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 269권, 성종 23년 9월 10일 무인 3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한치례·여자신·박원종·김응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한치례(韓致禮)를 숭정 대부(崇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여자신(呂自新)을 자헌 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박원종(朴元宗)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김응기(金應箕)를 통정 대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황사효(黃事孝)를 통정 대부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조문숙(趙文琡)을 조산 대부(朝散大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이극규(李克圭)를 중훈 대부(中訓大夫)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이달선(李達善)을 승의랑(承議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삼았다. 여자신은 청개(淸介)하고 근신(謹愼)하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에 이 임명이 있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임금이 문무 일체(文武一體)를 주의로 삼아 무신(武臣)을 참용(參用)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는데, 변수(邊脩)·이계동(李季仝)·이공(李拱)·양찬(梁瓚)·김세적(金世勣)·오순(吳純)·이조양(李朝陽)·조극치(曺克治)·변처녕(邊處寧) 같은 이가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박원종이 승지가 됨에 미쳐서 조정 의논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논박하자 바꾸어서 참의(參議)로 삼았는데, 이로부터는 다시 무신(武臣)을 써서 승지로 삼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269권 6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225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