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에 나아가 강하기를 마치고 백성들의 구휼 등에 대해 논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持平) 이달선(李達善)이 아뢰기를,
"육경(六卿)은 일체(一體)인데 경(輕)하고 중(重)하여서는 아니됩니다. 민영견(閔永肩)과 박원종(朴元宗)이 만약 조금이라도 사체(事體)를 안다면 계목(啓目)이 어찌 문리를 이루지도 못함에 이르렀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문자(文字)가 조금 틀린다 하여 가벼이 재상(宰相)의 직분을 교체하겠는가?"
하였는데, 이달선이 말하기를,
"지금 이세준(李世俊)을 형조 정랑(刑曹正郞)으로 삼으셨는데 무릇 청옥(聽獄)은 사람의 생사에 관계된 것이므로 그 임무가 지극히 크니, 이세준이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허종(許琮)이 대답하기를,
"이세준은 무인이니 모름지기 결사(決事)하는 곳에서 시험하여 배우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자, 이달선이 말하기를,
"배운 뒤라야 형관(刑官)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어찌 형관에서 배우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이세준은 일찍이 경기 도사(京畿都事)가 되었었다 하니, 어찌 결사(決事)할 줄을 모르겠는가?"
하였다. 이달선이 또 아뢰기를,
"백성들의 곤궁하고 고달픈 것이 지금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국가(國家)에서 사랑하여 기르는 뜻은 비록 지극하지만 수령(守令)들이 받들어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령들은 무릇 손님들을 만나 접대하는 데 있어서 번화한 것을 힘써 드디어 풍속(風俗)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비방이 따르므로 비록 어진 자라도 또한 풍속(風俗)을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합니다. 이로써 공채(公債)를 함부로 거두어 들이고 그 남은 것을 취하여 주전(廚傳)719) 을 꾸미곤 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번화한 폐단을 통금(通禁)하고 한결같이 백성을 구휼(救恤)함을 근본으로 삼게 하소서. 무릇 전최(殿最)720) 때에 진실하고 참되어 화사함이 없으면 승격시키고, 화려하고 아첨하는 자는 내치신다면 풍속이 가히 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허종이 대답하기를,
"이는 고금(古今)을 통하여 큰 폐단입니다. 그러나 수령 된 자가 한결같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관무(官務)에 힘쓰지 아니한다면 반드시 잔폐(殘弊)할 것이니, 두 일을 처리하되 모두 마땅함을 얻는다면 이에 어진 수령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다만 감사(監司)에게 유시(諭示)할 뿐이지 다시 입법(立法)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허종이 말하기를,
"신이 젊었을 때에 보니 풍속이 순후하여 수령들이 탐독(貪黷)한 자가 적었는데, 지금 들으니, 조사(朝士)로 수령을 지내고 혹 집을 윤택하게 한 자가 있다 하니, 염치가 행하여지지 아니함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선이 말하기를,
"부평 부사(富平府使) 신종흡(申從洽)이 한 면에서 변통할 수 있는 물건을 두루 네 면[四面]에서 거두어 들여서, 백성들이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합니다."
하자, 허종이 말하기를,
"이러한 자는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안변 부사(安邊府使) 남계당(南季堂)을 보니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여 하삼도(下三道)의 법에 의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경작에 힘쓰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원망하다가 후에는 곧 심복(心服)하였다고 합니다. 그 정사를 행함이 관민(官民)에 편하니,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많이 얻을 수 없습니다. 가히 상(賞)줄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상(李瑺)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에서는 여악(女樂)을 쓰지 않으므로 중국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본 자가 웃었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도 정전(正殿)에서는 쓰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금후로는 쓰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허종이 대답하기를,
"송(宋)나라 때에도 정전(正殿)에서 동녀(童女)의 악(樂)을 썼으며, 지금 중국 조정에서도 또한 백 가지 유희를 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세가 졸지에 변경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27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3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재정-공물(貢物) / 금융-식리(殖利)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예술-음악(音樂)
- [註 719]주전(廚傳) : 주(廚)는 음식(飮食), 전(傳)은 거마(車馬)의 뜻.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역참(驛站)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는 것.
- [註 720]
전최(殿最) : 조선조 때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상(上)·하(下)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堂上官)·제조(提調)가,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啓聞)하였음.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원은 등제가 없었음. - [註 720]
○御經筵。 講訖, 持平李達善啓曰: "六卿一體, 不宜輕重, 永肩、元宗, 若稍知事體, 啓目何至不成文理?" 上曰: "豈可以文字小錯, 輕遞宰相職乎?" 達善曰: "今以李世俊爲刑曹正郞, 凡聽獄, 人之死生係焉, 其任大矣。 世俊恐不堪。" 上問左右。 領事許琮對曰: "世俊武人, 須試於決事之地, 使學焉可也。" 達善曰: "學焉而後可爲刑官, 豈可使學於刑官乎?" 上曰: "聞世俊嘗爲京畿都事, 豈不知決事?" 達善又啓曰: "百姓困瘁, 未有甚於此時, 此無他, 國家愛養之意雖至, 而守令莫之奉行故也。 今之守令, 凡接遇賓客, 務爲繁華, 遂成風俗, 不如是則謗毁隨之, 故雖賢者亦未免從俗, 以此濫收公債, 取其贏餘, 以飾廚傳。 請自今痛禁繁華之弊, 一以恤民爲本。 凡殿最, 悃愊無華者陞之, 繁華媚悅者黜之, 則俗可變。" 上問左右。 琮對曰: "此古今巨弊, 然守令一以便民爲事, 不恤官務, 則必至殘弊, 二事處之皆得其宜, 則斯爲賢守令也。" 上曰: "然, 但諭于監司耳, 不必更立法也。" 琮曰: "臣少時見風俗尙醇, 守令貪黷者少, 今聞朝士經守令, 或有潤屋者, 廉恥不行, 不可不慮。" 達善曰: "富平府使申從洽, 以一面可辦之物, 遍徵於四面, 民之受害不少。" 琮曰: "如此者不可不罪也。 臣見安邊府使南季堂, 盡心民事, 依下三道法, 敎民耕治, 民初怨之, 後乃心服, 其爲政便於官民, 此人世不多得, 可賞也。" 上曰: "可。" 正言李瑺啓曰: "中朝不用女樂, 天使至我國見者笑之。 世宗朝亦不用於正殿, 請今後勿用。" 上問左右。 琮對曰: "宋朝正殿用童女之樂, 今中朝亦用百戲。" 上曰: "勢難卒變。"
- 【태백산사고본】 42책 27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23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재정-공물(貢物) / 금융-식리(殖利)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예술-음악(音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