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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61권, 성종 23년 1월 29일 경자 6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도첩을 주고 중을 시험하여 선발하고 계달하여 수금하는 법령을 고칠 것에 대한 부제학 안침의 상소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안침(安琛)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현성(賢聖)한 군왕은 대대로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도(道)가 크게 행하여지는 것은 반드시 마땅한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殿下)께서는 즉위(卽位)하신 이후로 어진이를 존경하시고 도(道)를 즐기시며 선(善)을 좋아하시는 것을 게을리 아니하셨으니, 들으시는 바는 다 바른 말이었고 보시는 바는 다 바른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치우치거나 방탕(放蕩)하거나 간사(奸邪)하거나 편벽(偏僻)된 말들을 물리치시고 그 사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었으니, 전하께서는 이단(異端)에 미혹(迷惑)되지 않으셨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법을 고치지 않고 벼려야 할 폐단을 버리지 않으시니, 양종(兩宗)과 원각사(圓覺寺)가 학궁(學宮)과 한 도성(都城) 가운데에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내불당(內佛堂)·복세암(福世菴)·연굴사(演窟寺) 등 사찰의 중에게 밥을 먹이는 비용 등이 소모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시험하는 법은 문무(文武)의 제과(諸科)와 함께 예조(禮曹)에 속하고 있으며 주지(住持)의 선임도 공경(公卿)의 제배(除拜)와 더불어 전조(銓曹)에 같이 맡겨져 있습니다. 또 계문(啓聞)한 뒤에 수금(囚禁)하며, 사찰의 수색을 금지하는 것 등은 모두 정치를 방해하는 큰 요인이 되고 있지만, 중에게 도첩(度牒)을 지급하는 그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그 해독이 더욱 심한 바가 있습니다. 군졸(軍卒)은 나라의 조아(爪牙)로서 그들에게 의탁하여 안으로 시위(侍衛)하고 밖으로 외적(外敵)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대저 위험한 곳을 버리고 평안한 데로 나아가며, 편한 것을 좋아하고 수고로운 것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궁노(弓弩)·시석(矢石)의 위태함이 어찌 임궁(琳宮)064)범우(梵宇)065) 안의 평안함만 하며, 풍상(風霜) 속에서 변방을 방어하는 소고로움이 어찌 밭 갈지 않고 먹고 베 짜지 않고 입는 안일함만 하겠습니까? 한집안이 함께 일하여 몇 년만 근로(勤勞)하면 족히 30필(匹)의 베를 마련하므로, 이를 관(官)에 바치고 그 첩(牒)066) 만 받게 되면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세월을 허랑(虛浪)하며 보내어도 평생 동안 노역(勞役) 없는 백성이 되어, 처자(妻子)를 데리고 진한 술에 취하고 신선한 고기를 배불리 먹는 등 뜻과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계책이 어찌 편하고도 쉽지 않습니까? 이것이 곧 상문(桑門)의 법이니 간사한 백성들이 부역을 도피하는 연수(淵藪)로 만드는 데 꼭 알맞은 것입니다. 중의 무리가 번성하면 군액(軍額)이 줄어들고, 군액이 줄어들면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게 되며,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게 되면 국세(國勢)가 허약하게 될 것이니, 어찌 몹시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근자에 변방에 근심할 만한 일이 없어서 조야(朝野)가 평온하고 백성들이 병란을 보지 못하였는데, 전일 북정(北征)의 거사 때에 날이 바야흐로 매우 추웠음에도 수만의 무리가 궁벽하고 거친 벌판에서 노숙(露宿)하였으므로 향리(鄕里)로 살아 돌아온 자에게 친척이 함께 치하하였으니, 백성들이 더욱 더 병졸이 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런 것이며 중이 되는 것이 가장 편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일 정전(丁錢)을 바치는 자가 전보다 몇 배나 늘어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 백성들의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이에서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제부터 아비는 그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그 아우를 가르쳐서 전답과 집과 소까지 팔아 정전을 마련하여 중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비록 날마다 천백(千百)에 이른다 해도 이 법을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점차 다스릴 망정 갑자기 개혁할 수 없다고 이른다면, 바야흐로 지금의 이 시점에서 오히려 성상께서 몸소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데 힘입어서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거의 향방(向方)을 알고 있기에, 상례(喪禮)를 행하는 집에서는 부도(浮屠)를 쓰는 자가 드물고, 도(道)를 담론(談論)하는 선비는 석(釋)·로(老)067) 를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이때를 타서 고치지 아니하면 끝내 고칠 만한 때가 없을 것입니다. 무릇 그 화환(禍患)을 없애지 않고 그 화환이 스스로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마치 불길이 원야(原野)를 태우는 것을 미워하면서도 박멸(撲滅)을 가하지 않고 불이 스스로 멸할 것이라고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법은 가볍게 고칠 수 없다.’고 하고, 또는 말하기를, ‘사람에게 도첩(度牒)을 주어서 중이 되게 하는 것이 곧 중이 되는 길을 금절(禁絶)하는 길이다.’라 고 하니, 그 미봉(彌縫)하고 부회(傅會)하는 것이 여러 신하들의 말을 막고 전하의 뜻을 굳게 함이 더욱 심합니다. 저 사람들이라고 어찌 성인(聖人)의 글을 읽지 아니하였으며, 성인의 도(道)를 배우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 몸이 낭묘(廊廟)068) 에 있고, 직책이 보좌(補佐)하는 자리에 있으니, 도(道)로서 임금을 섬겨야 할 것이지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윽이 듣건대 ‘다스림이란 도(道)가 같음으로써 이루어지고, 정사란 속(俗)을 혁파함으로써 비롯된다.’고 하니, 제왕(帝王)의 법은 그 때에 따라 가장 합리적으로 제정되는 것이므로, 이는 고금(古今)의 통의(通義)입니다. 또 근일의 일로 말씀하더라도 을사년069) 《대전(大典)》의 범양천(凡良賤)이란 조목(條目)에, ‘제도(制度)는 그 문(文)이 말(末)이 되니, 시세(時勢)와 인정(人情)에 따라 또한 변통(變通)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고 하였는데, 유독 이 도승(度僧) 등의 일만은 금석(金石)같이 지키고 사시(四時)같이 행하시니, 전하께서는 〈조종의〉 뜻을 이어서 왕업을 전해 가는 효(孝)가 된다고 여기십니까? 국가에서 이미 사람들에게 도첩을 주어 중이 되는 것을 허가해 놓고 그 도첩이 없는 자를 금한다면, 이는 모든 백성들에게 도첩을 받고 중이 되도록 권장하는 것이니, 이것이 원숭이에게 나무에 오르도록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중들의 도첩 없는 것을 금하는 것이 어찌 그 도첩을 받은 자까지도 아울러 금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들이 비록 어리석긴 하나 어찌 감히 고금(古今)을 살펴보지 않으며 사의(事宜)를 헤아려 보지도 않고, 한갓 중정(中正)을 넘고 시속(時俗)을 놀라게 하는 논의를 주장하여 선왕(先王)의 법을 변경하려고 하겠습니까? 진실로 성명(聖明)하신 임금의 나심은 드물고 할만한 때를 만나기는 어려우니, 지금 고치지 아니하면 뒤에 누구에게 바라겠습니까? 이 권권(惓惓)070) 한 회포를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나라에 일이 있으면 그 대책을 경사(卿士)와도 의논하고 서인(庶人)과도 의논하였습니다. 지금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이 모두 개혁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데도 재보(宰輔)071) 의 논의만 아직 같지 않으니, 원컨대 신 등의 말을 가지고 널리 조정에서 의논하게 하시어 굽어 공론(公論)을 채택하시고 강(剛)한 결단을 내리시어, 도첩을 주는 것과 계문(啓聞)한 뒤에 수금(囚禁)하는 것과 시험해 선발하는 모든 조항(條項)을 고치도록 명하시어 인심이 더욱 바르고 교화(敎化)가 더욱 밝아지며 군액(軍額)이 더욱 증대하고 변비(邊備)가 더욱 공고(鞏固)하게 되도록 하시면, 우리의 도(道)가 더욱 다 행할 것이고 국가도 더 다행할 것입니다."

하니, 영돈녕(領敦寧) 이상 및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에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40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弘文館副提學安琛等上疏曰:

賢聖之君, 世不常有, 道之大行, 必待其人。 殿下卽位以來, 尊賢樂道, 妤善不倦, 所聞皆正言, 所見皆正事, 斥去(波)〔詖〕 淫(耶)〔邪〕 僻之說, 使不得入於其間, 殿下之於異端, 可謂不惑矣。 然而法可改而未改, 弊可祛而未祛, 兩宗圓覺與學宮參錯於都中, 內佛堂福世菴演窟等寺飯僧之資, 糜費不貲, 而選試之法與文武諸科, 竝屬於禮曹, 住持之選與公卿除拜, 同(住)〔任〕 於(詮)〔銓〕 曹, 與夫啓聞囚禁之徒, 搜索寺刹之禁, 皆妨政害治之大者。 至於度僧一事, 其害滋甚。 軍卒, 國之爪牙, 所恃以衛內而禦外者也。 夫去危就安, 好逸惡勞, 常人之情, 弓弩矢石之危, 孰若琳宮梵宇之安; 風霜戍禦之勞, 孰若不耕而食, 不織而衣之爲逸? 若一家共作勤力, 數年足以辨三十匹之布, 納於官而受其牒, 則高枕而臥, 浪度歲月, 爲終身無役之民, 携妻挈子, 醉濃飽鮮, 無不如意, 其爲計豈不便且易也? 是則桑門之法, 適足爲奸猾之氓、逃賊之淵藪, 僧徒繁而軍額減, 軍額減而邊備踈, 備邊踈而國勢弱, 豈非可懼之甚耶? 邇來邊境無虞, 朝野寧謐, 民不見兵, 日者北征之擧, 時方冱寒, 數萬之衆, 暴露窮荒, 生還鄕里者, 親戚共賀, 人民益知爲兵之最苦, 爲僧之最安矣。 似聞, 近日丁錢之納, 倍蓰於前, 民情好惡, 於玆可驗。 竊恐自今, 父敎其子, 兄敎其弟, 賣田廬牛犢, 備丁錢而願爲僧者, 雖日至千百, 此法不改, 則終不能禁也。 借曰: "治之以漸, 不可遽革。" 則方今之時, 尙賴聖上躬率, 以正公卿大夫, 庶幾知所向方, 行喪之家, 鮮用浮屠; 談道之士, 恥言, 不因此時而改之, 則終無可改之時矣。 夫不除其患而待患之自無, 是猶惡火之燎原, 不加撲滅而謂火之自滅, 寧有是理? 議者之言曰: "祖宗之法, 不可輕改。" 又曰: "度人爲僧, 乃所以禁絶爲僧之路。" 其彌縫傅會杜群下之言, 而堅殿下之意益甚, 彼豈非讀聖人之書, 學聖人之道者耶? 身居廊廟, 職在輔佐, 以道事君, 不宜如是。 竊聞, 治以道同, 政由俗革, 帝王之法, 因時制宜, 此古今之通義也。 且以近日之事言之, 乙巳《大典》, 凡良賤之條, 制度文爲之末, 因時勢人情, 亦多有變而通之者。 獨此度僧等事, 守之如金石, 行之如四時, 以爲殿下繼志述事之孝乎? 國家旣許度人爲僧, 而禁其無度牒者, 是則勸齊民受度牒而爲僧也。 是何異敎猱以升木也? 禁僧徒之無度牒, 曷若竝與其受度牒者而禁之耶? 臣等雖愚, 亦豈敢不揆古今, 不度事宜, 而徒爲過中駭俗之論, 以變先王之法乎? 誠以聖明之主罕出, 而可爲之時難逢, 今而不改, 後誰望焉? 惓惓之懷, 自不能已。 古者, 國有事, 謀及卿士, 謀及庶人, 今臺諫侍從皆曰可改, 而宰輔之議, 尙亦未同, 願以臣等之言, 廣議于朝, 俯採公論, 廓揮剛斷, 命改給度, 啓囚選試等諸條, 使人心益正, 敎化益明, 軍額益增, 邊備益固, 吾道幸甚, 國家幸甚。

命議于領敦寧以上及議政府、六曹、漢城府。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40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