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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10권, 연산 1년 11월 12일 신묘 1번째기사 1495년 명 홍치(弘治) 8년

김일손·어세겸 등이 수륙재를, 유헌이 승·니의 문안 거처를 금하기를 청하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나왔다. 헌납(獻納) 김일손(金馹孫)이 아뢰기를,

"어제 수륙재지내는 것이 불가한 일임을 아뢰었는데, 하교하시기를, ‘양전(兩殿)께 아뢰어 보겠다."

하셨습니다. 신들도 전하께서 양전께 끌리는 것이요 본의가 아니신 줄을 압니다. 그러나 어버이의 영을 좇는 것만이 효도가 아닙니다. 성종께서도 도승(度僧)하는 법을 파하려 하였는데 양대비께서 말리시매, 성종께서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억지로라도 자전(慈殿)의 뜻을 좇아야 한다고 하는 이도 있었으나, 성종께서 좇지 않고 끝내 파하셨습니다. 지금 이미 파할 것을 명하시고 곧 파하지 말라고 명하시니, 성종의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나라에 신의를 잃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지사(知事) 홍귀달(洪貴達)은 아뢰기를,

"상전(上殿)께서 선왕을 위하시는 뜻으로 못하는 일 없이 다하려 하시겠으나, 전하께서는 옳은 도로써 섬기고 성효(誠孝)를 다하셔야 할 따름입니다. 지금 재지내는 것을 파하고자 청하는 것이 어찌 모두 선왕을 박대해서겠습니까. 전하께서 성종의 뜻을 저버리지 마시도록 하여, 처음 정사에 시정(施政)의 근본을 바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고, 영사(領事) 어세겸(魚世謙)이 말하기를,

"전에 이미 파할 것을 명하시니 대소 신료(臣僚)로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곧 파하지 말라고 명하시니 중외에서 모두들 실망합니다. 일에는 경중이 있는데 모후(母后)의 뜻을 상할까 염려하여 반드시 재를 지내려 하신다면, 그것이 선왕의 뜻을 어기고 비례(非禮)로 섬기는 것과 어느 것이 경하고 어느 것이 중하겠습니까. 모후의 뜻을 어긴다 하여 불효가 되는 것이 아니요, 선왕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대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경중을 헤아려 결단하소서."

하였다. 일손이 아뢰기를,

"황해도는 전부터 역질(疫疾)이 있었는데, 유생 중에 향위(鄕圍)607) 에서 책문(策問)에 응대(應對)한 자가 말하기를, ‘탑묘(塔廟)608) 를 세우고 부처에게 제사지내면 예방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성종께서 도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 하여 어필(御筆)로 써서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양 무제(梁武帝)·당 선종(唐宣宗)으로 만들려는 것이다.’고 하시고, 곧 명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였습니다. 성종은 성덕이 고명하시어 양 무제당 선종의 일을 보고 혹시라도 물들지나 않을까 하셨기 때문에 그 총명한 판단이 이러했던 것입니다. 지금 위판(位版)을 만들어서 절하여 굴복하는 형상을 만들어서 노예가 하듯이 한다면, 하늘에 계신 성종의 형혼이 고명 정대하시니, 반드시 저것에게 욕을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臣子)의 마음으로 어찌 차마 이런 일로 군부(君父)를 대우하겠습니까. 위의 뜻은 아마도 초상 때 벌써 행한 일이니 지금 와서 폐할 수 없다는 것이나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어서, 황황하게 발을 구르며 통곡할 때 심신이 전도(顚倒)하여 의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고 또 상중으로 말을 안할 때에, 예조에서 고사(故事)를 예로 들어서 아뢰었으며, 또 내전의 하교가 있으니, 사람들이 그것이 전하의 뜻이 아닌 줄을 알았기 때문에 강력히 중지하기를 청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하교하시기를, ‘조종조에서 행해 오던 것이다.’하시나, 조종조에서 반드시 모두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고려 때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승도가 백성의 반이나 되고 탑묘가 사방에 두루 찼으며, 비용이 만 가지요, 날마다 재올리는 것을 일삼으며, 이름하여 팔관회(八關會)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왜구(倭寇)가 한창 성하여 큰 적의 세력이 국경을 위압(威壓)하는데도 법연(法筵)609) 을 폐지하지 않고, 사대부들도 바람 부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심지어는 부녀자들까지 절에 올라가서 밤을 지내며 승도와 섞여서 거처하여 혹은 음란한 행위를 한 자도 있어서, 마침내 망하게까지 되었습니다. 태조께서 천명을 받으신 후로 태종 때에 이르기까지 전혀 불도를 숭상하지 않고 일체 통렬히 금지하고 사찰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세종께서 그 뜻을 알기 때문에 재를 지낸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성종께서도 불도를 좋아하지 않으시어, 여승들의 집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을 철거하고, 특별히 도승의 법을 파하고, 몸소 행하고 앞장서서 백성들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26년 간에 재를 지낸 일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일이 있게 되니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조사(朝士)들은 모두 성종조의 신하이니, 모두 성종께서 불도를 숭상하지 않으셨음을 아는데 승하하신 지 얼마 안 되어서 곧 평일에 좋아하시지 않던 일을 거행하면서 부처 앞에 절하게 하니, 통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사하시는 처음에 있어서, 간하는 말을 쫓아 거절하는 일이 없어서, 가언(嘉言)610) 이 숨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한데도, 여러 번 청하여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전하께서 만일 분명히 하여서는 안될 일임을 아신다면 어찌 꼭 억지로 하여서, 간하는 것을 막는다는 이름을 얻으시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지평(持平) 유헌(柳軒)이 아뢰기를,

"승(僧)을 금하는 법은 있으나, 이(尼)를 금하는 법이 없으므로, 지금 동대문 밖 여염 사이에 이승(尼僧)이 사삿집을 짓고 사오니, 철거하여 여염 중에 함께 거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일손이 아뢰기를,

"이승의 무리가 과부 집에 출입하면서 자못 추한 소문을 내고 있으니, 금법(禁法)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또 중들이 도둑·살상의 죄를 범하더라도 반드시 계문(啓聞)611) 한 다음에야 가둡니다. 대저 3품관 이하 및 도(徒)·유(流)·부처(付處)의 죄는 관찰사가 모두 처단할 수 있는데, 중에 한하여서는 그렇지 않으니, 이것이 조종(祖宗)의 법이기는 하지만, 크게 교화에 방해가 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 법은 고쳐야 하겠다."

하였다. 일손이 아뢰기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대내(大內)에 들여다가 조석으로 열람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가져다 보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4 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사법-법제(法制)

  • [註 607]
    향위(鄕圍) : 지방 시험.
  • [註 608]
    탑묘(塔廟) : 절의 건물들.
  • [註 609]
    법연(法筵) : 불법(佛法)을 연술(演述)하는 자리.
  • [註 610]
    가언(嘉言) : 훌륭한 말.
  • [註 611]
    계문(啓聞) : 관찰사·절도사·어사 등이 임금에게 글로 써서 아뢰는 것.

○辛卯/受常參, 御經筵。 獻納金馹孫啓曰: "昨啓設齋不可事, 敎曰: ‘當啓兩殿。’ 臣等亦知殿下牽於兩殿, 而非本意也。 然從親之令, 非爲孝也。 成宗欲罷度僧之法, 兩大妃止之。 成宗議於大臣, 或有言勉從慈旨者, 成宗不從而竟罷之。 今旣命罷之, 旋命勿罷, 非徒有違成宗之志, 恐亦失信於國。" 知事洪貴達啓曰: "上殿爲先王之志, 雖無所不至, 殿下當事之以道, 盡其誠孝而已。 今之請罷設齋者, 豈皆薄於先王乎? 欲使殿下勿負成宗之志, 以正初政出治之本耳。" 領事魚世謙曰: "前旣命罷, 大小臣僚莫不欣忭, 尋命勿罷, 中外缺望。 事有輕重, 恐傷母后之志必欲設齋, 與違棄先王之志, 而事之以非禮, 孰輕孰重? 違母后之志, 非爲不孝; 繼先王之志, 是謂大孝, 請須計其輕重而斷之。" 馹孫曰: "黃海道素患疫癘, 儒生有對策鄕圍者曰: ‘立塔廟祀佛則可禳。’ 成宗以爲亂道惑民, 御書曰: ‘是欲使我爲 也。’ 卽命竄逐遠方。 成宗聖德高明, 其視 (唐宗)〔唐宣〕 之事, 若將浼焉, 故其出於睿斷如此。 今作位版, 爲拜屈之狀, 似若奴隷然, 成宗在天之靈, 高明正大, 必不見辱於彼。 然臣子之心, 豈忍以此待君父哉? 上意無奈初喪旣行之, 今不可廢乎? 是殊不然。 皇皇哭踊之際, 身心顚倒, 不假揆諸義理。 且當諒闇不言之時, 禮曹例擧故事以啓之, 而又有內敎。 下之人亦知非殿下之志, 故不力請止之耳。 雖敎曰: ‘自祖宗朝行之。’ 祖宗朝未必皆然。 麗朝崇信佛敎, 僧徒半於吾民, 塔廟’ 遍於四境, 糜費萬端, 日事飯佛, 名之曰八關會。 當其時, 倭寇方張, 大敵壓境, 法筵不廢。 士大夫, 從風而靡, 以至婦女上寺經宿, 與僧徒混處, 或有淫亂者, 而終至於亡。 太祖受命以來, 至于太宗, 專不崇信, 一切痛禁, 盡毁寺刹, 而世宗知其志, 故亦未嘗設齋。 今我成宗亦不喜佛, 撤去尼舍之在城內者, 特罷度僧之法, 躬行身率, 以化其民。 故二十六年之間, 無有設齋者。 今者遽有如此之擧, 不勝缺望。 今之朝士皆成宗朝臣也。 皆知成宗不崇信, 而昇遐未幾, 卽以平日所不喜之事擧行, 而使之屈拜於佛, 人莫不痛憤。 卽政之初, 從諫弗咈, 使無嘉言遺伏可也, 而累請不允。 殿下若明知不可爲之事, 則豈必强爲之, 以成拒諫之名乎?" 持平柳軒曰: "法有禁僧, 而無禁尼。 今東大門外閭閻間, 尼僧作私舍以居, 請撤去, 使不得雜處閭閻。" 王曰: "可。" 馹孫曰: "尼僧輩出入寡婦家, 頗有醜聲, 宜立禁。 且僧人雖犯盜賊、殺傷之罪, 必啓聞而後囚之。 大抵三品以下及徒流付處之罪, 觀察使皆得處斷, 而獨於僧人則不爾。 此雖祖宗之法, 大妨治化。" 王曰: "此法所當改也。" 馹孫曰: "《國朝寶鑑》請須入內, 朝夕覽焉。" 王曰: "當取觀之。"


  • 【태백산사고본】 3책 1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3 책 44 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