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판서 성현이 문교와 예술에 대해 진술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성현(成俔)이 글로 아뢰기를,
"근일의 전지(傳旨)에, ‘관상감(觀象監)·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는 본래 사족(士族)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 내의원(內醫院) 이외는 문관과 무관의 반열(班列)에 넣지 말라.’ 하셨는데, 신은 천문(天文)·지리(地理)·복서(卜筮)·의약·통역 등의 일체의 잡술(雜術)은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중에서 하나도 빼어 놓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제학(諸學)을 동반(東班)의 직임(職任)으로 삼고 과거(科擧) 제도까지 설치한 것은 그 임무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종(世宗)께서는 이미 문교(文敎)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또 잡예(雜藝)에도 뜻을 두었기 때문에, 당시에 인재가 많이 나왔으며 혹 그중에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학(諸學)으로 이름이 있는 자는 모두 이미 늙어서 채용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외방(外方)의 한미(寒微)한 무리들로서 문관이나 무관의 벼슬을 얻지 못한 자가 오직 삼사(三司)에 소속되어 이름을 걸어놓고 그 음덕(蔭德)이 자손에게 끼쳐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인데, 논밭도 없고 따라다니는 하인도 없이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고 있어서 고생스러움이 막심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 잡류(雜類)라고 논정(論定)한다면 비록 참상관(參上官)이라 하더라도 혹 논핵(論覈)을 당할 경우 법관이 곧 잡아다가 문초할 것이고, 직위가 3품에 오른 자가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며, 이와 같다면 사람들이 다 흩어져버릴 것이니, 누가 즐기어 소속(所屬)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더욱이 내의원과 혜민원은 업무상 피차간 차이가 없으니, 어찌 구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예전 그대로 두소서. 신이 분수에 넘치게 성상의 은혜를 입어 예관(禮官)으로 대죄(待罪)하고 있으니, 맡은 바 문교(文敎)와 예술의 일에 생각한 바가 있으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기에, 권장하고 인도할 방도를 다음에 조목조목으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1. 제학(諸學) 중에서 역어(譯語)가 더욱 정밀하지 못하여, 매매(買賣)할 때 쓰는 일상어(日常語)도 오히려 능히 통달하지 못하니,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에 전하는 말이 어긋나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근년에 제조(提調)들은 거의가 다 그 말을 알지 못하여 취재(取才)할 때 그 무리에게 맡기므로 인정을 쓰고 사사로움을 따르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어찌 국가에서 법을 만든 뜻이겠습니까? 금후 제조는 한어(漢語)를 해득한 자로 임명하소서.
1. 역관을 취재(取才)할 때 경서와 사기를 강론하는데 먼저 깊은 뜻을 물으면서도 한어(漢語)의 자훈(字訓)을 묻지 아니하고,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 등의 책은 다만 배송(背誦)하게만 하고 그 뜻을 묻지 아니하니, 심히 불가합니다. 금후는 《사서(四書)》와 경사(經史)는 한어로 음(音)을 읽은 뒤에 주소(註疏)의 깊은 뜻을 묻고, 《노걸대》 등의 책은 배송한 뒤에 반복해서 힐난하여 물어야 할 것입니다.
1. 왜학(倭學)과 여진학(女眞學)을 취재함에 있어서는 다만 글자만 쓰게 하므로 과거를 보는 자는 한갓 글자 획만 익히며, 제조는 다만 글자 획에만 의해서 참고하고 말의 음(音)은 전혀 강문하지 아니하니, 그 합격자는 말 한 마디도 알지 못하고 국록을 받게 되므로 조정을 기만함이 심합니다. 금후로는 삼학(三學)1309) 도 또한 그 말로 번역하게 하고, 《노걸대》·《박통사》로 취재할 때에는 강문(講問)에다 글자 쓰는 것을 겸해서 한다면 두 가지를 온전하게 해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1. 《역어지남(譯語指南)》은 다만 명물(名物)만 기록하고 그 자세한 것은 다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날마다 쓰는 보통 말도 또한 다 분류해서 첨가하여 기입해야 할 것입니다. 왜어(倭語)와 여진어(女眞語)도 또한 한어와 같이 지남(指南)을 만들어서 처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익히게 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관상감 등의 관원(官員)을 문관과 무관의 예(例)로 논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하냐를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이극배(李克培)가 의논하기를,
"전의감과 혜민서는 질병을 다스리고, 관상감을 천문을 살피고, 사역원(司譯院)은 화어(華語)를 전하고, 율학(律學)과 산학(算學) 또한 모두 빼어 놓을 수 없는 임무입니다. 이 때문에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중히 여겨 문관과 무관의 두 반열에 넣었는데, 지금은 다 그렇지 아니하여 단지 내의원과 내시부(內侍府) 등만 문관과 무관의 반열에 참여하니, 이것이 잡학인(雜學人)이 통분해 하는 까닭입니다."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잡학인(雜學人)이 문관과 무관의 반열에 참여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만일 잡직(雜職)이라고 논하면 누가 즐기어 입속(入屬)하여서 그 업(業)을 힘써 익히겠습니까? 이 법은 결코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철견(李鐵堅)·한치형(韓致亨)·정문형(鄭文炯)·유지(柳輊)·신준(申浚)·윤효손(尹孝孫)·정경조(鄭敬祖)·김극유(金克忸)·신수근(愼守勤)·박원종(朴元宗)은 의논하기를,
"대저 조종(祖宗)의 법은 가볍게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유없이 강등하여 잡직(雜職)으로 하여 옛법을 어지럽히고 인망(人望)을 잃는다면 지극히 미편(未便)할 것이니, 예전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박숭질(朴崇質)은 의논하기를,
"《속록(續錄)》의 이 조항은 본래 제도(諸道)의 감사(監司)가 형신(刑訊)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 있으므로 설정한 것입니다. 《대전(大典)》에 승음(承蔭)은 처음에 서로 방해가 되지 않았으니, ‘승음 인잉(承蔭因仍)’의 문귀도 아울러 기재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고, 이육(李陸)·권정(權侹)·신종호(申從濩)는 의논하기를,
"의관·역관 등의 관원은 비록 사족(士族)이 아니나, 3품 이상은 음덕이 자손에 미치게 된 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법을 범한 바가 있다고 해서 유사(有司)가 갑자기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미안한 듯합니다. 또 그 자손은 승음(承蔭)한 연고로 해서 모름지기 계품(啓稟)하여 형신(刑訊)하고 그 자신은 잡직으로 논해서 다시 계품하지 아니하니, 사체(事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예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28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396면
- 【분류】신분-중인(中人) / 어문학(語文學) / 사법-법제(法制) / 과학(科學) / 의약-의학(醫學)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註 1309]삼학(三學) : 중국어·일본어·여진어.
○禮曹判書成俔書啓曰:
近日傳旨, 觀象監、司譯院、典醫監、惠民署, 本非士族人, 內醫院外勿齒文武官。 臣意以爲, 天文、地理、卜筮、醫藥、譯語一切雜術, 莫不有補於治道, 闕一不可, 自祖宗朝以諸學爲東班之職, 至設科第, 所以重其任也。 世宗旣重文敎, 又致意於雜藝, 當時人材輩出, 或拔其尤而擢用之。 今也, 諸學有名者, 皆已年老, 將來無可取之人。 外方寒素之輩不得文武官者, 惟屬三司, 冀占姓名, 垂蔭子孫, 無田莊趨卒, 長留於京, 艱苦莫甚。 今皆以雜類論定, 雖參上員, 如或被覈, 法官直拿來推訊, 職陞三品者, 蔭不及子孫如此, 則人皆解體, 孰肯求屬? 況與內醫院, 業無彼此, 豈可區別? 請仍舊。 臣謬蒙上恩, 待罪禮官, 所掌文敎藝術之事, 有懷不敢不達, 勸導之方, 條陳于後。 一, 諸學中譯語尤不精, 買賣常語, 尙不能通曉, 其於天使接待時, 傳語不差者有幾人哉? 近年提調, 類皆不知其語, 取才時委諸其徒, 不無用情徇私之弊, 豈國家設法之意? 今後提調以解漢語者任之。 一, 譯官取才, 講論經史, 先問深意, 不問漢語字訓, 至如《老乞大》、《朴通事》等書, 只令背誦, 不問其義, 甚爲不可。 今後四書經史, 以漢語讀音後, 方問註疏深意, 《老乞大》等書, 背誦後反覆詰問。 一, 倭、女眞學取才, 只令寫字, 故擧子徒習字畫, 提調只憑字畫而考之, 語音則全不講問, 其入格者不知一語而受祿, 欺罔朝廷甚矣。 今後三學, 亦以其語飜譯《老乞大》、《朴通事》, 取才時, 講問兼用寫字, 則兩全而無弊。 一, 《譯語指南》只錄名物, 未盡其詳, 其日用常語, 亦皆分類添入, 倭、女眞之語, 亦依漢語作指南, 令初學之士習之。
傳曰: "觀象監等官, 以文武例論當否, 其議于大臣。" 李克培議: "典醫監、惠民署治疾病, 觀象監察天文, 司譯院傳華語, 律學、算學亦皆不可闕之任。 以此自祖宗朝重之, 列於文武兩班, 今皆不然, 而獨內醫院、內侍府等, 與於文武班, 此雜學人所以痛憤也。" 許琮議: "雜學之人, 班於文武官, 其來已久, 今若論以雜職, 誰肯入屬勉習其業? 此法決不可行。" 李鐵堅、韓致亨、鄭文炯、柳輊、申浚、尹孝孫、鄭敬祖、金克忸、愼守勤、朴元宗議: "大抵, 祖宗之法, 不可輕改, 今無故而降爲雜職, 以亂舊章、以失人望, 至爲未便, 仍舊何如?" 朴崇質議: "《續錄》此條, 本因諸道監司刑訊有妨而設也。 於《大典》, 承蔭則初不相妨, 承蔭因仍之文, 幷載爲便。" 李陸、權侹、申從濩議: "醫譯等官, 雖非士族, 然三品以上蔭及子孫, 其來已久。 一有所犯, 有司遽加刑訊, 恐爲未安。 且其子孫, 則以承蔭之故, 須啓稟刑訊, 其身則論以雜職, 不復啓稟, 有妨事體。" 傳曰: "仍舊可也。"
- 【태백산사고본】 44책 282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396면
- 【분류】신분-중인(中人) / 어문학(語文學) / 사법-법제(法制) / 과학(科學) / 의약-의학(醫學)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