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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75권, 성종 24년 3월 14일 기묘 3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물이 어느 정도인가?"

하니, 이극균이 말하기를,

"요즈음 비가 많이 와서 넘칠 정도로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건널 수 있는 여울도 더러 있으므로 도적이 다닐 만한 강 연안의 적이 다니는 길에다 함정을 파기도 하고 목책(木柵)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강물 속에 기목(機木)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게 하였습니다. 앞서 송은(宋殷)의 가구(家口)로서 잡혀간 자는 변장(邊將)들이 조처를 잘못하여 모두 성(城) 안으로 입보(入保)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름철에 농민(農民)이 들에 흩어져 있을 적에도 적변(賊變)이 있을 수 있다."

하니, 이극균이 말하기를,

"신(臣)도 그러한 점을 염려하여 강가에 풀과 나무를 베어 버려서 도적이 숨을 수 없게 하고, 또 군졸(軍卒)에게 농민(農民)을 수호(守護)하여 그러한 변에 대비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주(義州)의 성(城)은 개축(改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벽단성(碧團城)과 비교해 보면 완급(緩急)이 있으니, 신의 생각으로서는 마땅히 벽단성부터 수축한 다음에 의주성(義州城)을 수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 데서 결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경(卿)이 이미 직접 보았으니, 오는 가을에 한치형(韓致亨)과 함께 편리한 점을 살펴서 벽단성을 먼저 수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극균이 또 아뢰기를,

"평안도(平安道)의 군사(軍士)는 겨울에는 합방(合防)하고 여름에는 조방(助防)을 하는데다가, 북경(北京)에 가는 행차가 있으면 반호송(半護送)·별호송(別護送)이 있어서 휴식할 시기가 없으므로 노고(勞苦)가 막심(莫甚)합니다. 신이 생각해 보니 중원(中原)에서 애양보(靉陽堡)를 설치한 뒤에는 팔참(八站)의 길에 적변(賊變)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호송군(護送軍)은 《대전(大典)》에 의하여 초정(抄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극균이 또 아뢰기를,

"평안도가 금년(今年)에 약간 흉년이 들었다고 하나, 산에 상수리가 많으므로 주워서 먹으면 굶어 죽기까지는 하지 않을 것인데, 도망한 수졸(戍卒)이 9백여 명이고 평양(平壤)이 더욱 심하니, 이는 군법(軍法)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미 사유(赦宥)를 거쳤으므로 죄줄 수는 없으나,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엄하게 징치(懲治)하겠다고 하유(下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극균이 또 아뢰기를,

"금년에 본도(本道)에 군적(軍籍)을 고치는 일은, 절도사(節度使)는 강변(江邊)을 방수(防戍)하기 때문에 할 여가가 없습니다. 청컨대 사체(事體)를 알고 숙달된 조관(朝官)을 선택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275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8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御宣政殿, 引見平安道都元帥李克均, 克均啓曰: "聞兀狄哈, 常以爲朝鮮雖强, 豈能踰蔚地峴乎, 今北征, 深入示威, 又於高山里斬獲甚多, 虜人相謂曰: ‘兀狄哈受制如彼, 我輩豈敢當哉?’ 乃殺牛祭天誓告曰: ‘更不與朝鮮構釁, 永爲臣服。’ 自是不敢遊獵於江邊矣。" 上曰: "江水何如?" 克均曰: "近日多雨漲溢, 然或有灘可涉處, 故沿江賊路, 或鑿陷穽, 或設木柵, 或置機木於江中, 使賊不得闌入。 前者宋殷家口被擄者, 以邊將處置失宜, 不盡入保城內故也。" 上曰: "夏月農民布野時, 亦或有賊變。" 克均曰: "臣亦慮此, 於江邊芟草斫木, 使賊不得遁形, 又使軍卒守護農民, 以備其變。 且義州城不可不改築, 然比諸碧團城子, 爲有緩急, 臣意以爲, 當先築碧團, 次及義州。" 上曰: "遙制爲難, 卿已親見, 來秋與韓致亨同審便否, 先城碧團可也。" 克均又啓曰: "平安道軍士, 冬則合防, 夏則助防, 赴京之行, 有半護送、別護送, 無休息之期, 勞苦莫甚。 臣謂中原設靉陽之後, 八站之路, 頓無賊變, 護送軍一依《大典》數抄定可也。" 上曰: "可。" 克均又啓曰: "平安道, 今年雖曰小歉, 然山多橡栗, 拾而食之, 不至餓死, 而戍卒亡者九百餘人, 平壤尤甚, 此軍法不行故也。 今已經赦, 不可罪之, 然若如此, 則嚴加痛懲事下諭何如?" 上曰: "然。" 克均: "今年本道改軍籍, 節度使戍江邊, 不暇爲之, 請擇遣知事體諳練朝官。" 上曰: "可。"


  • 【태백산사고본】 43책 275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8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