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를 인견하고 표류할 때의 일 등을 묻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갓 최부(崔溥)를 인견(引見)하고, 표류(漂流)할 때의 일을 물으니, 최부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은 무신년022) 정월에 제주(濟州)에 있었는데, 아비의 상보(喪報)를 듣고 황급(遑急)하게 바다를 건너가다가 밤에 초란도(草蘭島)에서 정박(定泊)하던 중 홀연히 북풍이 일어, 배가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면서 표류하였는데, 중국(中國) 영파부(寧波府) 지경에 이르러서 2척의 배를 만났습니다. 신 등이 목이 몹시 말라서 손으로 입을 가리켰더니, 뱃사람들이 신의 뜻을 알아듣고 물 2통(桶)을 주었습니다. 밤 2경에 그 배의 20여 명의 사람이 창(槍)과 칼을 들고 신의 배로 돌입하여 옷가지와 양식을 겁탈(刼奪)하고, 또 닻[矴]과 노(櫓)를 빼앗아 바닷속에 던지고는 신의 배를 끌어다가 대양(大洋) 속에 놓아 버렸습니다. 무릇 5일 동안을 바다 위에 떠있다가, 마침 동풍을 만나서 다시 표류하여 우두(牛頭)의 외양(外洋)에 이르니, 홀연 6척의 선박이 함께 신의 배를 포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배에서 묻기를,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朝鮮國) 사람으로, 왕명을 받들고 해도(海島)를 순찰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표류해 왔는데, 여기가 어느 나라 지경인지도 모른다.’고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기갈(飢渴)이 너무 심하여 밥을 지으려 한다.’고 사양하였고, 그 사람들도 마침 비를 만나서 모두 선창(船窓)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신 등이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비를 무릅쓰고 도망쳐 두 고개를 넘어 한 마을의 신사(神社)로 들어갔더니, 남녀가 몰려와서 보기도 하고, 혹은 장국[米漿]·차[茶]·술 등을 가지고 와서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은 칼을 찬 자가 많았으며, 징과 북을 치면서 소리를 지르고 격돌하며 에워싸 몰다가 보내곤 하였는데, 마을마다 이와 같았습니다. 다시 50여 리(里)를 갔더니, 관인(官人) 허청(許淸)이란 자가 와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나는 조선국 사람인데 풍파를 만나서 표류하여 왔다.’고 하였더니, 신 등에게 술과 밥을 먹이고는 군리(軍吏)를 시켜서 신 등을 빨리 몰아가게 하였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가 절이 있었는데 날이 장차 저물려고 하자 허청이 신 등을 여기에 묵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된다고 하자, 허청이 신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문사(文士)라면 시(詩)을 지어 보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즉시 절구(絶句)를 써서 보였는데도 역시 숙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또 몰려서 한 큰 고개를 넘어 밤 2경(更)에 한 냇물위에 이르니, 피곤하여 걸을 수가 없었고, 따르는 자도 모두 엎어져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허청이 신의 손을 잡고 일으키니, 신은 발이 부르터서 촌보(寸步)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 관인이 군병을 거느리고 왔는데, 군대의 위엄이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이들이〉 신 등을 몰아 3, 4리쯤 가니, 성(城)이 있었고, 성 가운데에 안성사(安性寺)란 절이 있었는데, 신 등을 여기에서 자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 관인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도저소 천호(桃渚所千戶)다. 왜인(倭人)이 지경을 침범하였다는 말을 듣고 군병을 거느리고 왔는데, 허청의 보고로 인해 너희 무리를 몰고 온 것이다. 그러나 진위(眞僞)를 모르기 때문에 내일 마땅히 도저소로 가서 신문(訊問)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신 등을 몰고 20여 리를 갔는데, 한 성(城)에 이르자 숙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신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처음 도착하여 머물던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 구역인데, 채(寨)를 지키던 관원이 너희들을 왜인(倭人)이라고 속이고 그 머리를 바쳐 공로를 도모하려고 했기 때문에 왜선(倭船) 14척(隻)이 변경을 침범했다고 거짓 보고하고는, 장차 군병을 거느리고 가서 체포하여 목을 베려던 참이었는데, 너희들이 배를 버리고 마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계책을 뜻대로 행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파총관(把摠官)이 장차 신문(訊問)할 것이니, 너희들은 알도록 하고, 말에 착오가 있게 되면, 일이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천호(千戶) 등 7, 8인이 신을 국문하기를, ‘너희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였다는데, 지금 다만 한 척만 있으니, 그 나머지 13척은 어디에 있느냐?’고 하기에, 신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인과는 말이 다르고 의복의 제도도 다를 것이니, 이를 가지고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왜인으로 도적질을 잘하는 자가 가끔 조선 사람의 복장을 하기도 한 적이 있었으니, 너희들이 왜인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하기에, 신이 인신(印信)과 마패(馬牌)를 내 보였는데, 그 마패에 중국 연호(年號)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믿어 주었습니다. 신이 여기에서 교자(轎子)를 타고 10여 일간의 노정(路程)을 지나 다시 배를 타고 드디어 중국 서울에 이르니, 황제(皇帝)께서 옷 1벌[襲]을 하사하고, 아울러 고의(袴衣)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도로 광녕(廣寧)으로 돌아가니, 대인(大人)이 옷 1벌을 주면서 말하기를, ‘전하(殿下)를 위하여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또 그 백성들의 가옥과 성곽(城郭), 남녀의 의복을 물었다. 최부가 말하기를,
"대강(大江)023) 으로부터 남쪽 소(蘇)·항(杭)024) 사이는 거대한 가옥들이 담을 이어서 즐비하게 있었는데, 대강으로부터 북쪽은 서울에 이르도록 인민의 생활이 그다지 번성하지 못하였고 간혹 초가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부(官府)의 성(城)은 역시 모두 높이 쌓았고, 성문의 누각(樓閣)은 혹 2층, 3층이 되는 것도 있었으며, 문밖에 다 옹성(擁城)이 있었고, 옹성 밖에 또 분장(粉墻)이 있어서, 무릇 3중(重)이나 되었습니다. 남녀의 의복은, 강남(江南) 사람들은 모두 넉넉하게 큰 검정색 유의(襦衣)와 고의(袴衣)를 입고 있었는데, 여자들은 모두 옷깃을 외로 여미고 있었으며, 영파부(寧波府) 이남의 부인(婦人)의 수식(首飾)은 둥글면서 길었고, 영파부 이북은 둥글고 뾰족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최부에게 유의(襦衣) 및 가죽신을 내리고 말하기를,
"최부가 사지(死地)를 밟아 헤치고 다니면서도 능히 나라를 빛냈기 때문에 주노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32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국왕(國王) / 과학-지학(地學)
- [註 022]
○上御宣政殿。 引見崔溥問漂流時事。 溥對曰: "臣於戊申正月在濟州, 聞父喪, 遑遽渡海, 夜泊草蘭島, 北風忽起, 隨濤上下, 漂至中國 寧波府界, 遇船二艘。 臣等渴甚, 以手指口, 船人解臣意, 遺水二桶。 夜二皷, 其船二十餘人, 持槍刀突入臣船, 刦奪衣糧, 又奪矴櫓投海中, 拿臣船放之大洋。 凡五日浮海上, 適遇東風, 漂到牛頭外洋, 忽見有六船, 共圍臣船, 一船問: ‘爾從何方來?’ 臣答曰: ‘我是朝鮮國人, 奉王事巡海島, 遇風漂來, 不知是何國地界也。’ 曰: ‘然則爾等可隨我行。’ 臣辭以飢渴太甚, 欲做飯。 其人等適遇雨, 皆入船窓, 臣等舍舟登岸, 冒雨遁過二嶺投一里社, 男女聚觀, 或以米漿茶酒饋者, 其里人多帶劎擊錚皷, 叫號隳突, 擁驅遞送, 每里如是。 行五十餘里, 有官人許淸者, 來問曰: ‘爾是何國人? 何以到此乎?’ 臣曰: ‘我乃朝鮮國人, 遇風漂到。’ 淸饋臣等酒飯, 令軍吏疾驅。 臣等過二嶺, 有佛宇, 日將暮, 淸欲留臣等宿, 里人皆以爲不可。 淸謂臣曰: ‘汝若文士, 可製詩以示之?’ 臣卽書絶句以示, 亦不許宿。 又驅過一大嶺, 夜二更至一川上, 困莫能行, 從者亦皆顚仆欲死, 淸執臣手以起, 臣足繭, 寸步不能致。 復有一官人, 領兵而至, 軍威甚盛, 驅臣等可三、四里, 有城。 城中有寺曰安性, 止臣等宿。 臣問官人則曰: ‘桃渚所千戶也。 聞倭人犯境, 領兵而來, 因許淸之報, 往驅爾輩而來, 然未知眞僞, 明當到桃渚所訊問之矣。’ 翌日, 驅臣等行二十餘里, 至一城許宿焉。 有一人謂臣曰: ‘爾初到泊處, 是轄獅子寨之地, 守寨官誣汝爲倭, 欲獻馘圖功, 故詐報倭船十四隻犯邊, 將領兵捕斬, 爾輩舍舟投入里中, 故不得逞其謀。 今把摠官將訊爾輩, 其知之。’ 辭有錯誤, 事在不測, 俄而千戶等七、八員鞫臣曰: ‘爾倭船十四艘犯邊, 今只有一船, 其餘十三艘在何地?’ 臣答曰: ‘我朝鮮人也, 與倭語音有異, 衣服殊制, 以此可辨。’ 又問: ‘倭之善爲盜者, 往往有爲朝鮮人服者, 安知爾之非倭乎?’ 臣出示印信、馬牌, 其馬牌有中朝年號, 故始信之。 臣自此乘轎行, 過十日餘程, 始乘船, 遂至帝都。 帝賜衣一襲, 竝給衣袴。 還到廣寧, 大人贈衣一襲曰: ‘爲殿下與之。’" 上又問民居城郭、男女衣服。 溥曰: "大江以南, 蘇、杭之間, 巨家大屋, 連墻櫛比; 大江以北至帝都, 人烟不甚繁盛, 間有草廬, 官府之城, 亦皆高築, 城門之樓, 或有二層、三層者。 門外皆有擁城, 擁城之外, 又有粉墻(几)〔凡〕 三重, 男女衣服, 江南人皆穿寬大黑襦袴, 女皆左袵。 寧波府以南, 婦人首節圓而長; 寧波府以北, 圓而銳。" 命賜溥襦衣及靴曰: "溥跋涉死地, 亦能華國, 故賜之。"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32면
- 【분류】외교-명(明) / 왕실-국왕(國王) / 과학-지학(地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