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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75권, 성종 24년 3월 14일 기묘 2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이승건 등이 박곤과 예조 낭청에 자급을 더함이 옳지 않음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승건(李承健)과 정언(正言) 최연손(崔連孫)이 예조 낭청(禮曹郞廳)과 박곤(朴𦓼)에게 자급(資給)을 더해 주는 것이 마땅치 못함을 아뢰니, 임금이 좌우(左右)에 고문(顧問)하였다. 영사(領事) 허종(許琮)이 대답하기를,

"박곤은 첩의 소생[孽産]이므로 그 품직(品職)이 한계가 있는 것이며, 예조 낭청(禮曹郞廳)은 계제사(稽制司)를 제외하고는 사실 공로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옳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윤효손(尹孝孫)이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예복(禮服)은 칠장면복(七章冕服)을 갖추고 상복(常服)은 익선관(翼善冠)·곤룡포(衮龍袍)를 갖추는 것인데, 관복(冠服)의 명제(名制)와 등급(等級)이 백관(百官)과 다른 것은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긴 때문입니다. 이보다 앞서 왕세자(王世子)가 삭망(朔望)과 조하(朝賀) 때에 공복(公服)을 갖추었는데, 지금은 조복(朝服)을 갖추니, 조복(朝服)은 곧 백관(百官)들이 정조(正朝)와 동지(冬至) 때에 임금에게 조회하는 복장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백관과 구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옛 제도도 아닙니다. 이보다 앞서서는 정조·동지·생신(生辰) 때에 하례(賀禮)를 받을 적에는 왕세자는 공복을 갖추었고 백관도 공복 차림이었는데, 지금은 백관이 공복을 갖추고 왕세자(王世子)는 면복을 갖추고 있습니다. 면복은 곧 큰 제사와 경사, 그리고 정조·동지 때에 임금에게 조회하는 중복(重服)이므로 백관의 하례를 받는 데 있어서 마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보다 앞서 사부(師傅)·빈객(賓客)이 서로 모일 때는 왕세자(王世子)는 공복을 갖추고 사부·빈객도 공복 차림이었는데, 지금은 사부·빈객은 공복이고 왕세자는 익선관(翼善冠)을 갖추고 있으니, 이는 평상시의 경복(輕服)이므로, 사부·빈객과 모이는 예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이번에 상정 행례(上頂行禮)에는 왕세자(王世子)가 칠량 원유관(七梁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갖추면 옛 제도에도 부합하고 현실에도 마땅하여 아마 사체(事體)에 맞는 것입니다."

하니, 예조(禮曹)에 명하여 참작해서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27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28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의생활-예복(禮服)

○御經筵。 講訖, 掌令李承健、正言崔連孫啓禮曹郞廳及朴𦓼不宜加資, 上顧問左右, 領事許琮對曰: "𦓼孼産, 其職有限。 禮曹郞廳, 稽制司外, 果無其功。" 上曰: "臺諫之言是矣, 當依所啓。" 特進官尹孝孫啓曰: "王世子禮服具七章冕服, 常服具翼善冠袞龍袍, 冠服名制等級與百官異者, 所以貴貴也。 前此, 王世子於朔望朝賀具公服, 今則具朝服, 朝服乃百官正至朝君之服也, 非徒與百官無別, 且非古制。 前此, 正至、生辰受賀, 王世子具公服, 百官亦公服, 今則百官公服, 王世子有冕服, 冕服乃大祀、慶成、正至朝君重服也, 不宜於受百官之賀。 前此, 師傅、賓客相會, 王世子具公服, 師傅、賓客亦公服, 今則師傅、賓客公服, 而王世子具翼善冠, 乃常時輕服也, 不宜於會師傅賓客之禮。 今於上項行禮, 王世子具七梁遠遊冠絳紗袍, 則合於古而宜於今, 庶令事體矣。" 命禮曹參酌議啓。


  • 【태백산사고본】 43책 27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283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의생활-예복(禮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