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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73권, 성종 24년 1월 9일 을해 3번째기사 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의정부에서 김종직의 시호의 일로 봉상시를 국문하기를 청하다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 이원(李黿)이 불러서 물은 것을 받들어 서계(書啓)하기를,

"선비의 습속이 밝지 않은 것은 도학(道學)이 행해지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도학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사도(師道)가 전해지지 않는 데에 근원한 것입니다. 김종직(金宗直)은 비로소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正心之學]을 제창하여 후진(後進)들을 인도하여서 도와주어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이 사도(斯道)를 임무로 하고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니, 그 공은 한 일에 공적과 명예가 탁월한 자보다 도리어 현명함이 있습니다. 시법(諡法)에는 학문을 널리 닦고 견식이 많은 것[博文多見]을 문(文)이라고 하고, 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 재능이 많은 것[博聞多能]을 문(文)이라 하고, 도덕이 높고 사물을 널리 들어 아는 것[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합니다. 만약 견식이 많고 재능이 많은 것으로 이름한다면, 김종직이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자신이 사도(斯道)를 임무로 한 공(功)은 후세에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도덕이 높고 사물을 널리 들어 아는 것으로 시호(諡號)를 의논한 것입니다."

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보이고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신들은 김종직이 불초(不肖)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호를 의논함에 있어서 이르기를, ‘청렴하되 소견이 좁지 않고 온화하되 시류(時流)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덕(德)과 인(仁)에 의거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성인(聖人)의 지위에 있는 일입니다. 또 이원의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도학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사도가 전해지지 않는 것에 근원한다.’고 하였는데, 정자(程子)050) ·주자(朱子)051) ·장자(張子)052) 같은 이는 비로소 도학(道學)을 가지고 말할 수 있지만, 기타 사마공(司馬公)053) ·소강절(邵康節)054) 같은 이도 오히려 도학에 전일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김종직이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비로소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을 제창하였다.’고 하였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이 과연 김종직에게서 비롯되었습니까? 또 말하기를, ‘후진들을 인도하여서 도와주었다.’고 하였는데, 그가 인도하여 도와준 바는 다만 시문(詩文)뿐이고, 도학으로 인도하여 도와준 것은 신들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평생 역임[歷敭]한 자취를 상고해 보더라도 그르친 바가 있습니다. 이에 앞서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말만 하고 행실은 돌아보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반드시 헛된 것만도 아닙니다. 시호를 의논하는 것은 큰 일인데, 지금 봉상시(奉常寺)에서 의논한 것은 장난하는 일 같습니다. 신 등은 사정(私情)이 있는지 의심스러우니, 청컨대 국문(鞫問)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은 일로 반드시 봉상시(奉常寺)를 국문한다면, 후에 비록 현명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시호를 낮추어서 의논할 것이다. 다만 김종직이 행한 바의 득실(得失)을 가지고 그 시호를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시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27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68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물(人物)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50]
    정자(程子) : 송나라의 정호(程顥)·정이(程頤).
  • [註 051]
    주자(朱子) : 송나라의 주희(朱熹).
  • [註 052]
    장자(張子) : 송나라의 장재(張載), 즉 횡거 선생(橫渠先生).
  • [註 053]
    사마공(司馬公) :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
  • [註 054]
    소강절(邵康節) : 송나라의 소옹(邵雍). 강절은 시호임.

○奉常寺奉事李黿承召問, 書啓曰:

"士習之不明, 由於道學之不行, 道學之不行, 源於師道之不傳, 宗直始唱正心之學, 誘掖後進, 以正心爲本, 身任斯道, 興起斯文爲己責, 其功反有賢於功名事業之卓然者矣。 諡法有博文多見曰文, 博聞多能曰文, 道德博聞曰文, 若以多見多能名之, 則宗直正心爲本, 身任斯道之功, 泯滅於後, 故以道德博聞議諡。

命示議政府。 政府啓曰: "臣等非以宗直爲不肖也, 但其議諡有云: ‘淸而不隘, 和而不流。’ 又曰: ‘據德依仁。’ 此皆聖人地位之事, 且黿之書啓有云: ‘道學之不行, 源於師道之不傳。’ 如張子者, 始可以道學言之, 其他如司馬公邵康節者, 尙不得純於道學, 況宗直乎? 又云: ‘始唱正心之學。’ 正心之學, 果始於宗直歟? 又云: ‘誘掖後進。’ 其所誘掖者, 特詩文而已。 誘掖以道學者, 臣等未之知也。 且以平生歷敭之迹攷之, 亦有所失, 前此憲府啓云: ‘言不顧行。’ 此言未必虛矣。 議諡大事也, 今奉常議之如戲事, 臣等疑其有情, 請鞫問何如?" 傳曰: "若以如此之事, 必鞫奉常寺, 則後雖有賢者, 必降議其諡, 但以宗直所行之得失, 更議其諡何如? 其更問以啓。"


  • 【태백산사고본】 42책 27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68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물(人物)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