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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 1월 17일 무자 2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헌납 정탁 등이 중을 뽑는 시험에 예조의 낭청을 보내지 말 것 등을 청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헌납(獻納) 정탁(鄭鐸)이 아뢰기를,

"중을 선발하는 법은 마땅히 혁파해야 할 것이나, 만약 갑자기 혁파하지 못한다면, 청컨대 예조 낭청(禮曹郞廳)을 보내어 선발을 감시하는 것은 그만두게 하소서."

하니, 시독관(侍讀官) 강겸(姜謙)이 말하기를,

"《대전(大典)》에 구애되어 도숭(度僧)의 법을 고치지 않으시니, 지금 이때를 잃고 고치지 않으면, 어느때에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집의(執義) 이예견(李禮堅)은 아뢰기를,

"예조의 낭청(郞廳)이 석서(釋書)를 모르니, 비록 시험을 감시하게 한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또 비록 정선(精選)하게 한들, 국가에 무슨 보익(補益)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중을 선발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입니다. 또 주지(住持)로 하여금 사찰(寺刹)을 지키게 한다면 시험 선발하여 맡기지 않을 수 없고, 시험해 취할 것 같으면 반드시 외람(猥濫)된 폐단이 있을 것이니, 낭관(郞官)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에 그 집을 불사르고 사람도 불살라 버린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예관(禮官)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익정(趙益貞)이 말하기를,

"조종조에서는 내직 별감(內直別監)을 보내어 그 시험해 취하는 것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예조 낭관을 보낸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중이 되는 자가 많기 때문에 국가의 군액(軍額)이 날로 줄어드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윤필상이 말하기를,

"내직 별감을 보내어 시취(試取)하게 하면 외람된 폐단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예조의 관원을 보낼 뿐입니다."

하였다. 강겸이 말하기를,

"강원도(江原道)는 인민이 희소한데,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五臺山)에는 사찰(寺刹)이 대단히 많고, 여기에 살고 있는 중의 무리가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니, 만약 이들로 충군한다면 어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조익정은 말하기를,

"강원도는 인민이 영세(零細)하여 겨우 1만 2천여 호이며, 한 도(道)의 백성을 다하여도 다른 도의 한 거읍(巨邑)을 당하지 못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이 되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강겸은 말하기를,

"강원도는 군수(軍需) 물자가 지극히 적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낙산사(洛山寺)와 유점사(楡岾寺) 등의 사찰에다가 국가에서 식염(食鹽)을 주고 있는데 그 수효가 매우 많습니다. 이것으로 곡식을 사서 군수 물자를 보충한다면 어찌 풍족하게 쓰지 않겠습니까? 또 낙산사사염분(私鹽盆)029) 도 또한 많으니 관에서 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조익정이 말하기를,

"진실로 강겸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낙산사 등의 사찰에 줄 소금을 곡식으로 바꾸어서 군수 물자에 보충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조로부터 주어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이제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다."

하였다. 이예견이 말하기를,

"중이 되는 자가 단지 사조(四祖)030) 만을 써서 양종(兩宗)에 바치는데, 이로 말미암아 위조하는 사례가 많으니, 모름지기 본관(本官)의 정역(定役)이 없다는 공문을 받게 한 뒤에 비로소 도첩(度牒)을 주면, 중이 되려는 자가 반드시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중의 무리가 비록 위첩(僞牒)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수령이 어찌 알겠습니까? 예조로 하여금 유점사(楡岾寺)의 수리 도감 도첩(修理都監度牒)을 내어준 연월(年月)을 상고하여 각도(各道)에 이첩(移牒)하게 하면 그 진위(眞僞)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또 관차(官差)가 비록 절에 올라가지는 못하지만, 중들이 반드시 산에서 내려올 때가 있을 것이니, 그때 추쇄하면 도첩 없는 중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강겸이 말하기를,

"대저 강원도의 각 고을에서는 대구어(大口魚)가 생산되지 않고 오직 간성(杆城)한 고을에서만 나기 때문에 여러 고을에서 스스로 준비할 수 없어 모두 무역하여 바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곳에서 생산되는 물건으로 공물(貢物)을 정하게 하소서."

하니, 조익정이 말하기를,

"본래 생산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고성(高城)·간성·통천(通川) 등의 고을에서는 영안도(永安道)에서 무역해 오고, 평해(平海)·강릉(江陵)·울진(蔚珍) 등의 고을에서는 서울에서 무역해다가 바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모든 도(道)에 물어서 공물을 정하지 않았던가? 자라[魭魚]도 안변(安邊)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감(減)하였다. 생산되고 생산되지 않는 것을 다시 상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34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공물(貢物) / 사상-불교(佛敎) / 수산업-염업(鹽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호구-호구(戶口)

  • [註 029]
    사염분(私鹽盆) : 사용으로 설치한 염전(鹽田).
  • [註 030]
    사조(四祖) : 부(父)·조(祖)·증조(曾祖) 및 외조(外祖)를 말함.

○御經筵。 講訖, 獻納鄭繹啓曰: "選僧之法, 在所當革, 若不遽革, 請勿遣禮曹郞廳監選。" 侍讀官姜謙曰: "拘《大典》, 不改度僧之法, 失今不改, 則何時可改乎?" 執義李禮堅啓曰: "禮曹郞廳, 不知釋書, 雖使監試何益? 且雖使精選, 亦何補國家乎?" 上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選僧旣是祖宗故事, 且以住持守刹, 則不可不試取而任之, 若試取, 則必有猥濫之弊, 不可不遣郞官也。" 上曰: "若火其廬, 人其人則已矣, 不然, 禮官不可不遣也。" 特進官趙益貞曰: "祖宗朝遣內直別監試取。 其遣禮曹郞官, 未知始自何時。 大抵爲僧者多, 故國家軍額日減, 誠非細故也。" 弼商曰: "內直別監試取, 有猥濫之弊, 不得已遣禮官耳。" 曰: "江原道人物鮮少, 而有如金剛山(五)臺山, 寺刹甚多, 所居僧徒, 不知其幾, 若以此充軍, 豈不有益乎?" 益貞曰: "江原道人物淍殘, 僅一萬二千餘戶, 擧一道之民, 不敵他道一巨邑。 此無他, 爲僧者多故也。" 曰: "江原道軍需至少, 不可不慮也。 洛山楡岾等寺, 國家給食鹽, 其數甚多, 以此貿穀補軍需, 豈不足用? 且洛山寺私鹽盆亦多, 不須官給也。" 益貞曰: "誠如所啓, 以應給洛山等寺之鹽, 貿穀以裨軍需可也。" 上曰: "自祖宗朝給之已久, 今不可遽革。" 禮堅曰: "爲僧者, 但書四祖呈兩宗, 由是多僞, 須令受本官無役公文, 方給度牒, 則爲僧者必不多矣。 且僧徒雖持僞牒, 守令何以知之? 其令禮曹考楡岾修理都監度牒成給年月, 移于諸道, 則可辨其眞僞矣。" 上曰: "可。 且官差雖不得上寺, 然僧徒必有下山之時, 此時推刷, 則無牒之僧可得矣。" 曰: "大抵江原諸邑, 不産大口魚, 惟杆城一邑獨産, 故諸邑不能自備, 皆貿易以進, 請以所産之物定貢。" 益貞曰: "本非不産也, 産不多也, 故高城杆城通川等官, 貿於永安道; 平海江陵蔚珍等官, 貿於京中。" 上曰: "無乃已問於諸道而定貢乎? 魭魚不産於安邊, 故亦減之矣。 其更考産、不産。"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34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재정-공물(貢物) / 사상-불교(佛敎) / 수산업-염업(鹽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호구-호구(戶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