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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2권, 연산 1년 1월 10일 갑오 2번째기사 1495년 명 홍치(弘治) 8년

윤필상 등이 산릉의 자리에 대해 아뢰니 광평 대군의 묘로 정하다

윤필상·노사신·신승선·이극돈·김응기·최호원이 산릉(山陵) 자리를 보고 와서 복명(復命)하는 서계에 이르기를,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묘가 첫째요, 그 다음이 정이(鄭易)의 묘요, 또 그 다음이 고양군(高陽郡) 관사(官舍)의 자리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고양군의 땅은 어떤 흉하고 해로운 것이 있어서 셋째가 되는가?"

하매,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안전(案前)에 관(官)이 있고 주산(主山) 뒤에 귀(鬼)026) 가 있는데, 3, 4월은 월극(月剋)이 됩니다."

하였고, 호원이 서계하기를,

"고양군의 땅은 길(吉)만 있고 흉(凶)은 없는 것이 광평 대군의 묘와 다름이 없으나, 고양에는 다만 초목이 없고, 광평의 묘에는 《호순신(胡舜申)》027) 의 ‘산이 높고 물이 또 오는 것이 염려된다[恐].’는 말이 있으니, 공(恐) 자가 아마 흉한 데 가까운 듯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묘가 고양(高陽)에 있어서 후귀(後鬼)가 된다.’ 하나, 주산(主山)이 불평(不平)하여 백호(白虎)028)혈(穴)029) 뒤에 연하여 내려왔으므로 정귀(正鬼)는 아닌데, 더구나 건원릉(健元陵)·영릉(英陵)·헌릉(獻陵)·창릉(昌陵)·경릉(敬陵)에도 다 후귀(後鬼)가 있으니, 귀혈(鬼穴)을 가지고 흉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떠 이는 말하기를 ‘전관(前官)이 있다.’ 하나, 건원릉 전관이 20리에 이르러 그쳤으며, 창릉·경릉에도 또한 10여 리의 전관이 있으니, 전관과 후귀로 논한다면 이상의 여러 능을 다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고양의 전관은 내외 안산(案山)에 상관이 없고, 외청룡(外靑龍)030) 뒤에 따로 한 산을 이루고 앞에서 나성(羅星)이 되어 지나갔으니, 비록 수십 리에 이르러도 전혀 주혈(主穴)에는 상관이 없음에리까. 신은 근지에는 이만한 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과연 호원의 아뢴 바와 같이 여러 능에 다 관(官)이 있고 귀(鬼)가 있다면 고양도 흉할 것은 없을 듯하다. 광평은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있는 자도 또한 병이 있거니와 정이의 묘는 국용(國用)에 합당한가?"

하매, 필상 등이 아뢰기를,

"정이의 묘가 임금의 능으로 합당합니다. 그러나 광평의 묘에 비하면 훨씬 못합니다. 광평의 후손이 번성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다만 영순군(永順君)이 일찍 죽었을 뿐입니다. 《지리서(地理書)》를 상고하건대 ‘힘은 작으면서 큰 것을 도모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주석에 이르기를 ‘산 사람의 복력(福力)이 미약한데 왕후(王侯)의 땅을 도모하는 것은 흉한 것이 된다.’ 하였습니다. 임원준(任元濬)을 불러서 아울러 물으소서."

하고, 호원이 아뢰기를,

"《지리서(地理書)》에 ‘물을 얻는 것[得水]031) 이 상(上)이 되고, 바람을 감춘[藏風] 것이 다음이다.’ 하였는데, 정이의 묘는 청룡이 짧고 백호가 낮고 멀어서 바람이 모이는 곳이니 첫째로 불가하오며, 또 ‘수구(水口)와 산두(山頭)가 낱낱이 돌아야 한다.’ 하였는데, 이 땅은 산세가 바로 내려오고 산이 하나도 돌아앉은 것이 없으니 둘째로 불가하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제왕의 능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만약 광평의 묘를 쓴다면, 반드시 옛 무덤을 파내야 할 것이니, 신(神)이 편안하겠는가. 온전한 땅을 선택하여 쓰는 것이 어떨까? 임원준을 불러 물으라."

하였다. 필상 등이 아뢰기를,

"조종의 산릉은 옛 무덤을 파내지 않은 데가 없으니, 다만 땅의 길흉만을 볼 것이지, 어찌 그런 폐단을 헤아리겠습니까. 또 정이의 묘는 광평의 묘에 비교하면 훨씬 못하오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어찌 이 길한 곳을 버리고 불길한 땅을 취하겠습니까. 하물며 고양은 3, 4월에 월극(月剋)이 되며, 5월은 왕대비에게 또한 불길하오며, 6월로 물린다면 중국 사신이 마침 그때에 오게 될 것이며, 또 월산 대군의 묘가 주산(主山) 뒤 5리쯤 있으니 파내야 될 것입니다."

하고, 사신이 아뢰기를,

"옛적에는 죽은 신하를 능(陵)에 가까운 산에 장사하여 능을 옹위(擁偉)하게 하였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비록 이 땅을 쓰더라도 월산의 무덤은 파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깁니다."

하고, 호원이 아뢰기를,

"헌릉 뒷산에 영순군·회원군(檜原君)의 묘가 있으니, 만약 월산의 무덤을 파낸다면 그것도 파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윤필상 등이 또 아뢰기를,

"원준(元濬)이 병이 중하여 방문 밖에 나오지 못합니다. 이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근시(近侍)로 하여금 지리관(地理官)을 데리고 가서 묻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대왕 대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듣기로는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길지(吉地)에 장사하면 반드시 그 발복(發福)을 받고, 존귀한 사람이라도 불길한 곳에 장사하면 그 화를 받는다 하는데, 광평의 묘는 비록 사람과 땅이 서로 맞아서 마땅히 그 발복을 받을 것이라 하나, 혹시나 흉해(凶害)가 없는가? 한 번 장사하고 나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시니, 승지는 이 뜻을 가지고 원준에게 가서 물으라."

하매, 도승지 김응기가 지리관 정명도(丁明道) 등을 데리고 원준의 집에 가서 묻고, 회계(回啓)하기를,

"원준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경성 근처의 모든 산을 두루 보았사온데, 건원릉·현릉(顯陵)이라 할지라도 다 광평 대군의 묘보다는 못합니다. 비록 영순군·회원군은 일찍 죽었으나, 그 자손에는 또 번성한 집이 많습니다. 설사 대군의 묘를 가벼이 파내서는 안 된다 하더라도 임금에게 비교하면 차별이 있습니다. 고양은 결코 쓸 수 없고, 월산의 묘는 정혈(正穴)이 아닙니다. 옛적에 세조께서 장순 황후(章順王后)의 상에 친히 올라가 바라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 산을 장사할 만하다 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정(市井) 풀무깐[鑢冶] 있는 땅에는 장사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 지리설(地理說)인데, 고양은 여염(閭閻)이니 더욱 쓰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월산 대군의 장사 때에 최호원이 혈 앞에 귀겁(鬼刼)이 있다고 말하였으나, 신이 가서 보는 그것은 혈 앞에 있는 퇴부(堆阜)032) 이며 참으로 길한 땅이었습니다. 호원의 말은 취할 것이 못됩니다. 정이의 묘는 정혈이 아니요, 구성량(具成良)의 묘는 산이 험하고, 물이 적으니 다 쓸 수 없습니다. 김포(金浦) 마전(麻田)의 관사(官舍) 자리도 역시 광평 대군의 묘지보다는 못합니다. 《지리서(地理書)》에 44산이라는 말이 있으나, 그것은 앞이 막히고 뒤에서 옹위하고 왼쪽에서 안고 오른쪽으로 가리운 땅을 얻을 수가 없어서, 그런 부득이한 설을 낸 것이요, 정론(正論)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광평의 묘가 제일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곳으로 정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2 책 631 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26]
    귀(鬼) : 술수가(術數家)가 말하는 육친(六親)의 하나로, 나를 이기는 것은 관귀라 하는 말이 있으니, 묻히는 자나 자손에게 불길하다.
  • [註 027]
    《호순신(胡舜申)》 : 송(宋)의 호순신이 지은 지리서(地理書). 《대전회통(大典會通)》 예전(禮典) 음양과 초시(陰陽科初試) 지리학 강서(講書)조에 호순신이라는 과목이 있음.
  • [註 028]
    백호(白虎) : 주산(主山)에서 뻗어 나간 오른쪽 산줄기.
  • [註 029]
    혈(穴) : 풍수 지리(風水地理)의 정기가 모인 자리.
  • [註 030]
    외청룡(外靑龍) : 외곽을 이룬 청룡. 청룡은 주산에서 뻗어 나간 왼쪽 산줄기.
  • [註 031]
    물을 얻는 것[得水] : 풍수 지리서에서 쓰는 말로 산속에서 나와 산속으로 흐르는 물을 일컬어, 묘지에서 보아 흘러 들어오는 것을 ‘득수’라 하고 흘러나가는 것을 ‘파수(破水)’라 함.
  • [註 032]
    퇴부(堆阜) : 흙 모인 언덕.

尹弼商盧思愼〈愼〉承善李克墩金應箕崔灝元看審山陵來, 復命書啓曰:

"廣平大君墓爲第一, 其次鄭易墓, 又其次高陽郡官舍之地。"

傳曰: "高陽郡地, 有何凶害, 而居第三?" 尹弼商等啓: "案前有官, 主後有鬼, 三、四月月尅。" 灝元書啓:

高陽郡地, 有吉無凶, 與廣平大君墳墓無異。 高陽, 但無草木, 廣平墳墓, 則胡舜由有 "恐山高而水且來" 之論, 恐字, 疑涉凶害。 或曰: "月山大君墳墓, 於高陽爲後鬼。" 然主山不平, 白虎穴後連下, 非是正鬼。 況健元陵英陵獻陵昌陵敬陵,皆有後鬼, 不可以鬼穴爲凶也。 或曰: "有前官", 健元陵前官, 至二十里而止, 敬陵亦有十餘里。 以前官後鬼論之, 則以上諸陵, 皆可遷乎? 況高陽前官, 內外案山, 無干(淺)〔涉〕 。 外靑龍後, 別作一山, 前作羅(城)〔星〕 而過, 雖至數十里, 專不干於主穴。 臣意以謂, 近地無如此穴。

傳曰: "果如灝元所啓, 諸陵皆有官、有鬼, 則高陽似無凶也。 廣平子孫不繁, 而其存者, 亦有病。 鄭易之墓, 可合國用否?" 弼商等啓: "鄭易之墓, 宜於帝王之陵, 然以廣平之墓視之, 則不及, 遠矣。 廣平之後, 非不蕃衍, 獨永順君早死耳。 謹按地理書曰 ‘力小圖大。’ 注云, 「生人福力微小, 而圖王侯之地, 爲凶也。」 請召任元濬竝問之。" 灝元啓: "《地理書》曰, ‘得水爲上, (莊)〔藏〕 風次之。’ 鄭易之墓, 靑龍短, 白虎低, 而遠風所聚也, 一不可也。 又曰, ‘水口山頭箇箇回。’ 此地山勢直下, 無有一山回坐, 二不可也。 臣意以謂, 不合於帝王之陵也。"

傳曰: "若用廣平之墓, 則必發古塚, 神其安乎? 擇用全地, 何如? 其召元濬問之。" 弼商等啓: "祖宗山陵, 無有不發古塚者。 但觀地之吉凶, 豈可計是弊? 且鄭易之墓, 比諸廣平之墓, 則不及, 遠矣。 臣子之心, 豈可捨此吉地, 而取彼不吉之地耶? 況高陽, 三、四月月尅, 而五月, 於 王大妃亦不吉。 若退六月, 則天使之來, 必當其時。 且月山大君之墳, 在主山之後五里許, 在所當發。"

思愼啓: "古者, 令群臣之死者, 葬於近麓, 使之擁衛。 臣意, 雖用此地, 月山之墳, 不可發也。" 灝元啓: "獻陵後山, 有永順檜原君之墓, 若發月山之塚, 則此亦皆可發。" 尹弼商等又啓: "元濬病深, 不出窓外。 此國家大事, 請令近侍, 率地理官, 就問之。" 傳曰: "大王大妃云: ‘予聞, 雖微賤之人, 卜葬吉地, 則必蒙其應; 雖尊貴之人, 卜葬不吉, 則亦蒙其禍。’ 廣平之墓, 雖曰人地相稱, 當蒙其應, 無奈有凶害乎? 一葬之後, 悔不可追。 承旨, 將是意, 往問于元濬。" 都承旨金應箕率地理官丁明道等, 馳往元濬第問之, 回啓。 元濬云: "臣嘗遍觀近京諸山, 雖健元陵顯陵, 皆不及廣平大君墓。 雖永順、ㆍ檜原、早死, 其子孫亦多蕃衍。 借曰 ‘大君之塚, 不宜輕發’ 則其視國君, 有間矣。 高陽, 決不可用。 月山之墓, 乃非正穴也。 昔, 世祖章順王后之喪, 親臨登望曰: ‘誰謂此山, 爲可卜葬。’ 且 ‘市井。 鑪冶之處, 不宜卜葬’, 乃地理之說。 高陽是閭閻, 尤不可用也。 先是, 月山之葬, 崔灝元以爲, 穴前有鬼刦。 臣往觀之, 乃穴前堆阜, 眞吉地也。 灝元之言, 不足取信。 鄭易之墓, 非正穴也。 具成良之墓, 山險水少, 皆不用也。 金浦 麻田官舍之地, 亦不及廣平大君墓。 《地理書》有 ‘四十四山’ 之語, 此以不得前遮後擁、左抱右掩之地, 而爲是不得已之說也, 非正論也。 臣意以爲, 廣平墓爲 第一。"

傳曰: "定于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2 책 631 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