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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76권, 성종 24년 4월 13일 정미 2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경연에 나아가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윤장(尹璋)이 아뢰기를,

"최부(崔溥)가 비록 군명(君命)을 받았다 하더라도 바야흐로 곡벽(哭躄)하는 가운데 있는데, 머문 지 8일이 되었으나 곧바로 분상(奔喪)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미 대절(大節)을 잃었습니다. 비록 외관(外官)이라 하더라도 쓸 수가 없는데, 하물며 근시(近侍)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이는 보통 일이 아니고, 군명 때문에 오래 머물게 된 것일 뿐입니다."

하자, 윤장(尹璋)이 말하기를,

"일기(日記)를 수찬(修撰)하는 것은 단지 하루이틀의 일인데, 8일이 되도록 머물면서 분상(奔喪)하지 아니하고, 친구[朋友]들과 태연 자약(泰然自若)하게 대화(對話)하였습니다. 충신(忠臣)은 효자(孝子)의 가문(家門)에서 구한다 하였으니, 최부는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친구를 접대했다면, 과연 잘못이다. 본직(本職)을 갈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여자신(呂自新)이 아뢰기를,

"영안도(永安道) 연변(沿邊)에 사는 백성은, 겨울철에는 거진(巨鎭)에 입보(入保)320) 하는데,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모두 소농보(小農堡)321) 에 그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작은 보(堡)322) 에도 이미 수호군(守護軍)이 있고, 거진과 거리가 매우 멀지 아니하니, 만약 변란(變亂)이 있어도 오히려 구원이 미칠 만합니다. 아오지(阿吾地)에서 무이보(撫夷堡)까지는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무이보의 백성이 아오지에 입보(入堡)하니, 백성은 많고 집은 수용(收容)할 수가 없기 때문에 흙집을 만들어 삽니다. 청컨대 무이보에 성자(城子)를 낮고 작은 곳에 더 쌓아서 그대로 머물면서 방어(防禦)하여 폐단을 제거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윤필상이 대답하기를,

"이는 여자신의 목도(目覩)한 일이니, 신은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이 만약 고통스러워한다면 정원(情願)을 물어서 아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여자신이 또 아뢰기를,

"삼수(三水)갑산(甲山)은 겨울철에 눈이 깊이 쌓인 때에는 오랑캐들이 올 수가 없지만, 여름철에는 방어(防禦)가 가장 긴요합니다. 지금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가 북청(北靑)에 있는데, 갑산(甲山)과 거리가 멀어서 변을 듣고 가서 구원하려면, 연로(沿路)의 관역(館驛)에서 지공(支供)하는 데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이로 인하여 도망하여 흩어지기도 합니다. 만약 북청진(北靑鎭)갑산으로 옮기면 이러한 폐단은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전자(前者)에 성준(成俊)도 이 일을 아뢰어 이미 의논했습니다. 조종(祖宗)께서 북청에 진을 설치한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니, 어찌 한갓 사변(事變) 때문에 왕래(往來)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여자신은 말하기를,

"성대기(聖代岐)에 역관(驛館)의 옛 터가 있는데, 부방(赴防)하는 군졸(軍卒)들은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갑산(甲山)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적로(賊路)와 가까와서 적이 기회를 틈타 몰래 나타나니, 진실로 염려할 만합니다. 청컨대 금창보(金昌堡)를 여기에 옮겨서 방비를 굳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기에 있으면서 멀리 헤아리는 것이 옳지 않다."

하였다. 여자신이 말하기를,

"무이(撫夷)로부터 경흥(慶興)을 지나 조산보(造山堡)에 이르기까지 90여 리가 되니, 장성(長成)을 쌓는 공역(功役)이 지극히 무거울 것입니다. 다만 무이로부터 경원(慶源)에 이르기까지는 10리이고, 아래에는 야춘해(耶春海)가 있는데,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들어갔으며, 두만강(豆滿江)과의 거리가 육지(陸地)로 겨우 30리입니다. 청컨대 여기에 장성을 쌓아서 조산보를 동쪽 머리에 옮기고, 경흥을 중앙에 옮겨 무이와 잇달아 배치(排置)하면 10리 사이에 영진(營鎭)이 죽 늘어서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의 토지(土地)가 평평하고 넓고 기름진데다가 해산물(海産物) 또한 많으니, 백성들은 낙토(樂土)를 얻게 되어 방수(防戍)하기가 가벼워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다시 편부(便否)를 의논하여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여자신이 말하기를,

"북도(北道)는 매우 추운데도 면서(綿絮)가 없으므로, 연대군(煙臺軍)323) 이 포의(布衣)를 입고 밤이 새도록 경계하니, 진실로 가련하고 민망합니다. 청컨대 납의(衲衣)를 만들어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수를 헤아려서 지어 보내도록 하라."

하자, 윤필상이 이르기를,

"영안도 뿐만 아니라 평안도(平安道)의 봉수군(烽燧軍)에게도 지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시초만 열어놓고, 힘이 계속할 수가 없으면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헌납(獻納) 권주(權柱)가 아뢰기를,

"신(臣)이 부경(赴京)하였다가, 돌아올 때 요동 호송인(遼東護送人)이 사라 능단(紗羅綾段)을 많이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신이 묻기를, ‘무슨 물건을 사고자 하는가?’ 하니, ‘암말[牝馬]입니다.’하였습니다. 그 값을 물으니, ‘비단 한 필입니다.’하므로, ‘너희 나라의 말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중원(中原)의 말과 교합(交合)하면 큰 말을 낳게 되어 매우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비록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제마음대로 호시(互市)324) 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데, 더구나 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비록 금령(禁令)을 둔다고 하더라도 이(利)가 무겁기 때문에, 몰래 서로 교시(交市)325) 할 것입니다."

하고, 권주(權柱)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암말 값은 면포(綿布) 5, 6필에 지나지 않는데, 단자(緞子)로 한 필을 얻는다면, 이익(利益)이 갑절이나 되기 때문에, 법(法)으로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동(遼東) 사람들이 의주(義州) 사람과 왕래(往來)하면서 인리(隣里)와 같이 교제(交際)합니다. 그러나 평안도(平安道)는 일이 번거롭고 부역(賦役)이 무거운데다가 중원(中原)은 일이 없기 때문에 모두 도망해 가고자 합니다."

하고, 여자신(呂自新)은 말하기를,

"영안도(永安道)오진(五鎭)326) 의 백성들이 마소[牛馬]와 철물(鐵物)을 가지고 야인(野人)에게서 피물(皮物)을 수매(收買)하며 스스로 아까와하지 아니하니, 청컨대 일체 금하도록 하시고, 또 진상(進上)하는 피물을 감(減)해 주소서."

하고, 특진관 한치례(韓致禮)는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북정(北征) 때에 올적합(兀狄哈)의 집에 우리 나라의 농기(農器)가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피물(皮物)로써 수매(收買)한 것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매(賣買)를 금하는 것은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죄를 무겁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권주가 말하기를,

"비록 철물(鐵物)을 금한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 사람으로 부경(赴京)하는 자가 부시[火燧]를 많이 가지고 가서 달자(㺚子)와 서로 매매(買賣)합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쌓여서 많아지면, 개갑(鎧甲)327)시촉(矢鏃)328) 을 모두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은(銀)은 값이 비싸고 이익이 갑절이나 되기 때문에 금령을 무릅쓰고 가지고 가서 비싼 값으로 팔고 옵니다. 청컨대 금지할 것을 신명(申明)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법이 있는데, 부사(副使)를 시켜서 만약 금하지 못한다면, 법을 고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권주가 또 아뢰기를,

"중국(中國)에서 우리 나라 사람을 오랑캐로 업신여기지 아니하는 것은 의관(衣冠)과 예모(禮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통사(通事)들이 의주(義州)에 도착하면, 의관을 버려두고 편복(便服)으로 가며, 북경[京師]에 이르러 반열(班列)을 따를 때에도 찢어진 모자(帽子)를 빌어서 쓰니, 자못 의용(儀容)이 없습니다. 이후로 부경(赴京)하는 자는, 청컨대 의관을 갖추고 가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여금 고찰(考察)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27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9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법제(法制)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윤리-강상(綱常) / 군사-휼병(恤兵)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부방(赴防) / 과학-지학(地學) / 물가-물가(物價)

  • [註 320]
    입보(入保) : 변방(邊方)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적이 침입(浸入)하면, 성(城)과 보(堡) 안으로 들어가서 보호받으며 피하던 일.
  • [註 321]
    소농보(小農堡) : 농사를 짓는 들판에 있는 보(堡).
  • [註 322]
    보(堡) : 변방(邊方) 지역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흙을 쌓은 소규모의 작은 성(城).
  • [註 323]
    연대군(煙臺軍) : 조선조 세종 때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 지대에 설치한 봉수대(烽燧臺)에서 수자리하던 군인. 적이 나타나면 연기와 횃불로 다른 연대에 알리고, 신포(信砲)를 쏘아 인근 주민들에게 알려서 성(城)이나 보(堡)에 들어가 피하게 하였음.
  • [註 324]
    호시(互市) : 외국과 교역(交易)을 행하던 무역장(貿易場). 일본의 상인(商人)과는 남쪽의 해안 포구(浦口)에서, 여진(女眞)의 거래자와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변경에서 교역을 행하였음.
  • [註 325]
    교시(交市) : 호시(互市).
  • [註 326]
    오진(五鎭) : 경원(慶源)·회령(會寧)·종성(鍾城)·경흥(慶興)·온성(穩城) 등 다섯 고을을 말함.
  • [註 327]
    개갑(鎧甲) : 갑옷.
  • [註 328]
    시촉(矢鏃) : 화살촉.

○御經筵。 講訖, 持平尹璋啓曰: "崔溥雖承君命, 方在哭躄之中, 逗留至八日, 不卽奔喪, 其大節已失, 雖外官不可用也, 而況於近侍乎?" 上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此非平常事也, 以君命留連耳。" 曰: "修日記只一, 二日事, 至留八日, 而不奔喪, 與朋友對話自若, 求忠臣於孝子之門, 不能盡孝於親, 其能盡忠於君乎?" 上曰: "若接待朋友則果非矣, 可遞本職。" 特進官呂自新啓曰: "永安道沿邊居民, 冬節入保巨鎭, 民甚苦之, 皆願仍居小農堡。 小堡旣有守護軍, 距巨鎭不甚遠, 脫有變, 猶可及救。 阿吾地撫夷堡不遠, 撫夷之民入保於阿吾地, 民多無家可容, 故設土宇以居之, 請加築撫夷城子低微處, 仍留防, 以除其弊。" 上問左右。 弼商對曰: "此自新目覩事, 臣難遙度。" 上曰: "民若苦之, 問情願以啓可也。" 自新又啓曰: "三水甲山, 冬月雪深時, 虜不得來, 夏節則防禦最緊, 今南道節度使在北靑, 距甲山遠, 聞變往救, 沿路館驛難堪支供, 因此逃散, 若移北靑鎭甲山則, 無此弊矣。" 弼商曰: "前者成俊亦啓此事, 已議之矣。 祖宗設營於北靑鎭, 必有深意, 豈徒爲事變往來哉?" 上曰: "然。" 自新曰: "聖代岐有驛館舊基, 赴防軍卒皆由此抵甲山, 地近賊路, 乘間竊發, 誠可慮也。 請移金昌堡於此, 以固防備。" 上曰: "不可在此遙度也。" 自新曰: "自撫夷慶興造山堡可九十餘里, 築長城, 功役至重, 但自撫夷堡慶源十里, 下有耶春海, 自東入西, 距豆滿江陸地纔三十里, 請築長城于此, 移造山於東頭, 慶興於中央, 與撫夷連排, 則十里間營鎭羅列, 其內土地平衍沃饒, 海産亦多, 民得樂土而防戍輕。" 上曰: "當更議便否處之。" 自新曰: "北道苦寒而無綿絮, 烟臺軍衣布衣, 徹夜坐更, 誠可憐憫, 請造衲衣分賜。" 上曰: "當量數造送。" 弼商曰: "非徒永安道, 平安道烽燧軍亦可造給, 然若開端而力不能繼, 則不可矣。" 獻納權柱啓曰: "臣赴京回還時, 見遼東護送人, 多賫紗羅綾段而來, 臣問曰: ‘欲買何物乎?’ 曰: ‘牝馬也’, 問其直曰: ‘段一匹也, 汝國馬雖小, 與中原馬交合則産大馬, 甚良。’ 臣意, 雖小物不可許擅自互市, 況馬乎?" 上問左右。 弼商對曰: "雖有禁令, 利重故潛相交市。" 曰: "我國牝馬之直, 不過綿布五、六匹, 得段子一匹則利倍, 故法不能禁。 遼東人與義州人往來交際若隣里然, 平安道事煩役重, 中原無事, 故皆欲逃去。" 自新曰: "永安道五鎭之民, 以牛馬鐵物, 收賣皮物於野人, 不自靳惜, 請一切禁之。 且減進上皮物。" 特進官韓致禮啓曰: "臣聞, 北征時兀狄哈家多有我國農器, 是必以皮物收賣也。" 上曰: "買賣之禁, 考前例重罪之可矣。" 曰: "雖禁鐵物, 我國人赴京者, 多持火燧與㺚子相販, 此雖小物, 積之旣多, 則鎧甲矢鏃皆可造, 且銀價重利倍, 故冒禁賫去, 售重貨而來, 請申明禁止。" 上曰: "旣有法矣, 使、副使若不禁之, 則改法何益?" 又啓曰: "中國不鄙夷我國人者, 以有衣冠禮貌也。 通事等到義州, 棄置衣冠, 便服而行, 及抵京師隨班時, 賃着破帽, 頓無儀容。 今後赴京者, 請令具衣冠而行。" 上曰: "當令書狀官考察。"


  • 【태백산사고본】 43책 27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9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법제(法制)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윤리-강상(綱常) / 군사-휼병(恤兵)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부방(赴防) / 과학-지학(地學) / 물가-물가(物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