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첩을 주고 중을 시험하여 선발하고 계달하여 수금하는 법령을 고칠 것에 대한 직제학 김응기의 상소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김응기(金應箕)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비록 ‘불교[釋敎]를 숭상하여 믿지는 않는다.’고 하시나, 숭상하고 믿는 그 근원이 아직도 영갑(令甲)033) 에 있으니, 그 법이 있어도 그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누가 믿으며, 비록 그러한 마음은 없더라도 실상 그 법을 행하고 있으니, 그 해(害)됨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정치란 풍속을 개혁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법도는 간혹 한때의 숭상하는 데에서 나오므로 자손 만대에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찌 다 조종조의 법이라 하여 고치지 못하겠습니까? 마땅히 지킬 것은 지키고 변통(變通)할 것은 변통하는 것이 성현(聖賢)의 시중(時中)034) 하며 수성(守成)035) 하는 요체(要諦)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그때의 가장 적합한 것을 좇아서 정사의 폐단을 구제(救濟)하려 하면, 선왕(先王)의 옛 법전(法典)도 일찍이 때로 고치기도 하였는데, 다른 일은 고치면서 유독 이 몇 조항만은 고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서는 밝고 덕있는 군왕이 대를 이어 나시어, 이제 백년을 드리우게 되었는데, 예악(禮樂)을 일으키고 법도를 바르게 잡을 때는 바로 이때입니다. 진실로 그 법을 바로잡음으로써 조종(祖宗)의 업(業)을 넓히고 자손을 위한 계모(計謀)를 주어 그 모범(模範)을 만세(萬世)에 드리운다면, 어찌 변통하지 못하는 것만을 고집하여 경장(更張)함을 꺼려하겠습니까? 불씨(佛氏)가 옳은 것 같으나 진리를 어지럽히니 인륜(人倫)과 풍속을 무너뜨리는 해독은 다시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를 돌아보건대 4면이 모두 적(敵)의 침입을 받는 땅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병졸(兵卒)의 수효가 삼국(三國)으로 분열(分裂)되어 있을 때보다도 많지 않은 것은, 생각건대 사람들이 다투어 상문(桑門)036) 으로 들어가서 국가의 쓰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근일 북정(北征)의 거사 때에 겨우 2만 명의 군사(軍士)를 일으켰는데도 심지어는 숙위(宿衛)도 철수(徹收)하고 남방의 비어(備禦)까지도 옮겨가서 겨우 그 수효를 채웠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전조(前朝)037) 말기에 병졸이 넉넉하지 못하고 국세(國勢)가 허약하여 임금이 스스로 공고히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권세를 잡은 신하가 〈왕명을〉 마음대로 내었기 때문에 정치가 강력하지 못하였던 소치이기는 하나, 이단(異端)의 교(敎)를 높이 받들고 믿어서 백성들이 절반이나 불도(佛徒)가 되었으니 그 국세(國勢)가 점차 약화된 것은 대개 이에 연유한 것이니, 길이 거울이 될 것입니다. 그윽이 듣건대, 근래에 금전을 바치고 도승(度僧)이 되려는 자가 전일의 갑절이나 된다고 하니, 이는 백성들 거의가 비로소 정역(征役)의 괴로움을 알고, 차라리 파산(破産)하고 중이 될지언정 병졸되는 것은 원치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데도 그 길을 막으며 그 근원을 막을 줄 모른다면, 후일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조종(祖宗)의 법을 본받는 것은 조종의 마음을 본받는 것만 같지 못한데, 조종의 마음이 어찌 나라를 예(禮)로 다스리고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며 기업(基業)을 공고하게 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비록 한때 우연히 이 법을 세웠더라도 후사(後嗣)가 고치지 않으리라고 헤아려서 어찌 만대의 폐단을 주셨겠습니까? 고치는 것은 효(孝)에 손(損)됨이 없어도 따르는 것은 의(義)에 해(害)됨이 있을 것이니, 의에 해되는 바가 있으면 효도 완전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몇 조항을 그대로 두어서 후대에 명시(明示)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여기십니까, 과연 그르다고 여기십니까? 끝내 옳다고 이를 수 없다면 이것이 어찌 진정 선조(先祖)를 높이 받들고 효도하시는 것이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크게 결단을 내리시고 개정을 혐의하지 마시어 성세(盛世)의 법전(法典)을 바르게 하소서."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니,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중의 무리가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으니, 과연 국가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상소 속의 뜻을 따르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이제 사헌부(司憲府)와 홍문관(弘文館)의 상소를 보니, 만약 아뢴 바에 의해 하신다면, 어찌 크게 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조종조에서 세운 법을 경장(更張)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사헌부와 홍문관의 상소는 그 뜻이 정대(正大)합니다. 그러나 가볍게 경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중들에게 도첩(度牒)을 주는 법은 역대(歷代)에 다 있었습니다. 만약 이 법이 없다면 사람마다 임의(任意)로 중이 된다 해도 막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법을 세운 본의를 살펴본다면 이는 중이 되는 길을 금하고 없애려는 것이지 사람을 인도하여 중이 되게 하고 이단(異端)의 교(敎)를 숭상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후위(後魏)의 태무제(太武帝)나, 당(唐)나라 무종(武宗)과 같이 천하의 사문(沙門)038) 을 다 죽이고 천하의 사찰을 다 철거한다면, 이 법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조종의 옛법을 가볍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철견(李鐵堅)·한치례(韓致禮)는 의논하기를,
"사헌부와 홍문관에서 상소한 뜻은 옳습니다. 그러나 도승의 법이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데, 한때 아뢴 것으로서 옛법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어세겸(魚世謙)은 의논하기를,
"사헌부와 홍문관의 상소한 뜻은 실로 국가 대계(大計)와 유관한 것이라 결단하여 시행하시면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도첩을 주는 것과 시험하여 선발하는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고칠 수 없습니다. 다만 근래에 정전(丁錢)을 바치고 중이 되는 자가 갑절이나 많아진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군역(軍役)은 무겁고 정전은 적기 때문입니다. 또 《대전》에 중이 되려는 자가 양종(兩宗)에 신고하고 경문(經文)039) 을 외우는 시험을 거쳐서 예조(禮曹)에 통보하는 일들은 자못 간단하고 쉽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중이 되려는 자는 양종에 신고하지 말고 종사(從仕)하는 사람의 예(例)에 의하여 본관(本官)의 공문(公文)을 받아서 예조에 바쳐 경문을 시험하며, 정전을 곱으로 올려 받아서 다시 도첩이 있고 없음을 엄히 고찰하게 하소서. 또 중은 계문(啓聞)한 뒤에 수금(囚禁)하며 사찰의 수색은 하지 못한다는 등의 조항은 《원육전(元六典)》이나 《속육전(續六典)》에 기재되지 않은 바이니, 의당 헌부(憲府)에서 아뢴 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고, 한치형(韓致亨)·여자신(呂自新)·이계동(李季仝)·권건(權健)·박숭질(朴崇質)·한건(韓健)·김수손(金首孫)·김무(金碔)·김심(金諶)은 논의하기를,
"도첩을 주고 계문한 연후에 수금하며 시험하여 선발한다는 등의 일들은 상소한 바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하고, 신승선(愼承善)·송영(宋瑛)·이집(李諿)은 의논하기를,
"중에게 도첩을 주는 것과 계문한 연후에 수금하는 것과 시험하여 선발하는 법이 모두 《대전》에 실려 있으니, 조종(祖宗)에서 이루어 놓으신 법을 가볍게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疏)의 논의가 매우 바르니, 청컨대 그 말을 따르소서."
하였는데, 노사신의 의논을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35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註 033]영갑(令甲) : 법.
- [註 034]
시중(時中) : 때에 따라 맞게 절제(節制)하여 중정(中正)을 지키는 것.- [註 035]
수성(守成) : 선대에서 성공해 놓은 업을 잘 보전해 지키는 것.- [註 036]
상문(桑門) : 불문(佛門)과 같음.- [註 037]
○弘文館直提學金應箕等上疏曰:
殿下雖曰不崇信釋敎, 而崇信之源, 尙在令甲, 有其法而無其心, 誰得而信之? 縱無其心, 實行其法, 其爲害豈異也哉! 古人有言曰: "政由俗革。" 法或出於一時之所尙, 而有不可行於萬世者, 其可盡謂祖宗之法而不改乎? 當持守而持守, 當變通而變通, 此聖賢之時中而守成之要也。 故國家因時之宜, 救事之弊, 於先王舊典, 亦嘗有時而改矣。 在他事則可改, 惟此數條, 獨在所不得改乎? 惟我聖朝, 重熙累洽, 垂百年于玆, 禮樂興而法度正, 惟其時矣。 苟正其法, 以弘祖業, 以貽孫謀, 以垂範萬世, 則豈可狃於膠柱而嫌於更張哉! 佛氏似是亂眞、斁倫敗俗之害, 不必更論, 顧我國環四面皆受敵之地, 而兵卒之數, 不多於三國分裂之時。 意者, 人爭入於桑門而不爲國家之用乎。 近者北征之擧, 纔興二萬之師, 而乃至撤宿衛移南備, 僅足以充其數, 豈不可爲之寒心哉! 前朝之季, 兵卒不敷, 國勢羸弱, 人主不能以自固, 是雖權臣擅命、政治不競之所致, 而崇信異敎, 齊民半爲緇徒, 積弱之漸, 益由於此, 可爲永鑑矣。 竊聞, 比來納錢欲度者, 倍蓰前日, 殆民始知征役之苦, 寧破産爲僧而不願爲之兵也。 如是而不知杜其路、塞其源, 末流之害, 有不可勝言者矣。 臣等謂, 法祖宗之法而不如法祖宗之心, 祖宗之心, 豈不欲爲國以禮, 率民以正, 使俗化美而基業固乎? 雖偶立此法於一時, 豈擬後嗣之不改, 以貽永世之弊乎? 改之無損於孝, 循之有害於義, 義有所害, 孝不得全矣。 存此數條, 以明示後世, 其果謂之是乎? 其果謂之非乎? 果終不可謂之是也, 則豈眞所以尊祖而爲孝乎? 伏願殿下, 廓揮乾斷, 無嫌改絃, 以正盛世之典。
命議于大臣。 沈澮議: "緇徒遊手遊食, 果無益於國家, 宜從疏意。" 尹弼商、洪應議: "今觀司憲府、弘文館上疏, 若依所啓, 豈不大快, 然祖宗朝立法, 不宜更張。" 李克培議: "司憲府、弘文館之疏, 其意正大, 然不可輕易更張。" 盧思愼議: "度僧之法, 歷代皆有, 若無此法, 人人任意爲僧, 無有禁防。 原立法本意, 乃禁絶爲僧之路, 非導人爲僧以崇異敎也。 如魏 太武、唐 武宗, 盡誅天下沙門, 盡撤天下寺刹, 則此法不須在, 不然則祖宗舊章, 不可輕改。" 李鐵堅、韓致禮議: "憲府、弘文館疏意是矣, 然度僧之法, 載在《大典》, 以一時所啓, 不可輕改舊章。" 魚世謙議: "司憲府、弘文館疏意, 實關大計, 斷而行之, 則國家之幸也。" 鄭文烱議: "度牒選試之法, 其來已久, 未可卒革, 但近來納丁錢爲僧者倍多, 此無他, 軍役重而丁錢少故也。 又《大典》, 爲僧者告兩宗, 試誦經, 報禮曹, 事頗輕歇。 請自今, 爲僧者勿告兩宗, 依從仕人例, 受本官公文呈禮曹試經, 倍徵丁錢, 度牒有無, 嚴行考察。 且僧人啓聞囚禁, 不得搜索寺刹等條, 《元》、《續六典》之所不載, 宜從憲府之啓。" 韓致亨、呂自新、李季仝、權健、朴崇質、韓健、金首孫、金碔、金諶議: "給度啓囚選試等事, 依上疏施行。" 愼承善、宋瑛、李諿議: "度僧啓囚選試之法, 皆載《大典》, 不可輕改祖宗成憲, 然疏論甚正, 請從其言。" 從思愼議。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35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註 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