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남도 절도사 진영을 갑산·혜산으로 옮기는 문제에 대해 가부를 의논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 영(營)을 갑산(甲山)·혜산(惠山)으로 옮기는 가부를 의정부(議政府)·영돈녕(領敦寧) 이상과 변경 일을 아는 재상(宰相)에게 의논하게 하라."
하니,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남도 절도사는 갑산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 아닙니다. 세조(世祖)께서 이시애(李施愛)의 변란812) 을 징계하여 본도(本道)에 남·북 두 절도사를 두었는데, 신이 성교(聖敎)813) 를 듣건대 이르시기를, ‘이와 같이 하면 비록 하나는 어질고 하나는 어질지 못할지라도 실패하는 데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또한 간사한 꾀가 그 사이에 싹트지 아니할 것이다. 후일에 조정 신하가 비록 개혁하려고 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대는 내 말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훈(聖訓)814) 이 이와 같고 북청(北靑)에 진(鎭)을 둔 것이 이미 날이 오래 되었으므로, 일이 반드시 완전하게 갖추어졌을 것입니다. 더욱이 갑산은 벽루(僻陋)815) 하여 많은 사람을 용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까닭없이 갑자기 옮기자고 하니, 신은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자, 본도(本道)는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았고 서울과 거리가 또 멀어서 마침내 미대 난도(尾大難掉)816) 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또 남도 절도사를 설치해 방비를 더욱 튼튼하게 하였는데, 만약 본영(本營)을 갑산으로 옮기면 처음 설치한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물며 갑산은 북청과 길이 멀고 험하여 아리(衙吏)가 왕래하기가 고통스러우니, 예전대로 두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유지(柳輊)는 의논하기를,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설치한 본의(本意)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랑캐[虜]가 만약 멀리 달려와서 깊숙이 들어와 침략해도 중도(中道)에 또 거진(巨鎭)이 있으면 저들이 반드시 방비함을 의심하여 감히 들어와서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하나는 가령 이시애(李施愛)·이징옥(李澄玉)의 변란817) 이 있더라도 만약 남도 절도사가 남쪽 군사를 거느리고 관방(關防)818) 해서 은연중에 간사한 마음을 좌절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진을 설치한 본의(本意)를 돌아보지 아니하고서 중도(中道)의 거진(巨鎭)을 버리고 갑산(甲山)으로 옮겨 들어가면, 세조(世祖)의 이룩한 법을 폐할 뿐만 아니라 그 지공(支供)과 운반에 폐단이 작지 아니하니, 예전대로 두는 것이 편합니다."
하고, 신준(申濬)·이봉(李封)·이계동(李季仝)·이종생(李從生)은 의논하기를,
"세조(世祖)께서 남도(南道)에 영(營)을 둔 것은 그 경략(經略)과 조치가 스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혜산(惠山)은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쇠잔하여 많은 사람을 용납하기 어려우니, 진(鎭)을 옮길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형세가 진실로 진을 옮길 수 없으니, 예전대로 두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271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241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註 812]이시애(李施愛)의 변란 : 1467년(세조 13년)에 길주(吉州)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지방적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북도(北道)의 수령(守令)을 남도(南道) 사람으로써 삼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북도인을 선동하여 일으킨 반란. 이때 이시애·이시합 형제는 사로잡혀 처형 되었음.
- [註 813]
성교(聖敎) : 세조(世祖)의 전교.- [註 814]
성훈(聖訓) : 임금의 교훈.- [註 815]
벽루(僻陋) : 매우 누추하고 궁벽한 두메구석을 이름.- [註 816]
미대 난도(尾大難掉) : 일의 끝이 크게 벌어져서 처리하기가 힘듦.- [註 817]
이징옥(李澄玉)의 변란 : 1453년(단종 원년) 이징옥이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의 직(職)에서 파면되자 스스로 ‘대금 황제(大金皇帝)’라 칭(稱)하고 거병(擧兵)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 당시 수양 대군(首陽大君)으로부터 아무런 과실도 없이 파직당한 이징옥은 그 후임(後任) 박호문(朴好問)으로부터 중앙에 정변(政變:계유 정난(癸酉靖亂))이 있었음을 알고 이에 격분, 박호문을 죽인 후 병마(兵馬)를 이끌고 북으로 종성(鍾城)에 가서 스스로 ‘대금 황제’라 일컫고 야인(野人)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판관(判官) 정종(鄭種) 등의 술책에 빠져 아들 3명과 함께 사로잡혀 피살되었음.- [註 818]
관방(關防) : 국경의 방비.○傳曰: "永安南道節度使營移設于甲山、惠山便否, 其議于政府、領敦寧以上及知邊事宰相。" 尹弼商議: "南道節度使, 非爲甲山防禦設也, 世祖懲李施愛之變, 乃於本道置南、北兩節度使。 臣聞聖敎曰: ‘如此則雖一賢一否, 不至於敗, 亦無有邪謀得萌於其間, 後日廷臣雖有欲革者, 汝其毋忽吾言。’ 聖訓如此, 而北靑置鎭, 爲日已久, 事必完具, 況甲山甚僻陋, 非徒不能容衆, 又不能支, 今無故而遽移, 臣未知其可。" 許琮議: "世祖平李施愛之亂, 以本道山海相逼, 距京又遠, 恐終尾大難掉, 又設南道節度使, 益固防備, 若移本營於甲山, 有乖初設之意。 況甲山距北靑路遙且險, 衙吏往來辛勤, 莫如仍舊也。" 柳輊議: "世祖朝置鎭本意有二焉, 一則虜若長驅深寇, 而中道又有巨鎭, 則彼必疑阻, 不敢入寇, 一則假有李施愛、李澄玉之變, 若南道節度使率南軍以爲關防, 則隱然可折奸心。 今也不顧設鎭本意, 棄中道巨鎭, 移入甲山, 則非徒廢世祖成憲, 其支供轉輸, 爲弊不貲, 仍舊爲便。" 申濬、李封、李季仝、李從生議: "世祖置營於南道, 其經略措置, 自有深意, 況甲山、惠山, 土瘠民殘, 難以容衆, 不可移鎭。" 傳曰: "勢固不可移鎭, 仍舊可也。"
- 【태백산사고본】 42책 271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241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註 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