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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61권, 성종 23년 1월 4일 을해 2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대사헌 김여석 등이 정전에 남악을 쓸 것 등을 청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김여석(金礪石)이 아뢰기를,

"정전(正殿)에 여악(女樂)을 쓸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남악(男樂)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그러나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모두 여악을 써왔고, 또 중국 사신을 맞는 연회에도 썼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여악을 쓰고 있음은 중국에서도 또한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갑자기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여악을 쓰지 않은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이어 좌우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호(尹壕)는 대답하기를,

"조종조에서 가면무(假面舞)를 써오다가 그 뒤에 폐지하고 쓰지 않게 되어, 드디어 여악을 쓴 것인데,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세좌(李世佐)는 말하기를,

"신(臣)이 일찍이 장악원(掌樂院)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여악은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가사(歌詞)가 음탕한 것이 많으며 몹시 설만(褻慢)하여, 신이 이미 이러한 뜻을 아뢰고 그 가사를 고쳐 제작토록 하였습니다."

하고, 특진관(特進官) 박숭질(朴崇質)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여악을 쓴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갑자기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니, 김여석이 말하기를,

"세종(世宗) 이전에는 여악을 쓰지 않았으니, 개혁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여악을 받아들여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받지 않으니, 공자(孔子)께서 드디어 떠나셨다. 그러므로 정전(正殿)에 여악을 쓰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데, 혁파(革罷)하는 것이 무엇이 어려우랴? 그러나 여악을 써온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아마도 가볍게 고치지는 못할 듯하다. 장악원(掌樂院)으로 하여금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김여석이 또 아뢰기를,

"예조 정랑(禮曹正郞) 민이(閔頤)는 그 근무 연한이 아직 차지도 않았는데 첨정(僉正)에 승진 제수되었으니, 비록 취품(取稟)하였다고 하나, 법에 방해됨이 있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이세좌(李世佐)가 대답하기를,

"사람됨과 기량이 서로 합당하므로 의망(擬望)하는 것은 전조(銓曹)의 임무입니다. 더욱이 성상의 하교를 받았다면, 비록 근무 연한이 차지 않았더라도 쓰는 데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정전(正殿)에 여악을 쓰는 것은 옛 법도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세조조(世祖朝) 때부터 비로소 썼으니, 이는 특별히 일시적인 권도로 제정한 것이지 후세에 전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것은 아니다. 임금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시어 깊이 그 불가함을 아시고, 심지어 계환자(季桓子)004) 의 일을 들어 증명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혁파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셨으니, 그 후세를 우려하심이 지극하였다. 그러므로 대신(大臣)이 된 자는 마땅히 그 아름다운 뜻에 힘써 찬동하여야 하는데, 이에 말하기를, ‘갑자기 고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그 비루(鄙陋)하고 〈옛일을〉 상고하지 못함이 심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2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예술-무용(舞踊) / 풍속-풍속(風俗)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법제(法制)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註 004]
    계환자(季桓子) :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의 권신(權臣).

○御經筵。 講訖, 大司憲金礪石啓曰: "正殿不可用女樂, 請以男樂代之。" 上曰: "卿言是矣。 然自祖宗朝皆用女樂, 且宴中朝使臣亦用之。 故我國之用女樂, 中朝亦知之, 不可遽改。 然不用女樂, 庸何傷?" 仍問左右。 領事尹壕對曰: "祖宗朝用假面舞, 其後廢而不用, 遂用女樂, 不可遽革也。" 同知事李世佐曰: "臣嘗任掌樂院, 女樂不可不用也。 但歌詞多陰佚, 甚褻慢, 臣已啓此意, 令改製歌詞。" 特進官朴崇質曰: "我國用女樂, 其來已久, 不可遽改。" 礪石曰: "世宗以前, 不用女樂, 革之何難?" 上曰: "昔魯哀公受女樂, 三日不朝, 孔子遂行。 正殿用女樂, 非正道也, 革之何難? 然用女樂久矣, 恐未可輕改也。 其令掌樂院考祖宗朝故事以啓。" 礪石又啓曰: "禮曹正郞閔頤未仕滿陞授僉正。 雖曰取稟, 有妨於法, 請改之。" 上問左右。 世佐對曰: "以人器相當擬望, (詮)〔銓〕 曹之任也。 況稟上敎, 雖未仕滿用之何妨?" 上曰: "然。"

【史臣曰: "正殿用女樂, 非古也。 我朝自世祖朝始用之, 特一時權宜之制, 非謂可傳於後世也。 上, 聖學高明, 深知不可, 至證以季桓之事曰: ‘革之何難?’, 其慮後世至矣。 爲大臣者, 固當力贊其美, 而乃曰: ‘不可遽革。’, 鄙陋無稽甚矣。"】


  • 【태백산사고본】 40책 26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2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예술-무용(舞踊) / 풍속-풍속(風俗)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법제(法制)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