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침 등이 세자의 학업·제군의 제택·중국 사신의 접대에 관해 아뢰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안침(安琛)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세자(世子)의 나이가 아직 약관(弱冠)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학문 교양과 인격 도야의 공부는 잠시도 중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래(近來)에 심한 더위로 인하여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중지하도록 명하셨는데, 비록 춘방(春坊)476) 과 사헌부(司憲府)에서 불가(不可)함을 말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은 진실로 전하(殿下)께서는 국본(國本)을 아끼는 마음에서 더위를 먹어 조섭(調攝)에 알맞음을 잃게 될까 하여 그렇게 하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어려서 이룬 것은 천성(天性)과 같고, 습관은 자연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학문의 성취(成就)를 중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굳이 먼 옛날을 거울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초년(初年)에 매일 세 번씩 경연에 나아가시어 아무리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라고 하더라도 중지하신 적이 없으니, 성상(聖上)의 학문이 고명하심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세자를 사랑하심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심보다 더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하심은 고식적인 것이지 덕(德)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니, 신 등은 적이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노력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충성을 한다면 올바른 길을 일러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주강과 석강을 다시 처음과 같이 하도록 명하소서.
전하께서는 내외 간에 화락하시고 자손이 번창하시므로, 왕자(王子)가 취실(娶室)을 하고 옹주(翁主)가 하가(下嫁)하는 일이 잇따라 계속되는데, 그 제택(第宅)을 지음에 있어 동우(棟宇)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궁궐(宮闕)을 모방하고 있으니, 선왕조(先王朝)의 왕자(王子)와 공주(公主) 집에 비하여 몇 배에 그칠 뿐이 아닙니다. 옛날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아들 6인(人)을 봉하여 왕(王)으로 삼을 적에 친히 봉역(封域)을 정하여 초왕(楚王)·회왕(淮王)·양왕(陽王)의 반으로 재량(裁量)하니, 마후(馬后)가 너무 작다고 말하자, 명제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을 어찌 감히 선제(先帝)의 아들과 같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대저 황자(皇子)라는 신분은 같은데도 명제는 그렇게 말하였으니, 공검(恭儉)한 덕을 볼 수 있습니다. 신(臣) 등은 왕자와 옹주의 동우(棟宇) 제도는 선왕조(先王朝)의 제도를 본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너무 지나치게 하고 있으니, 한나라 명제에게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제택은 당연히 자손에게 전하게 되는데, 왕자의 아들은 종실(宗室)이고, 의빈(儀賓)의 아들은 사대부(士大夫)입니다. 의빈이나 종실의 집이 제도에 어긋나는 것도 불가(不可)한 것인데, 더구나 사대부이겠습니까? 그 역사(役使)하는 인부는 경기(京畿)의 당령 수군(當領水軍)477) 을 쓰는데, 들으니, 요즈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경기의 수군의 흩어진 수가 상당히 많으니, 소복(蘇復)할 대책을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고 합니다. 신 등은 수군이 흩어지는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으로 염려되며, 짓지 아니한 집이 오히려 많으니, 이는 작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그 제도를 감손(減損)하고, 당우(堂宇)의 길고 넓음과 재목(材木)의 길고 짧음을 참작하여 지나치게 사치하지 않도록 하고, 또 그 부역도 조절하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안침 등이 또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할 때의 일을 서계(書啓)하기를,
"1. 백관(百官)을 반으로 나누어 예(禮)를 행할 때에 2품(二品)이 매우 적으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는 육경(六卿)이 없오?’라고 하였습니다.
1. 두목(頭目)들이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저녁을 먹을 때에 등촉(燈燭)을 설치하지 아니하여 손님을 대접하는 곳의 횃불을 가지고 비추었습니다.
1. 중국 사신이 돌아가는 날 예복(禮服)을 갖추고 나와서 전하(殿下)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오랫동안 서서 기다렸는데, 전하께 아뢴 사람이 없었으니, 그 때문에 늦어지자 중국 사신이 노여워하여 다시 편복(便服)으로 갈아 입고 나와 묻도록 하여 접대하는 데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1. 중국 사신이 알성(謁聖)하는 날에는 영접 도감(迎接都監)이 막차(幕次)에 자리를 베풀지 아니하였고, 또 연향(宴享)도 준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행히 중국 사신이 막차에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또 명륜당(明倫堂)에 오래 앉아 있지 아니하였는데, 그렇지 아니하였으면 일이 반드시 모두 궐례(闕禮)가 될 뻔하였습니다. 관수(盥水)의 도구도 또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1. 영접 도감은 스스로 1품(一品)의 아문(衙門)이라고 생각하여 예조(禮曹)의 발패(發牌)와 감결(甘結)478) 을 전연 따르지 않았으며, 모든 절차를 소홀하게 다루고 신경을 쓰지 아니하여 일마다 착오가 나게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중국 사신이 만약 예복(禮服)을 갖추고 기다렸다면 어찌 나에게 알려 주는 자가 없었는가? 비록 작은 일이라도 관반(館伴)479) 이 듣고 본 대로 즉시 나에게 알리게 하였는데, 어찌 그 일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는가? 나는 다만 중국 사신이, ‘전하께서 마땅히 모화관(慕華館)으로 바로 가시지 무엇 때문에 더위를 무릅쓰고 여기에 오십니까?’라고 했다는 말만 들었다. 그래서 내가 어실문(御室門) 안에 서서 중국 사신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유자광(柳子光)이 와서 중국 사신이 나온다고 알려 주므로, 내가 문밖에서 만나 보고 함께 대화하였었다. 이제 그대들은 도리어 나를 보고 늦었다고 하니, 마땅히 그 책임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제군(諸君)의 집 제도는 이미 결정이 된 것인데, 이제 와서 어찌 제도에 지나치다고 말하는가? 세자(世子)의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은 대간(臺諫)들도 중지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본래 기질이 허약하고 지금 또 더위를 앓고 있으므로, 내가 중지하도록 명한 것이다. 여름철에는 종친(宗親)들도 방학(放學)을 하는데, 그대들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강독(講讀)을 중지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내가 마땅히 따르겠다."
하였는데, 안침(安琛) 등이 아뢰기를,
"세자의 학문은 종친과 다르므로, 비록 여름철이라도 폐도할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왕자(王子)와 옹주(翁主)의 제택(第宅)은 제도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 하셨는데, 신 등이 이번의 제택을 보니,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함이 선왕조(先王朝) 때보다 훨씬 지나칩니다. 신 등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지금의 제도가 선왕조보다 다름이 있습니까? 아니면 제도는 비록 같으나 집짓는 것을 감독하는 사람이 애써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여서 그러한 것입니까? 중국 사신을 수종(隨從)하는 데는 통사(通事)와 영접 도감(迎接都監) 등의 관원이 있는데, 그 거동(擧動)에 대해서 한 사람도 전하에게 달려와서 알려주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통사들이 게을러서 소홀히 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경솔한 것은 온 나라 사람이 아는 일로서, 그렇게 전도된 것은 그 잘못이 중국 사신에게 있는 것인데, 어떻게 감히 전하에게 늑장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전교하기를,
"세자의 학문이 비록 종친과 같지 않다 하나 병이 날까 염려함은 일반이다. 제군(諸君)의 제택을 만약 제도에 지나치다고 하여 척촌(尺寸)의 수를 고쳐 정한다면 모든 제도가 지나친 조관(朝官)의 집은 다 마땅히 헐어야 하겠는가? 중국 사신이 출발하던 날 응접을 늦춘 것은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유사(有司)가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은 마땅히 국문(鞫問)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266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97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외교-명(明)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건설-건축(建築)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註 476]춘방(春坊)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
- [註 477]
당령 수군(當領水軍) : 번상(番上)의 차례를 당하여 근무중에 있는 수군.- [註 478]
감결(甘結)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내리던 공문서.- [註 479]
관반(館伴) :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태평관(太平館)이나 동평관(東平館)에 임시로 파견하던 관원. 정3품 이상에서 임명하였음. 접반사(接伴使).○弘文館副提學安琛等上箚子曰:
竊見世子, 年未弱冠, 敎養緝熙之功, 不可暫替, 近以酷熱, 命停晝、夕講, 雖春坊、憲府言其不可, 未蒙兪允。 臣等固知, 殿下愛惜國本, 恐其觸(署)〔暑〕 調攝失宜而然也。 然孔子曰: "少成若天性, 習貫如自然。" 學問成就, 其可作輟乎? 此不須遠鑑諸古, 殿下初年, 每日三御經筵, 隆冬盛夏, 未嘗停輟, 聖學高明, 有由然矣。 殿下之愛世子, 異於愛己, 然則其愛之也, 乃以姑息, 不以德也, 臣等竊惑焉。 孔子曰: "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 伏願命復晝、夕講如初。 殿下螽斯毓慶, 祚胤繁昌, 王子之娶室, 翁主之下嫁者相繼, 而其營造居第, 棟宇壯麗, 侔擬宮闕, 比先王朝王子、公主之第, 不止數倍。 昔漢 明帝封子六人爲王, 親定封域, 裁令半楚 淮陽, 馬后言其太儉, 帝曰: "我子豈敢與先帝子等?" 夫皇子之分一也, 而明帝之言如是, 可見恭儉之德。 臣等以爲, 王子、翁主棟宇之制, 倣先王朝之制足矣, 而今乃遠過, 無乃有愧於漢 明乎? 居第當傳子孫, 王子之子, 宗室也, 儀賓之子, 則士大夫也, 儀賓、宗室之第, 過制猶且不可, 況士大夫乎? 其功役人夫, 用京畿當領水軍, 聞近有言者, 以京畿水軍流散頗多, 請議蘇復之策。 臣等恐水軍之流散, 亦或由此, 而未營之第尙多, 此非細故。 伏願減損其制, 酌定堂宇之脩廣, 材木之長短, 毋使過侈, 且以節其力役, 幸甚。"
琛等又書天使接待時事, 啓曰: "一, 百官分半行禮時, 二品甚少, 天使曰: ‘汝國無六卿乎?’ 一, 頭目等至太平館, 夜飯時, 不設燈燭, 以對客所持炬照之。 一, 天使回程日, 具禮服而, 出欲辭殿下, 良久立待, 無人以啓, 殿下緣此稽緩, 天使怒, 更以便服出問, 以致接待遑遽。 一, 天使謁聖日, 迎接都監不設坐於幕次, 又不備宴享, 幸而天使不入幕次, 又不久坐明倫堂, 不然則事必俱闕, 盥水之具, 亦不賫去。 一, 迎接都監, 自謂一品衙門, 禮曹發牌及甘結, 全不聽從, 一應節次, 慢不用意, 以致事事錯誤。" 傳曰: "天使若具禮服以待, 豈無報我者? 雖細事, 館伴隨所聞見卽使奔告於我, 何獨此事不爾? 予但聞天使云: ‘殿下當直往慕華館, 何冒熱到此?’ 予立御室門內, 以待天使之出, 柳子光來告天使出, 予及見于門外, 與之言。 今爾等反以我爲稽緩, 予當受其責。 諸君家舍制度已定, 今何言過制? 世子晝、夕講, 臺諫亦言不當停, 然世子本氣弱, 今又病暑, 故予令停之。 當暑月, 宗親猶放學, 爾等若以謂, 雖病不可輟講, 則予當從之。" 琛等啓曰: "世子學問與宗親異, 雖暑月不可廢也。 上敎云, 王子翁主第宅制度已定, 臣等見今第宅制度, 壯麗遠過先王朝。 臣等未知, 今之制度有異於先王朝耶, 抑制度雖同, 而監造者務爲壯麗而然歟? 天使隨從有通事, 有迎接都監官員, 而其擧動無一人奔告殿下, 是通事等慢忽所致也。 且天使輕率, 國人所知, 如此顚倒, 咎在天使, 安敢以殿下爲稽緩乎?" 傳曰: "世子學問, 雖與宗親不同, 然慮其生病則一也。 諸君第宅, 若以爲過制, 改定尺寸, 則凡朝官過制之家, 皆當壞之乎? 天使發日, 應接稽緩, 予之過也, 然有司不能措辦者, 在所當鞫也。"
- 【태백산사고본】 41책 266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97면
- 【분류】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외교-명(明)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건설-건축(建築)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역사-고사(故事)
- [註 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