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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89권, 성종 25년 4월 28일 병술 1번째기사 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허침 등과 윤호의 관직 개정과 흥복사 불사의 처벌 문제 등에 대해 논쟁하다

사헌부 대사헌 허침(許琛) 등과 사간원 대사간 윤민(尹愍) 등이 와서 아뢰기를,

"인군(人君)이 대신을 중하게 여긴다면 사람들이 그 힘을 다할 것이요, 그 거취(去就)를 가볍게 여긴다면 만물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대신을 가볍게 나아오고 물러가게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진실로 성상의 유시(諭示)와 같을지라도 어진 자는 좋지마는, 그가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속히 바꾸는 것이 낫습니다.

바야흐로 이임보(李林甫)429) 가 재상이 되었을 적에 장구령(張九齡)의 말을 듣고서 이를 물러가게 하였다면, 어찌 천보(天寶) 연간(年間)의 반란430) 이 일어났겠습니까? 왕안석(王安石)431) 이 재상이 되었을 적에 여회(呂誨) 등 여러 어진이의 말을 채용하여 그를 물러가게 하였다면, 어찌 정강(靖康)의 변(變)432) 이 일어났겠습니까? 《시경(詩經)》433) 에 이르기를, ‘그 재상을 신중히 생각한다.’고 하고, 《맹자(孟子)》434) 에 이르기를, ‘나라의 임금이 어진이를 나아오게 할 적에는 부득이하여 그리하는 것같이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정승을 고를 적에 처음에 삼가지 아니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어진지의 여부도 물어보지 아니하고, 혐의스럽고 어려운 관계도 피하지 아니하며, 가까운 친척의 용렬한 사람을 정승으로 삼고, 곧 말씀하시기를, ‘대신의 나아오고 물러가는 것을 가볍게 할 수가 없다.’고 하시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윤호의 재주가 비록 난(亂)을 일으킬 만하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의논을 어기고 알맞지 않은 사람을 정승으로 삼아 후세의 폐단을 끼치고 난을 일으킬 조짐을 여는 것이 반드시 전하로부터 시작되지 아니한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인(婦人)이란 절개를 지키는 부인을 호칭하는데,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자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모두 상(喪)에 그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 그 정성을 다하고, 예를 어기지 아니하고, 법을 어기지 아니하며, 곧고 바르게 홀로 거처하면서 한평생 슬퍼하고 흠모할 뿐인데, 예법을 멸시하여 버리거나, 좌도(左道)435) 를 숭상하거나 남녀(男女)의 분별을 어지럽혀서, 설독(褻瀆)의 혐의스러움을 일으키면서까지 그 지아비에게 정성을 다하는 자가 어찌 있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부인도 오히려 또 그러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지친(至親)으로서 존귀하기가 〈대군〉 부인과 같은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지친인 까닭으로 특별히 인자하심을 베풀어서 차마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신 등이 감히 다시 청하는 것인데, 다만 부인의 죄를 청하는 것은 이로써 풍속 교화를 바로잡아서 후세 사람들을 징계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아울러 나머지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승도(僧徒)와 부녀자들도 또한 모두 지친이기 때문입니까? 이것은 부인을 칭탁하여 추국하지 아니하려는 것입니다. 법은 폐지할 수가 없고, 죄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의정을 내가 어찌 중궁(中宮)의 아비라고 하여 삼았겠는가? 경 등이 비록 이임보(李林甫)·왕안석(王安石)으로써 이를 말하지만, 우의정이 어찌 이임보·왕안석과 같은 지경에 이르겠는가? 비록 우의정에 재주가 없다고 하나, 대저 사람이 세상에 행동하는 데 어찌 반드시 다 재능이 있은 다음이라야 좋겠는가? 지금 헌부의 관원들도 또한 반드시 다 문장과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다. 만약 불초(不肖)한 정상이 없는데다가 또 허물이 없다면 좋은 것이다. 대신의 나아오고 물러가는 것을 어찌 한 사람의 말로써 가볍게 이를 처리할 수가 있겠는가?

또 부인의 일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경 등이 부녀자들을 추국하자고 청하는 것은 부인을 미워하여 그를 죄주고자 하는 말이다. 어찌 주장한 사람을 내버려 두고 수종한 사람들을 죄줄 수가 있겠는가? 부인은 지친(至親)이므로, 이러한 일을 가지고 문득 그 죄를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옛날에 큰 죄가 있으면, 비록 지친이라 하더라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더하였지만, 지금 부인의 죄는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아니하였다. 남녀가 뒤섞여 있었던 것을 경(卿) 등이 친히 본 일이 아니며, 반드시 서로 사이를 두고서 자리하였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은 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서 마땅히 볼 것이다. 지금의 일도 볼 것이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다투는 것같이 하는 것은 곤란하다."

하였다. 대간이 또 아뢰기를,

"신 등이 이임보·왕안석의 일을 가지고 이를 말한 것은 당시의 인주(人主)가 만약 장구령(張九齡)·여회(呂誨) 등의 말을 들었더라면 난세(亂世)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 명황(明皇)436) ·송 신종(神宗)은 대신을 가볍게 나아오고 물러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낭패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신 등이 이로써 말씀드렸으니, 전하께서는 들어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의 이른바 재주라고 하는 것은 문장(文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총명하고 강직하고 굳세며 일을 잘 계획하는 것을 말합니다. 윤호의 재주와 기량이 어찌 이것을 담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흥복사(興福寺)의 일은 〈대군〉 부인인 까닭에 그 수종한 사람들을 죄주려고 하지 아니하시는데, 그 밖의 부녀자들도 또한 각각 스스로 그 죄를 범하였으며, 이른바 남녀가 뒤섞여 있었다는 것은 반드시 부녀자들이 승방(僧房)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승인(僧人)들이 부녀자의 방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휘장과 발[簾]로 사이를 막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뒤섞여 있었다고 이를 만한데, 하물며 보통 사람들의 부인이라면, 어찌 서로 난잡하게 행동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면절 정쟁(面折廷諍)437) 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옳다고 말하더라도 대간이 그르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말은 진실로 ‘서로 다투는 것 같아서 곤란하다.’고 이르는 것이지만, 옳은 것은 들어주기를 기필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왕안석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사마광(司馬光) 같은 이도 왕안석을 진용(進用)할 만하다고 하였는데, 청묘(靑苗)의 법438) 을 만들어서 천하를 그르치게 만든 다음에야 천하에서 모두 이를 알게 되었다. 우의정이 비록 재주가 없다.’고 하지만, 어찌 후일에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알겠는가? 사람들의 말을 가지고 가볍게 그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 경 등이 남녀가 뒤섞여 있었다고 말하지만, 부인이 무차 대회(無遮大會)439) 를 베풀고 부녀자들로 하여금 바람에 몰리듯이 저절로 몰리게 하였으니, 이것도 과연 잘못인가? 그러나 어찌 이 일을 가지고 부인을 죄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간이 또 아뢰기를,

"왕안석사마광뿐만 아니라 온 천하가 모두 어질다고 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어지럽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윤호를 모두 어질지 않다고 생각하므로, 정승을 제배(除拜)하는 날에 민심이 흡연(洽然)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그를 시험해 보아서 능하지 못한 다음에야 이를 물리치겠습니까? 부녀자들이 절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한 것이 이미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데, 부인은 죄를 주기가 어려운 점이 있지만, 만약 아울러 부녀자들도 추국하지 아니한다면, 아마 법이 이로부터 허물어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 등이 내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왕안석이 처음에는 천하에서 모두 어질다고 하였으나, 끝내 천하를 패망하게 하는 지경에 이를 줄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 우의정이 어질지 못하다고 하지만, 어찌 후일에 그 직임에 능히 알맞을는지 알겠는가? 경 등은 왕안석이 처음에는 비록 어질다고 하였으나, 곧 천하를 그르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우의정은 처음부터 또한 어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 뜻은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 직임을 맡겼는데, 어찌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가볍게 진퇴(進退)시킬 수가 있겠는가? 또 부인들이 각각 그 죄를 범하여 어찌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시키는가라고 하지만, 죄가 있는 자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죄가 없는 자를 추국하여야 할 터인데, 이를 물건에 비교하면, 말쌀[斗米]을 하나의 소반에 담는 꼴이니, 악한 자를 골라서 없애려고 하면, 마땅히 그 착한 자들을 아울러서 동요시킨 다음에야 바야흐로 그 악한 자를 알아내어 없앨 수가 있는 것이다. 죄가 있는 사람을 잡고자 하다가 아울러 죄가 없는 자를 죄준다면, 이것이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289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513면
  • 【분류】
    역사-고사(故事) / 사상-불교(佛敎)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註 429]
    이임보(李林甫)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
  • [註 430]
    천보(天寶) 연간(年間)의 반란 : 당(唐)나라 현종(玄宗) 연간에 일어난 안록산(安祿山)의 난과 사사명(史思明)의 난(亂)을 말함. 당나라는 이때부터 쇠망기로 접어들어 멸망하였음. 천보 연간은 당나라 현종 때 742∼755.
  • [註 431]
    왕안석(王安石) :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재상.
  • [註 432]
    정강(靖康)의 변(變) : 송(宋)나라 흠종(欽宗) 정강(靖康) 2년(1127)에 금(金)나라의 침입을 받아 서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송나라 황제 휘종(徽宗)·흠종 부자(父子)와 많은 관리들이 여진족에게 사로잡혀간 사건. 이 사건으로 북송(北宋)은 멸망하고 남송(南宋)이 서게 됨.
  • [註 433]
    《시경(詩經)》 : 대아(大雅)편 상유(桑柔).
  • [註 434]
    《맹자(孟子)》 : 양혜왕(梁惠王)편 하(下).
  • [註 435]
    좌도(左道) : 유교 이외의 다른 교리. 곧 이단(異端).
  • [註 436]
    당 명황(明皇) : 현종(玄宗).
  • [註 437]
    면절 정쟁(面折廷諍) : 임금 앞에서 그 실책을 들어 시비(是非)를 쟁론함.
  • [註 438]
    청묘(靑苗)의 법 : 왕안석(王安石)이 실시한 신법(新法)의 하나. 매년 봄·가을철에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2품의 이자를 받고 곡식을 빌려 주던 제도.
  • [註 439]
    무차 대회(無遮大會) : 성범(聖凡)·도속(道俗)·귀천(貴賤)·상하(上下)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하는 대법회.

○丙戌/司憲府大司憲許琛等、司諫院大司諫尹慜等來啓曰: "人君重大臣, 則人盡其力, 輕去就則物不自安, 此大臣之所以不可輕爲之進退也, 誠如聖諭。 然賢者則可, 如其不然, 不如速改之爲愈也。 方林甫之相也, 聽九齡之言而退之, 則安有天寶之亂? 安石之相也, 用呂誨諸賢之言而退之, 則安有靖康之變乎? 《詩》曰: ‘考愼其相。’ 孟子曰: ‘國君進賢, 如不得已。’ 此言擇相之不可不謹於初也。 今則不然, 不問賢否, 不避嫌難, 以近戚庸材, 立以爲相, 而乃曰: ‘大臣進退, 不可輕。’ 不亦誤乎? 尹壕之才, 雖不足以致亂, 違衆議相匪人, 貽後世之弊, 開致亂之漸, 未必不自殿下始耳。 古今婦人號稱節婦, 而垂名於後代者不爲不多, 皆喪盡其哀, 祭盡其誠, 不違於禮, 不愆於法, 貞正獨處, 終身悲慕而已, 安有蔑棄禮法, 崇尙左道, 混男女之別, 致褻瀆之嫌, 而盡誠於其夫者哉? 常人之婦猶且不可, 況至親尊貴如夫人者乎? 殿下以至親之故, 特垂仁慈, 不忍致法, 臣等不敢更請, 而只請婦人之罪者, 欲以正風化而懲後人耳。 殿下竝護餘人何也? 僧徒、婦女, 亦皆至親歟? 此則托以夫人而不欲推鞫也, 法不可廢, 罪不可赦。" 傳曰: "右議政, 予豈以爲中宮之父而爲之哉? 卿等雖以李林甫王安石言之, 然右議政豈至如林甫安石哉? 雖以右議政爲無才, 然大抵人之行於世, 何必盡有才能然後可耶? 今憲府之官, 亦不必盡有文章材能也, 若無不肖之狀, 而又無痕咎則可矣。 大臣進退, 豈可以一人之言而輕爲之哉? 且夫人之事, 予非以爲是也。 卿等請推婦女者, 是憎夫人而欲罪之辭也, 然豈可捨主張之人而罪隨從之人哉? 夫人至親也, 不可以此事輒加其罪也。 古有大罪, 則雖至親亦且涕泣而加罪, 今夫人之罪, 不至是也。 男女混處, 非卿等親見之事, 必相隔而處矣。 君臣得失, 筆之於史, 後世當觀之矣。 以今觀之, 君臣若相爭難矣。" 臺諫又啓曰: "臣等以林甫安石之事言之者, 以當時之主若聽張九齡呂誨等之言, 則不至於亂, 明皇神宗以爲大臣不可輕易進退, 故終至於敗, 臣等以言殿下不可不聽也。 臣等之所謂才者, 非以文章言也, 乃聰明剛毅設施之謂也。 尹壕之才器, 豈能當此乎? 興福寺事, 非欲以夫人之故而罪其從人, 其他婦女亦各自犯其罪矣。 所謂男女混處者, 非必婦女歸僧房, 僧人歸婦女之房而後可也。 雖隔帷簾, 亦可謂混處也。 況常人之婦, 則豈不相雜而行乎? 古人言面折廷諍, 又言人主曰是, 臺諫曰非, 如此等辭, 固謂若相爭難然, 可也, 所以期於必聽而至於如此也。" 傳曰: "王安石, 一時人皆以爲賢, 而至如司馬光亦以安石爲可進用, 至作靑苗之法, 以誤天下, 然後天下皆知之。 右議政雖曰無才, 安知後日能堪其任耶? 不可輕以人言退之。 卿等以男女混處爲言, 夫人設無遮大會, 使婦女風靡, 此果非矣。 然豈可以此事而加罪夫人乎?" 臺諫又啓曰: "安石非獨司馬光, 擧天下皆以爲賢, 而終至於亂天下。 今尹壕皆以爲不賢, 而拜相之日, 民心未有洽然, 何必試之而不能, 然後退之耶? 婦女上寺之禁, 已載《大典》, 夫人則在所難罪, 若竝與其婦女而勿推, 則恐法從此毁矣。" 傳曰: "卿等未曉予意。 安石, 初則天下皆以爲賢, 而不知終至於敗天下。 今以右議政爲不賢, 然安知後日能稱其職耶? 卿等以謂安石初雖以爲賢, 乃至於誤天下, 況右議政初亦不以爲賢者乎? 然予意則不然。 任人以職, 豈可以一人之言而輕爲進退耶? 又以謂, 婦人各犯其罪, 何以感傷和氣? 然欲得有罪, 必竝推無罪者, 比之於物, 以斗米盛於一盤, 而欲擇去其惡者, 當幷其善者而動搖之, 然後方可得其惡者而去之, 欲得有罪之人, 而竝罪其無罪者, 則斯非感傷和氣乎?"


  • 【태백산사고본】 46책 289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513면
  • 【분류】
    역사-고사(故事) / 사상-불교(佛敎)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