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홍응의 졸기
좌의정(左議政) 홍응(洪應)이 졸(卒)하였는데, 철조(輟朝)236) ·조재(弔祭)·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홍응의 자(字)는 홍응지(洪應之)이고, 관향(貫鄕)은 남양(南陽)이니, 고려(高麗) 시중(侍中) 홍자번(洪子藩)의 후예(後裔)이며, 한성부 윤(漢城府尹) 홍심(洪深)의 아들이다. 경태(景泰)신미년237) 에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또 문과(文科) 제 1명(第一名)으로 뽑혀, 처음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가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으로 옮겼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병자년238) 에 집현전(集賢殿)이 혁파되자 세자 좌문학(世子左文學)으로 옮겨 제수되었고, 천순(天順)무인년239) 에 성균 직강(成均直講)으로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세자 좌필선(世子左弼善)에 제수되었으며, 경진년240) 에 우보덕(右輔德) 겸 예문 직제학(兼藝文直提學)에 승진되었다. 세조(世祖)가 권남(權覽)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마땅히 군자(君子)를 천거하라."
하였는데, 권남이 대답하기를,
"조신(朝臣)으로서 홍응(洪應)보다 나은 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8월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에 승진되고, 9월 〈4일(정축)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특별히 승진되었다. 〈세조〉가 홍응을 불러 이르기를,
"이조[銓曹]에서 천거[注擬]한 사람은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내가 특히 육경(六經) 중에서 사람을 구하기 때문에 그대를 발탁하여 임명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삼가라."
하였는데,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세조가 신숙주(申叔舟)에게 이르기를,
"홍응이 형방(刑房)을 맡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매양 언옥(讞獄)241) 을 당하여서 내가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홍응이 반드시 살리는 길을 구(求)하였으니, 그 활인(活人)242) 한 것이 많았다."
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임(臨)하여 세자(世子)의 재덕(才德)을 극구 칭찬하며 이르기를,
"내가 대위(大位)243) 를 부탁하려고 한다."
하니, 정창손(鄭昌孫)이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상교(上敎)가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내전(內殿)으로 돌아가 갑자기 홍응을 불러 들여 이르기를,
"당일로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는 것이 마땅하니, 그대는 급히 모든 일을 갖추는 것이 가하다."
하였는데, 홍응이 부복(俯伏)하고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신은 감히 상교(上敎)를 받들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홍응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정창손은 나로 하여금 속히 왕위(王位)를 버리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명(命)을 따르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하였다. 홍응이 주선(周旋)하기를 매우 힘써 하니, 임금이 이에 화가 풀렸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모두 득체(得體)244) 하였다고 여겼다. 계미년245) 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승진시키고는 이어서 하교하기를,
"그대가 시조(侍朝)를 조심스레 하고 기국(器局)이 비상(非常)하니, 가히 재상(宰相)이라고 이를 만한 사람이다."
하였다. 임금이 조회(朝會)에 좌정(坐定)하여 여러 재상들에게 명하여 국가(國家)의 일을 말하게 하니, 홍응이 나아와서 아뢰기를,
"간원(諫院)은 곧 이목(耳目)246) 의 관사(官司)이니, 반드시 보고 듣는 것이 넓게 갖추어진 뒤에 옳고 그름을 의논하고 다스리는 체제를 논해야 합니다. 근자에 용관(冗官)247) 을 도태(淘汰)하면서 사간원(司諫院)은 사간(司諫) 1원(員)과 지사간(知司諫)·정언(正言) 각 1원(員)만 보존하였으니, 이는 매우 불가(不可)합니다. 모든 관사에 구임(久任)248) 의 법(法)이 있어 한 관사의 3, 4원(員)은 3년이 되어야 체직(遞職)되는데, 요행(僥倖)을 바라는 무리가 늠록(廩祿)을 앉아 먹으면서 그 직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또 간경 도감(刊經都監)의 의방(醫方)을 수정(修正)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은 반 년에 거관(去官)249) 하게 하고 모두 6품(品)에 제수하여 작상(爵賞)이 외람되었으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 얼마 안되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세자 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하게 하였고 성화(成化)을유년250)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刑曹判書)·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에 승진하였으며, 병술년251) 에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옮겼다. 임금이 홍응이 일찍이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그 직무에 적합했으므로 겸 도승지(兼都承旨)를 삼고는 늘 정원(政院)에 앉아 출납(出納)을 전장(專掌)하게 하였으며, 또 지위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게 하였다. 무자년252) 에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여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삼고는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익성군(益城君)에 봉(封)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더하였다. 기축년253) 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되고, 경인년254) 에 모상(母喪)을 당하여 임진년255) 에 복(服)을 마쳤는데,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승진시켜 군(君)으로 봉(封)하였다. 을미년256) 에 숭록 대부(崇祿大夫)를 더하고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정유년257) 에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제수되고, 무술년258) 에 좌찬성(左贊成)에 승진되고 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승진되었다. 기해년259) 에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고, 을사년260) 에 경기(京畿)·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 4도(道)의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는데, 궁시(弓矢)와 의복(衣服)을 내려 주고 이어서 내신(內臣)을 보내어 제천정(濟川亭)에서 전송하였으며, 돌아옴에 미쳐 좌의정(左議政) 겸 세자부(兼世子傅)로 승진되었다. 정미년261) 에 또 영안도 순찰사(永安道巡察使)가 되었는데, 어의(御衣) 2습(襲)과 탁건(橐鞬)·약낭(藥囊)을 내려 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病)이 위독해지니,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약(藥)으로 다스리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문후(問候)가 끊이지 않았는데, 내의가 병이 조금 차도가 있다고 아뢰자,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물품을 내려 상(賞)으로 주고, 또 홍응에게 옷[衣] 1습(襲)을 내려주었다. 병이 위독해짐에 미치자,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하고 싶은 말을 묻게 하였으나,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지금 증세(證勢)를 들으니,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하늘이 어찌하여 나의 현상(賢相)을 빼앗아 가기를 급하게 하는가?"
하였는데, 졸(卒)하니, 나이 65세였다. 충정(忠貞)이라고 시호(諡號)하니, 청렴(淸廉)하고 방정(方正)하며 공평(公平)하고 정직(正直)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정도(正道)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정(貞)이라 한다. 아들은 홍상(洪常)인데, 명숙 공주(明淑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홍응(洪應)은 충담(沖澹)262) ·정수(精粹)263) 하고 청렴·방정하며 간중(簡重)하여 심중(心中)이 쇄락(灑落)264) 하고, 풍채가 뛰어나고 가지런하였다. 분잡(紛雜)하고 화려함을 싫어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았으며, 문(門)에는 잡객(雜客)이 없었다. 정승(政丞)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써서 논의(論議)가 지정(持正)265) 하고 임금의 뜻에 아첨해 따르지 않았으며, 일을 인하여서는 자못 규경(規警)266) 이 있어 대신(大臣)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졸(卒)함에 미쳐서는 조야(朝野)가 몹시 애석해 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1책 26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67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註 236]철조(輟朝) :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혹은 재앙(災殃)이 있을 때 근신하는 의미에서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던 일.
- [註 237]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註 238]
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239]
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240]
경진년 : 1460 세조 6년.- [註 241]
언옥(讞獄) : 옥사(獄事)를 평의(評議)함.- [註 242]
활인(活人) : 사람의 목숨을 구원하여 살림.- [註 243]
대위(大位) : 임금의 지위(地位).- [註 244]
득체(得體) : 체면을 유지함.- [註 245]
계미년 : 1463 세조 9년.- [註 246]
이목(耳目) : 귀와 눈.- [註 247]
용관(冗官) : 별로 중요하지 않은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註 248]
구임(久任) : 하나의 관직에 오랫동안 근무하던 제도. 대개 일정한 기간이 되면 체임(遞任)하는 것이 원칙이나, 특수한 관직에 한하여 구임시켰음.- [註 249]
거관(去官) : 임기가 차서 벼슬을 떠나 다른 관직으로 옮기던 일. 《세종실록(世宗實錄)》 제 1권을 보면 "시속에서 직질의 임기가 차서 갈리는 것을 거관이라 한다.[俗以秩滿遞官者 爲去官]"하였음.- [註 250]
을유년 : 1465 세조 11년.- [註 251]
병술년 : 1466 세조 12년.- [註 252]
무자년 : 1468 예종 원년.- [註 253]
기축년 : 1470 예종 원년.- [註 254]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註 255]
임진년 : 1472 성종 3년.- [註 256]
을미년 : 1475 성종 6년.- [註 257]
정유년 : 1477 성종 8년.- [註 258]
무술년 : 1478 성종 9년.- [註 259]
기해년 : 1479 성종 10년.- [註 260]
을사년 : 1485 성종 16년.- [註 261]
정미년 : 1487 성종 18년.- [註 262]
충담(沖澹) : 성미가 조촐하고 깨끗함.- [註 263]
정수(精粹) : 아주 깨끗하고 순수함.- [註 264]
○左議政洪應卒。 輟朝, 弔祭禮葬如例。 應, 字應之, 南陽人, 高麗侍中子藩之後, 漢城府尹深之子。 景泰辛未中生員, 又擢文科第一名, 初授司諫院右正言知製敎, 遷集賢殿修撰, 累陞至應敎, 丙子罷集賢移拜世子左文學。 天順戊寅拜成均直講, 尋拜世子左弼善, 庚辰陞右輔德兼藝文直提學。 世祖謂權覽曰: "卿宜進君子。" 覽對曰: "朝臣無過於應者。" 八月陞判宗簿寺事, 九月特陞通政承政院同副承旨, 召謂應曰: "銓曹注擬者非一人, 予特求人於六經中, 擢汝任之, 汝其愼之。" 累陞都承旨, 世祖謂申叔舟曰: "應久知刑房, 每當讞獄, 予欲殺人, 應必求生道, 其活人多矣。" 上嘗臨諸宰, 極稱世子才德曰: "予欲以大位付之。" 鄭昌孫率爾對曰: "上敎當矣。" 上還內, 遽召應入謂曰: "卽日當傳位世子, 汝可急辦諸事。" 應俯伏不起, 仍啓曰: "臣不敢奉敎。" 上握應手曰: "昌孫使我速去位, 汝不從命何也?" 應周旋甚力, 上乃霽威, 時議皆以爲得體。 癸未陞吏曹參判, 仍敎曰: "爾小心侍朝, 器局非常, 可謂宰相者矣。" 上坐朝, 命諸宰陳國家事, 應進曰: "諫院乃耳目之司, 必須聞見博而後, 得以議是非、論治體, 近者汰冗官, 司諫院只存司諫一員、知司諫、正言各一員, 此甚不可。 諸司有久任之法, 一司三、四員, 三年乃遞, 僥倖之徒, 坐食廩祿, 不勝其任, 且令刊經都監醫方修正人, 或半年去官, 皆授六品, 爵賞猥濫, 非細故也。" 上皆嘉納之, 尋兼同知春秋館事世子副賓客。 成化乙酉陞資憲刑曹判書世子右賓客, 丙戌移中樞府同知事。 上以應嘗爲都承旨能稱職, 爲兼都承旨, 常坐政院, 專掌出納, 又兼知義禁府事。 戊子睿宗卽位爲同知經筵事, 賜推忠定難翊戴功臣號, 封益城君。 尋加正憲, 己丑拜吏曹判書議政府右參贊, 庚寅丁母憂, 壬辰服闋, 賜純誠明亮佐理功臣號, 陞崇政封君。 乙未加崇祿復拜吏曹判書。 丁酉拜議政府右贊成。 戊戌陞左贊成, 又陞輔國崇祿領中樞府事。 己亥拜右議政, 乙巳爲京畿、忠淸、全羅、慶尙四道巡察使, 賜弓矢衣服, 仍遣內臣, 餞于濟川亭, 及還陞左議政兼世子傅。 丁未又爲永安道巡察使, 賜御衣二襲、橐鞬、藥囊, 至是病篤, 命內醫治藥, 朝夕問候不絶, 內醫以病小間啓, 上甚喜, (持)〔特〕 賜物以賞, 又賜應衣一襲, 及病革, 命承旨問所欲言, 已不能言。 御書曰: "今聞證勢, 罔知所措, 天何奪我賢相之亟耶?" 卒年六十五, 諡忠貞, 廉方公正, 忠; 直道不撓, 貞。 子常尙明淑公主。
【史臣曰: "應沖澹精粹, 廉方簡重, 胸次灑落, 風神秀整, 厭紛華不事産業, 門無雜客, 爲相務存大體, 論議持正, 不阿循上意, 因事頗有規警, 有大臣風, 及卒朝野痛惜。"】
- 【태백산사고본】 41책 26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67면
-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註 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