 신을 합향(合享)하는 것이라 조천(祧遷)한 주(主)도 다 참예합니다. 이는 살아서 경사에 모두 모이는 즐거움이 있는 때문에 죽어서 협식(祫食)의 예를 갖춘 것이니, 삶을 인연하여 죽음을 이룬 것입니다. 역대에 비록 동당(同堂)의 제도를 받들었을지라도 역시 협제는 폐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오례의주(五禮儀註)》에는 유독 협향(祫享)에 대한 의식이 없으니, 하나의 크나큰 궐전(闕典)이므로 아울러 예관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작정해서 시행케 하여 대효(大孝)의 근본을 넓히소서. 다만 의논하는 자가 이상의 두어 가지 일에 대하여 곧 성종께서 미처 못하신 것이라고 할까 염려이오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태종(太宗)께서 문교(文敎)를 동방에 일으키셨지만 예와 악(樂)을 제정하는 데에 있어 미처 겨를하지 못한 것은 세종(世宗)에게 기대하였고, 세종 같은 인(仁)으로 절사(絶嗣)를 계승하시는 데에 있어 다 마치지 못하시고 숭의전(崇義殿)의 창설은 문종(文宗)에게 기대하셨으니, 무릇 천하의 만사가 그 때를 기다리고 그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침 종묘를 천동(遷動)하게 되어 묘제(廟制)에 대한 이론이 있으므로 고설(瞽說)을 무릅쓰고 올리는 것이니, 다 묘중(廟中)의 대사이므로 결단하여 시행하심이 정히 오늘에 있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마음에 있는 대로 아뢰옵니다."
하니, 이것을 예조(禮曹)에 내리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종의 위덕이 지극히 크시니 불천(不遷)의 주(主)로 정하는 것은 과연 말한 바와 같습니다만, 삼가 상고하옵건대, 주(周)나라 문왕·무왕의 불천의 의논이 성왕(成王)·강왕(康王)의 세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효왕(孝王)·의왕(懿王) 때에 이르러 문왕·무왕이 조(祧)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세실(世室)의 건립(建立)이 있었으니, 지금 성종의 덕은 스스로 후세의 공론이 있을 것이므로 아직 거행하지 않아도 되며, 예로부터 묘(廟)에는 독주(獨主)가 없는데 아조(我朝)에 문종(文宗)께서 묘(廟)에서 홀로 제향을 받으시니, 의(義)로 보아 온당치 못하나 다만 소릉(昭陵)은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폐한 지가 오래라 경솔히 다시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역시 거행할 수 없습니다. 소·목(昭穆)의 제도가 있음으로부터 사시의 협제가 있고, 삼년의 협제가 있고, 묘(廟)를 헐거나 묘(廟)를 헐지 않은 주(主)는 태조(太祖)의 묘에 올려 모셔 제사 받게 되었는데, 동한(東漢)이후부터 비로소 동당 이실(同堂異室)의 제도가 있어 여러 묘(廟)의 주(主)가 언제나 한 실내에 있으니, 협제도 어렵게 되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옛 제도에 구애되어 태실(太室)의 난간 밖에 장막을 치고 협제를 강행하는 일까지 있으니, 이것은 너무도 선왕의 제도에 합하지 않는 점이 있는데, 더구나 조종조에서 행하지 못한 일을 하루아침에 세우고자 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9 면
- 【분류】역사-고사(故事) / 왕실-종사(宗社) / 정론-정론(政論)
○先是, 金克忸、李宜茂、金馹孫、韓訓、李冑等在諫院獻議云: "臣等頓首言, 漢景帝元年, 丞相嘉等上奏: ‘功莫大於高皇帝, 宜爲帝者太祖之廟, 德莫盛於文皇帝, 宜爲帝者太宗之廟, 天子世獻。’ 制曰: ‘可。’ 宣帝 本始元年, 有司請: ‘尊孝武爲世宗, 天子世獻。’ 制曰: ‘可。’ 宋太常卿盛次仲等言: ‘仁宗神考, 宜崇宗祏, 與天無極。’ 三省表請, 付外施行。 此數君在當時, 皆未親盡, 而漢、宋臣子, 思舊主之澤, 廣嗣王之孝, 預定不遷之規如此, 乃萬世臣子所宜倣者也。 恭惟我太祖、太宗之功德尙矣, 世宗之德有過於漢 文之恭儉, 世祖之功有加於孝武之威服四夷, 我成宗之德在一國臣民之心深且厚。 上昇之日, 雖深山窮谷, 莫不奔走悲慕, 正同仁宗。 臣等願依漢、宋故事, 宣付禮官, 以慰臣民抱天無涯之戚。 臣等又念, 文宗元妃權氏亡在魯山之前, 而一時追廢, 使文宗獨享於宗廟一室之中, 至今無配尊之主, 此事之惻然者也。 成宗以嘗籍沒(贓)〔臧〕 獲還給魯山宮人宋氏, 以資其生, 原其族從, 皆通仕籍, 成宗之至意, 此亦可見。 伏願殿下, 復昭陵與廟主, 還配文宗, 宗祏幸甚。 又按古者天子、諸侯喪畢而祫, 以爲殷祭之本。 祫者合先祖之神而享之, 祧遷之主, 亦無不預。 以生有慶集之懽, 故死備祫食之禮, 緣生以成死也。 歷代雖爲同堂之制, 亦不廢祫。 今《五禮儀註》獨無祫享之儀, 大是闕典。 幷令禮官參定施行, 以廣大孝之本。 只恐議者以數件事, 乃成宗所未遑者也, 是不然。 太宗興文敎於東方, 而制禮作樂, 有所未遑, 待於世宗。 以世宗之仁, 繼絶嗣, 有所未果, 而崇義殿之設, 待於文宗。 凡天下萬事, 待其時、有其機。 適今宗廟遷動, 廟制有議, 所以冒進瞽說, 皆廟中大事, 斷而行之, 正在今日。 謹昧萬死, 隨意以啓聞。" 下禮曹, 啓云: "成宗威德至大, 定爲不遷之主, 果如所言。 然謹按, 周之文、武不遷之議, 非定於成、康之世, 至孝王、懿王時, 文、武當祧, 而始有世室之建。 今成宗之德, 自有後世公論, 姑勿擧行。 自古廟無獨主, 我朝文宗獨享於廟, 於義未安。 但昭陵祖宗廢之已久, 輕易復立爲難, 亦不可擧行。 自有昭穆之制, 有四時之祫, 有三年之祫。 壞廟、未壞廟之主, 升食於太祖之廟, 自東漢以後, 始有同堂異室之制。 群廟之主, 長在一室之內, 祫祭爲難, 而後世拘於古制, 至有以太室楹外設幄, 而强行祫祭者, 有甚不合於先王之制, 況祖宗朝未行之事, 一朝論建未便。"
- 【태백산사고본】 3책 1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3 책 59 면
- 【분류】역사-고사(故事) / 왕실-종사(宗社)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