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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92권, 성종 25년 7월 15일 신축 1번째기사 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위관 의금부 당상을 빈청에 불러 임광재를 국문하게 하고 어서를 써서 하문하다

명하여 위관(委官)과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을 빈청(賓廳)에 불러, 임광재(任光載)를 국문(鞫問)하게 하고, 어서(御書)로 10조(十條)를 써서 하문(下問)하였다. 〈그 내용은〉,

"1. 강심(姜諶)836) ·수비(守非)·존금(存今)은 모두 복초(服招)하였는데, 경(卿)은 어찌하여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는가?

1. 말을비(末乙非)·주사리(注沙里)·여금(余今)·석금(石今)·숙지(叔只)·내근내(乃斤乃)·계동(繼同) 등이 모두 이미 복초(服招)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불복(不服)하는가?

1. 양담(楊澹)의 집 절린(切隣)837) 으로 경을 보았다는 자가 있는데, 경(卿)은 어찌하여 불복(不服)하는가?

1. 경(卿)이 음란한 짓을 함은 부마(駙馬) 중에서 제일(第一)이며, 경이 양첩(良妾)을 둔 것이 명백한데도 경은 어찌하여 불복하는가?

1. 폐백(幣帛)을 보낸 것도 또한 심히 명백(明白)한데 어찌하여 불복하는가?

1. 문사 낭청(問事郞廳)838) 만이 이 일을 독단(獨斷)하였는가? 어찌 생각하지 못함이 이렇게 심한가?

1. 예로부터 추초(箠楚)839)무복(誣服)840) 을 취하려고 함이 아니고, 그 불복(不服)함을 다스리는 것[制]인데, 경은 어찌하여 무복(誣服)하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1. 대이(大伊)가 공주(公主)를 모살(謀殺)함도 또한 이것은 경(卿)의 연고인데, 스스로 놀라서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간인(奸人)을 본받음이 옳겠는가?

1. 경(卿)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무엇 때문에 의심하여 그것을 불신(不信)하십니까?’하였으나, 옥관(獄官)이 누가 그것을 애매(曖昧)하다고 불쌍히 여기겠는가? 이 옥사(獄事)는 누구의 소위(所爲)이기에 바로 이런 말을 하는가?

1. 숙지(叔只)가 데리고 간 것도 또한 이는 불법(不法)인데, 경(卿)은 이 일을 은휘(隱諱)하였으니, 이는 임금이나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짓이다. 어찌하여 복초(服招)하지 않는가?"

하고, 또 말[言]로써 임광재에게 전교하기를,

"경(卿)은 나이가 30이니 마땅히 사리(事理)를 알 것인데, 어찌 감히 대답함이 이와 같은가? 이것은 위로 대비(大妃)가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며 아래로는 과인(寡人)이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비록 어리석고 용렬한 사람이더라도 만약 시비(是非)를 개진(開陳)하면 또한 해혹(解惑)하여 자복(自服)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불복(不服)하면서 스스로 분노(憤怒)를 품고 대답함이 이와 같은가? 경(卿)의 생각에는 ‘내가 바로 부마(駙馬)이니, 어찌 형신(刑訊)을 쓰겠는가?’ 하고, 이로써 불복(不服)하는 것인가? 어찌 형신(刑訊)을 논(論)한 뒤에야 그 실정을 알겠는가? 경은 굳이 은휘(隱諱)하지 말고 즉시 사실대로 복초함이 마땅하다."

하고, 또 위관(委官) 등에게 전교하기를,

"무릇 사건에 간여한 사람의 초사(招辭)를 임광재(任光載)에게 주어 말하라."

하였다. 임광재(任光載)가 대답하기를,

"하문(下問)하실 때에 즉시 직계(直啓)하지 않는 것은 신이 참으로 뻔뻔스러운 얼굴로 말하기가 어려웠고, 또 끝내는 혹 득면(得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그 헌부(憲府)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전에 이미 성상의 하문(下問)에 은휘하였는데 도리어 공함(公緘)841) 에 복종하면, 의리(義理)에 편안하지 못한 까닭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신에게 실로 이런 일이 있었음은 지난 3월 사이에 대이(大伊)의 집에 갔다가 한 어린 소녀[幼女]를 보고 마침내 함께 사통(私通)하고는 구원(久遠)한 계책을 삼으려고 종[奴] 이치(李致), 구사(丘史)842) 숙지(叔只)로 하여금 사라 단자(紗羅段子)를 그 집에 갔다 주게 하고서 정녕(丁寧)한 뜻을 통하였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손으로 끌고 다닐 수 있는 어린아이라도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고, 여항(閭巷)의 소민(小民)도 그 임금을 공경할 줄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는데, 신(臣)이 비록 무상(無狀)하더라도 20년을 시조(侍朝)하여 특별히 상은(上恩)을 입었으니, 어찌 감히 굳게 은휘하여 거듭 성상의 하문(下問)을 수고롭게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경(卿)이 이제 직언(直言)하니 옳다고 이를 만하다. 하지만 그 사이의 절차(節次)를 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임광재(任光載)가 바로 공초(供招)를 마치니, 전교하기를,

"대개는 같다. 하지만 두세 곳은 조금 어긋나는 것이 있다."

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임광재(任光載)의 옥사(獄事)에는 의사(疑似)843) 에 관계되는 것이 많았는데, 임금이 한결같이 대비(大妃)의 하교를 받고 위관(委官)을 엄칙(嚴勅)하자, 위관 등이 황공(惶恐)하고 전도(顚倒)하여 그 옥사(獄事)를 구성(構成)하였으므로, 아는 자는 깊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29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560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윤리-강상(綱常)

  • [註 836]
    강심(姜諶) : 아지(阿之)의 의부(義父).
  • [註 837]
    절린(切隣) : 아주 가까이 사는 세 이웃[三切隣]을 말하는데, 송사(訟事)·옥사(獄事)의 증인이 되었음.
  • [註 838]
    문사 낭청(問事郞廳) : 조선조 때 죄인의 심문서를 작성하여 읽어 주는 일을 맡아 하는 임시 벼슬.
  • [註 839]
    추초(箠楚) : 볼기를 치던 형구(刑具).
  • [註 840]
    무복(誣服) : 죄도 없는데 하는 수 없이 형(刑)에 복역(服役)하는 것.
  • [註 841]
    공함(公緘) : 당상관(堂上官)이나 부녀자를 헌부(憲府)에서 심문할 때 서면(書面)으로 취조하던 것. 《세종실록(世宗實錄)》 제48권을 보면, "글로써 핵문하는 것을 공함이라 한다[以書劾問 謂之公緘]."라고 하였음. 공함 답통(公緘答通).
  • [註 842]
    구사(丘史) : 조선조 때 임금이 종친(宗親) 및 공신(功臣)에게 구종(驅從)으로 나누어 주던 관노비(官奴婢).
  • [註 843]
    의사(疑似) : 비슷하여 분간하기가 어려움.

○辛丑/命召委官及義禁府堂上于賓廳。 使鞫任光載。 御書十條下問:

一, 姜諶守非存今皆服招, 卿何不對以實耶? 一, 末乙非注沙里余今石今叔只乃斤乃繼同等, 皆已服招, 卿何不服? 一, 楊澹家切隣有見卿者, 卿何不服? 一, 卿之宣淫, 駙馬中之第一, 卿之有良妾, 明矣。 卿何不服? 一, 送幣亦甚明白, 何爲不服? 一, 問事郞廳獨斷此事耶? 何不思之甚歟? 一, 自古箠楚, 非欲取誣服, 制其不服, 卿何以言誣服乎? 一, 大伊謀殺公主, 亦是卿故, 而不自驚悔, 反效奸人, 可乎? 一, 卿言: ‘聖上何疑其不信?’ 獄官, 誰恤其曖昧? 此獄誰所爲者, 而乃發此言耶? 一, 叔只率行, 亦是不法, 卿諱此事, 是無君無國矣。 何不服招乎?

又以言傳于光載曰: "卿年三十, 宜知事理, 而何敢對之如是耶? 是上不有大妃, 下不有寡躬也。 雖愚劣之人, 若開陳是非, 則亦且解惑自服, 卿何不服, 而自懷憤怒, 對之如是耶? 卿意以爲: ‘我是駙馬, 豈用刑訊耶?’ 以此不服爾, 何論刑訊, 然後知其情乎? 卿勿固諱, 宜卽直招。" 又傳委官等曰: "凡事干人招辭, 說與光載。" 光載對曰: "下問時不卽直啓者, 臣實靦面難言, 且意其終或得免故耳。 其不對於憲府者, 前旣諱於上問, 而反服於公緘, 於義不安, 故不對耳。 臣實有此事。 去三月間往大伊家, 見一幼女, 遂與私焉, 欲爲久遠之計, 使奴李致、丘史叔只, 往贈紗羅叚子于其家, 以通丁寧之意。 臣伏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閭巷小民, 無不知敬其君, 臣雖無狀, 二十年侍朝, 特蒙上恩, 豈敢固諱, 重勞上問乎?" 傳曰: "卿今直言, 可謂是矣。 但其間節次, 悉陳無隱。" 光載乃供招訖。 傳曰: "大槪則同, 但二三處, 稍有違戾。"

【史臣曰: "光載之獄, 多涉疑似, 而上一承大妃之敎, 嚴勑委官, 委官等惶恐顚倒, 構成其獄, 識者莫不深嘆。"】


  • 【태백산사고본】 47책 29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560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윤리-강상(綱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