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 도원수 허종이 와서 복명하니 선정전에 나아가 인견하고 공을 치하하다
북정 도원수(北征都元帥) 허종(許琮)이 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북정(北征) 때에 얻은 바가 비록 적더라도 군사들을 온전히 하여 돌아왔으니, 내가 몹시 기뻐한다."
하니, 허종(許琮)이 대답하기를,
"저들의 지역은 도로(道路)가 험조(險阻)하고 초목(草木)이 울창하며, 또 물을 건너는 곳이 많이 있었는데 반은 얼음이고 반은 물이어서 보병(步兵)이 갈 수 없으므로, 누기(累騎)349) 하여 건너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사가 멀리 가지를 못하고 하루에 겨우 30리를 가서 저들의 땅에 들어갔는데, 〈떠난 지〉 8일이 되어서야 울지현(鬱地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에는 김장손(金長孫)이 먼저 가서 이 현(峴)을 넘어 적(賊) 6, 70인을 만나 싸웠는데, 적이 우리의 대군(大軍)을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곧 흩어져 도주하였습니다. 신이 행군(行軍)하여 적소(賊巢)350) 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야영[下營]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달려서 들어간즉 적이 이미 다 도망했으므로, 신이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어 가옥[室廬]을 분탕(焚蕩)하고, 하루 이틀 머무르며 적의 형세를 살피려 하다가 양식(糧食)이 다하여 부득이 회군(回軍)하였는데, 이는 신의 죄입니다. 신이 사졸인(士卒人)으로 하여금 15일치의 양식과 20일치의 미식(糜食)을 싸가지고 가도록 하였었는데, 군사가 영(令)을 따르지 않고 거개가 양식을 가볍게 해서 갔으므로, 이 때문에 양식이 떨어진 자가 많았습니다. 군사를 돌이켜 10리 쯤에 이르르니 적이 혹은 산 위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아군(我軍)의 뒤에서 나오기도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속히 가도록 청하였지만, 신은 불가하다고 말하기를, ‘만약 속행(速行)하면 적이 반드시 우리를 겁낸다고 여길 것이니, 서서히 가는 것만 못하다.’ 하고서 종용(從容)함을 보이게 하고는, 15리쯤을 물러 나와서 야영하였는데, 적들이 감히 와서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속(阿速)이 적 가운데로부터 도망해 돌아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적이 관군(官軍)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저들이 모두 군사란 말인가? 어찌 이와 같이 많은가?」 하였는데, 그 가운데 장년(壯年)의 사람이 사력(死力)을 내어 돌진(突進)해 분격(奮擊)하도록 청하니, 늙은이가 이를 제지하여 말하기를, 「만야(曼耶)가 일찍이 조선(朝鮮)을 자주 침범하였는데 지금 그 집이 먼저 분탕을 당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귀신과 같은가?」 하고는, 저를 시켜 조선군(朝鮮軍)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만야(曼耶)의 집이 이미 분탕을 당하였으니, 그밖의 다른 것은 풀어 줄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명일(明日) 행군(行軍)에는 적도(賊徒) 백여 명이 장차 아군(我軍)의 뒤를 차단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적이 반드시 먼저 울지(鬱地)에 웅거하여 우리를 요격(邀擊)할 것이라 여기고 이계동(李季仝)·황형(黃衡)·엄귀손(嚴貴孫)·육한(陸閑)으로 하여금 후군(後軍)이 되게 하였더니, 적이 육한의 군사와 더불어 싸웠는데, 우리 군사는 비록 상처를 입은 자가 있기는 했어도 죽는데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올랑합(兀郞哈)이 와서 말하기를, ‘싸울 때에 적 가운데 화살을 맞고 죽은 자가 30여 인이고, 다친 자가 40여 인이며, 그 가운데는 추우두형(樞于頭兄)의 아들이 주장(主將)이 되어서 왔는데, 화살을 맞고 즉사[卽斃]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아군(我軍)은 유엽전(柳葉箭)으로 적(賊) 하나를 쏘아 맞혔는데, 투구가 뚫리고 두개골이 관통당해 죽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의 기세가 꺾이고 풀이 죽었습니다. 군사가 돌아옴에 사졸(士卒)로서 죽은 자는 불과 10여 인이었고, 한 사람도 뒤에 처진 자가 없었습니다. 강상(江上)에 이르르니,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졸(士卒)이 갈 수가 없었으므로, 신이 도사(都事) 유빈(柳濱)으로 하여금 가서 호위해 오도록 하였는데, 동사(凍死)한 자가 11인이었습니다. "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만(數萬)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멀리 오랑캐의 소굴[虜穴]에 들어갔다가 죽은 자가 여기에 그쳤으니, 비록 옛날의 현장(賢將)이라 하더라도 어찌 더 〈잘〉 하였겠는가?"
하니,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번 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김장손(金長孫)이 오랑캐[虜]들로 하여금 먼저 깨닫게 한 것으로 말미암아서 그런 것이다.’고 하였으니, 신의 뜻으로는 이번에 종정(從征)한 야인(野人)이 공(功)을 다툰 소치(所致)이며 김장손의 죄만은 아닙니다. 대군(大軍)이 도로 우리 땅에 들어옴에 미쳐 뒤에 처져 돌아오지 않는 자가 5백여 인이었는데 아직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권경희(權景禧)가 아뢰기를,
"신이 여러 도(道)의 추쇄 계본(推刷啓本)을 보니, 도망(逃亡)이라 일컫고 물고(物故)라 일컬은 것이 비록 많았으나, 뒤따라 와서 나타나는 자도 또한 많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수령(守令)이 자세히 추현(推現)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들으니, 사졸(士卒)이 돌아와서 우리 경계에 들어올 때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말한 바를 들으니, 기쁘다."
하였다. 허종이 아뢰기를,
"사람들의 말이 사망(死亡)한 자가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신이 본 바로는 그 수(數)가 많지 않았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기망(欺罔)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졸(士卒)로서 병사(病死)한 자는 아무리 원수(元帥)라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허종이 아뢰기를,
"변경[塞上]에 추위가 심한데, 군사(軍士)로서 피로(疲勞)한 자가 만약 다시 야숙(野宿)을 할 것 같으면, 사람과 말이 죽는 것이 반드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영(令)을 내리기를, ‘조정(朝廷)에서 군졸(軍卒)로 하여금 여염(閭閻)에 들어가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침해[侵損]를 염려해서이다. 만약 침해하지 않을 것 같으면 비록 〈여염에〉 들어가 잔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는데, 이 때문에 죽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26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72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
○北征都元帥許琮來復命。 上御宣政殿, 引見曰: "北征時所獲雖少, 全師而還, 予甚喜焉。" 琮對曰: "彼地道路險阻, 草樹茂密, 且多有涉水處, 半氷半水, 步兵不能行, 累騎而渡, 由是師不得遠行, 一日僅行三十里, 入彼土至八日到鬱地峴, 翌日金長孫先行踰是峴, 遇賊六七十人而戰, 賊望見我大軍, 旋卽散走, 臣行軍距賊巢二十里許下營, 翌朝馳入, 則賊已盡逃, 臣分遣諸將, 焚蕩室廬, 欲留一、二日, 以觀賊勢, 糧盡不得已回軍, 此則臣之罪也。 臣令士卒人裹十五日糧, 及二十日糜食, 軍不從令, 率多輕糧而行, 以此糧盡者多, 還師至十里許, 賊或見於山上, 或出我軍後, 諸將請速行, 臣不可曰: ‘若速行, 則賊必以我爲怯, 不若徐徐而行, 以示從容。’ 退十五里許下營, 賊不敢來犯。 阿速自賊中逃還, 語臣曰: ‘賊見官軍驚曰: 「彼皆兵耶? 何如此之多?」 其中壯者, 請出死力突進奮擊, 老者止之曰: 「曼耶嘗數侵犯朝鮮, 今其家先被焚, 何其神耶?」 使我呼朝鮮軍曰: 「曼耶家已見焚, 其他可釋。」 又明日行軍, 賊徒百餘, 將截我軍後, 臣意賊必先據鬱地邀我, 令李季仝、黃衡、嚴貴孫、陸閑爲殿。 賊與陸閑軍戰, 我軍雖有被創者, 皆不至死, 但一人中箭, 因墜馬遂死。 其後(兀郞哈)〔兀良哈〕 來言, 戰時賊中箭死者三十餘人, 傷者四十餘人, 中樞于頭兄子爲主將而來, 中箭卽斃, 又我軍以柳葉箭射中一賊, 穿兜鍪貫顱而死。 由是賊勢摧沮。 軍還, 士卒死者止過十餘人, 無一人在後者。 比至江上, 日候寒甚, 士卒未能行, 臣令都事柳濱往護而來, 寒凍死者十一人。" 上曰: "領數萬衆, 遠入虜穴, 其死者止此, 雖古賢將, 何以加之?" 琮曰: "諸將皆言, 此行不得成功, 由金長孫使虜先覺而然也, 臣意此從往野人爭功所致, 非獨長孫之罪也。 及大軍還入我地, 在後未還者五百餘人, 猶未盡知也。" 右承旨權景禧啓曰: "臣見諸道推刷啓本, 稱逃亡物故雖多, 然隨後來見者亦多, 是必守令不仔細推現也。" 上曰: "初聞士卒還入我境, 死者甚多, 今聞所言, 可喜也。" 琮曰: "人言死亡者甚多, 以臣所覩, 其數不多, 臣何敢欺罔乎?" 上曰: "士卒病死者, 雖元帥亦無如之何。" 琮曰: "塞上寒甚, 軍士疲勞者, 若更野宿, 則人馬死者必多, 故臣令曰: ‘朝廷不使軍卒入宿閭閻者, 慮侵損也, 如不侵損, 雖入宿何害?’ 以此死者不多。"
- 【태백산사고본】 41책 26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72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