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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59권, 성종 22년 11월 29일 신축 2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사간 안팽명 등이 이창신이 지제교에 합당하지 않음·중은 부모의 재산을 가질 수 없게 할 것 등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간(司諫) 안팽명(安彭命)과 장령(掌令) 이거(李琚)가 아뢰기를,

"이창신(李昌臣)은 지제교(知製敎)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영사(領事) 이극배(李克培)가 대답하기를,

"신(臣)의 생각으로는, 지제교는 근시(近侍)하여 논사(論思)하는 벼슬이 아니므로 제수(除授)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도 또한 그러하나, 대간(臺諫)이 아뢴 것이 이와 같으니,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박안성(朴安性)이 아뢰기를,

"신(臣)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였을 때 도내의 절이 큰 고을에는 거의 1백여나 되었고 작은 고을에는 4, 50이었으며 또 새로 짓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전(大典)》에 중[僧]을 뽑는 법이 있어서 중이 되는 길이 넓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모든 도(道)의 고을 사면(四面)에 각각 큰 절 하나만을 남기고 그 나머지는 다 헐며, 또 대선(大選)1151) 하는 법을 고쳐서 중이 되는 길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도첩(度牒)이 없는 중과 새로 지은 절을 살펴서 죄주는 것은 이미 법을 세운 것이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헐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 법이 있으니, 절을 헐지 않더라도,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잘 살펴서 중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게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거(李琚)가 아뢰기를,

"대선하는 법이 《대전》에 실려 있기는 하나 아름다운 법이 아니니, 진실로 빨리 고쳐야 마땅합니다. 삼국(三國) 때에는 군액(軍額)이 매우 많았으나, 이제는 삼한(三韓)을 통합하였어도 군액이 도리어 적은 까닭은 참으로 중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조(前朝)1152) 에는 중들이 매우 많아서 군액이 매우 적었으므로, 중으로 군을 만들어 승군(僧軍)이라 불렀는데, 후세 사람이 보기에 매우 아름답지 않습니다. 신이 《원·속육전(元續六典)》1153)《경제속록(經濟續錄)》1154) 을 보니, ‘중이 되어 어버이를 떠난 자는 속인(俗人)과 같지 않으므로, 부모의 물건일지라도 나누어 주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제는 이 법이 없어졌으므로, 근자에 노회신(盧懷愼)의 첩이 낳은 아들인 중이 본부(本府)에 장고(狀告)하여 집과 재물을 다투니, 중이 된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바야흐로 《대전》을 감교(勘校)하니, 부모의 재물을 중이 된 자식에게 주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특진관 박숭질(朴崇質)이 아뢰기를,

"박안성이 아뢴 말이 매우 좋으니, 도첩이 없는 중과 절을 새로 짓는 것을 매우 징계하는 법을 모든 도의 감사에게 하유(下諭)하여 더욱 밝혀 단속하게 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박안성이 또 아뢰기를,

"전라 수영(全羅水營)은, 좌도(左道)는 순천(順天)에 있어서 방어가 매우 긴요하고, 우도(右道)는 해남(海南)에 있어서 방어가 조금 쉽습니다. 그러나 좌도의 수군(水軍)은 50명이고 우도는 1천 2백 명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우도의 수군을 좌도에 나누어 붙이거나 다른 군사를 더 주는 것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좌도는 본디 내례(內禮)라는 만호영(萬戶營)이었던 곳에 수영을 둔 지가 오래지 않습니다. 한명회(韓明澮)가 내례의 방어가 가장 긴요하다 하여 수영을 두기를 청하였고, 그 때 신이 순찰사(巡察使)가 되어 가서 살펴보니 바로 고기를 잡는 왜인(倭人)이 왕래하는 곳이므로 방어가 과연 긴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영을 두고 여러 진(鎭)과 여러 포(浦)의 군인을 뽑아서 여기에 붙였습니다. 병조(兵曹)에 물으면 알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20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사법-법제(法制)

  • [註 1151]
    대선(大選) : 고려와 조선조 때 승과(僧科)에 합격한 중의 법계(法階).
  • [註 1152]
    전조(前朝) : 고려(高麗).
  • [註 1153]
    《원·속육전(元續六典)》 : 《경제육전(經濟六典)》과 《속육전(續六典)》.
  • [註 1154]
    《경제속록(經濟續錄)》 : 《육전속록(六典續錄)》.

○御經筵。 講訖, 司諫安彭命、掌令李琚李昌臣不合知製敎, 請改正。 上問左右。 領事李克培對曰: "臣意謂, 知製敎非近侍論思官, 授之無妨。" 上曰: "予意亦以爲然, 然臺諫所啓如此, 遞之可也。" 特進官朴安性啓曰: "臣爲全羅道觀察使, 道內寺社, 大邑則幾至百餘, 小邑則四五十, 又多新創, 且《大典》有選僧之法, 而爲僧之路廣。 臣意謂, 諸道郡縣, 四面各存一大寺, 其餘皆毁撤, 且革大選之法, 以杜爲僧之路。" 上問左右。 克培對曰: "無度牒僧人與新創寺社, 檢察科罪, 已有立法, 何必破毁。" 上曰: "已有其法, 雖不毁寺社, 監司守令, 若能糾檢, 使僧人不得恣行可也。" 李琚曰: "大選之法, 雖在《大典》, 然非美法, 固當速改。 (王)〔三〕 國時, 軍額甚多, 今則統合三韓, 而軍額反少者, 良由僧人之多也。 前朝, 僧徒甚繁, 而軍額甚少, 故以僧人爲軍, 而名曰僧軍, 於後人所見, 甚不美。 臣見《元》《續六典》《經濟續錄》有曰: ‘爲僧離親者, 不與俗人同, 雖父母之物不得分給’, 今無此法故近者盧懷愼妾子僧狀告本府, 爭家舍財寶, 爲僧之道, 果若是乎? 今方勘校《大典》, 父母財物不許僧人子息事載錄何如?" 上曰: "可。" 特進官朴崇質啓曰: "安性所啓之言甚善, 無度牒僧人與新創寺社痛懲之法, 下諭諸道監司, 申明檢擧何如?" 上曰: "可。" 安性又啓曰: "全羅水營, 左道在順天, 防禦甚緊, 右道在海南, 防禦稍歇, 然左道水軍五十名, 右道則一千二百名。 臣意以右道水軍, 分屬左道, 或以他軍加給何如?" 上問左右。 克培對曰: "左道, 本萬戶營, 名曰內禮, 設水營未久矣。 韓明澮, 以內禮防禦最緊, 請設水營, 其時臣爲巡察使往審之, 乃釣魚倭人往來之處, 方禦果緊, 乃設水營, 抄諸鎭諸浦軍人以屬之, 若問兵曹可知。" 上曰: "可。"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20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