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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1권, 연산 즉위년 12월 26일 신사 4번째기사 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부모의 상과 임금의 상이 겹친 유자광의 입장에 대하여 신하들이 찬반 토론하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이미 빈소를 차렸습니다.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오니, 증자(曾子)가 묻기를 ‘대부(大夫)와 사(士)가 사상(私喪)이 있어 복(服)을 벗는 예를 갖추어야 할 터인데, 임금의 복이 있다면 사상의 복을 벗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답하기를 ‘내 몸에 임금의 상복이 있으면 사복(私服)을 입지 못하는 것인데, 또 무엇을 벗는단 말이냐.’ 하였고, 그 주(註)에 이르기를 ‘임금이 중하고 어버이가 경하므로 의(義) 때문에 은혜를 끊는 것이다.’ 하였으며, 증자가 또 묻기를 임금은 이미 계빈(啓殯)019) 하였을 때에 신하가 부모의 상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돌아와서 곡하고 다시 가서 임금을 보낸다.’ 하였는데, 주에 ‘돌아와서 어버이의 상에 곡하고 다시 가서 임금의 상을 보낸다.’고 하고, 또 ‘만약 신하가 부모의 상에 있어 이미 빈소를 차린 뒤에 임금의 상이 있으면 임금의 처소로 가고, 부모의 상에 은사(殷事)020) 가 있으면 집으로 돌아오되, 아침저녁으로는 또 늘 임금의 처소에 있어야 한다.’ 하였으며, 증자가 또 묻기를 ‘부모의 상에 이미 발인(發引)하여 길에 나섰는데, 임금이 돌아가셨음을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봉분(封墳)까지 마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간다.’ 하였는데, 에 ‘감히 사상(私喪)의 옷으로 임금의 상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경(禮經)》에 실린 것이 꼭 신의 경우에 해당하온데, 신이 지금 사복(私服) 때문에 다시 임금의 복을 벗지 않는다면, 이것은 신하로서 임금의 복을 입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버이가 도리어 중하고 임금이 도리어 경하게 되어 《예경》에 어긋나고 대의(大義)에 이지러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매, 정승들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이극배는 의논드리기를,

"해사(該司)로 하여금 마련하여 아뢰게 함이 어떠합니까?"

하고, 노사신은 의논드리기를,

"비록 고례(古禮)가 있으니 자광(子光)이 아뢴 대로 함이 어떠합니까?"

하고, 신승선은 의논드리기를,

"비록 고례가 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구애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말이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함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자광이 《예경(禮經)》을 인증(引證)하여 대행왕의 상복을 입으려 하니, 그의 심지는 가상하오나, 시대가 변했고 일이 다르니, 반드시 주(周)나라 제도를 다 쓸 것은 없습니다. 아조(我朝)에서 고금을 참작하여 《대전(大典)》021) 을 만들었는데, 무릇 남의 자식으로서 방금 어버이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 임금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상복을 고쳐 입는 제도가 없으며, 임금의 상이 비록 중하나 어미의 상도 경한 것이 아닌데, 죽은 어미를 빈(殯)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모(紗帽) 망건(網巾)을 쓰고 대궐에 들어와 반열(班列)을 따르면,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 해괴할 것입니다. 지금 한 번 길을 열어 놓으면 뒤에 반드시 이것을 본받아서 드디어 규례(規例)가 되어 사세가 실로 난처할 것이오니, 자광이 아뢴 바는 시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2 책 623 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법-법제(法制) / 인물(人物) / 윤리(倫理)

  • [註 019]
    계빈(啓殯) : 출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
  • [註 020]
    은사(殷事) : 초하루·보름 또는 특산물 등이 있어 평시보다 잘 차리는 것. 은(殷)은 성대(盛大)의 뜻.
  • [註 021]
    《대전(大典)》 :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가리킴.

○前武靈君柳子光上書:

臣遭母喪, 已成殯。 謹按《禮經》, 《會子問〔曾子問〕曰: "大夫士有私喪, 可以除之矣, 而有君服焉, 其除之也, 如之何?" 孔子曰: "有君喪服於身, 不敢私服, 又何除焉?" 註曰: ‘君重親輕, 以義斷恩。’ 曾子又問曰: "君旣啓, 而臣有父母之喪, 則如之何?" 孔子曰: "歸哭而反送君。" 註曰: ‘歸哭親喪, 復往送君之喪。’ 又曰: "若臣有父母喪, 旣殯而後有君喪, 則歸君所; 父母喪有殷事, 則來歸家。 朝夕亦恒在君所。" 曾子又問曰: "父母之喪, 旣引及塗, 聞君薨, 如之何?" 孔子曰: "遂旣封, 改服而往。" 註曰: ‘不敢以私喪之服, 喪君也。’ 此《禮經》所載, 正合臣事。 臣今若因私服, 而不更除君服, 是臣而不服君服。 然則親反重, 君反輕, 有違《禮經》, 有虧大義。

命議于政丞等。 李克培議: "令該司磨鍊以啓, 何如?"; 盧思愼議: "有古禮, 依子光所啓, 何如?"; 愼承善議: "雖有古禮, 以今觀之, 不無礙處。 然此乃臣子出於至情, 依所啓施行, 何如?" 命該曹議啓。 禮曹啓: "子光援引《禮經》, 欲服大行王喪, 其心志可喜。 但時移事殊, 不必盡用制。 我朝參酌古今, 勒成《大典》。 凡爲人子者, 方守親喪, 遇君喪, 無改服之制。 君喪雖重, 母喪亦非輕。 亡母在殯未久, 而著紗帽、網巾, 詣(關)〔闕〕 隨班, 駭人視聽。 今一開端, 後必效此, 遂成格例, 事勢實爲未便。 子光所啓, 宜勿施行。"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2 책 623 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법-법제(法制) / 인물(人物) / 윤리(倫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