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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59권, 성종 22년 11월 25일 정유 2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영사 윤호가 경차관 정성근이 이미 벤 벼의 뿌리를 보고 등급을 매긴 것이 합당하지 않음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영사(領事) 윤호(尹壕)가 아뢰기를,

"경기 연분 경차관(京畿年分敬差官) 정성근(鄭誠謹)이 벼를 이미 베어 들인 뒤에 벼의 뿌리가 크고 작은 것으로 등급을 매겼으므로, 이 때문에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다 국문(鞫問)을 당하고 이서(吏胥)도 장차 이에 연좌되어 사변(徙邊)1144) 될 것이니, 편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경기 감사(京畿監司)도 이것을 말하였다. 대저 물이 축축한 땅은 곡식이 여물지 못하였더라도 그 뿌리와 밑줄기가 물에 잠겨 습기를 머금어 커지고, 습기가 없는 땅이라면 곡식이 많이 여물었더라도 그 뿌리가 말라서 작아지니, 이것으로 등급을 매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지사(知事) 이극증(李克增)이 아뢰기를,

"연분(年分)1145) 을 매기는 법은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벼를 아직 베지 않았을 때에 풍흉(豐凶)을 살펴보고 등급을 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미 벤 뒤에 벼 뿌리의 크고 작은 것으로 그 등급을 정한다면 매우 옳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감사가 국가의 용도(用度)를 헤아리지 않고 다만 백성에게 원망받을 것을 염려하여 연분의 등급을 너무 가볍게 잘못 매긴 것도 매우 적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많이 거둬들이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아래에서도 반드시 순종할 것이므로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성근은 범상한 무리가 아닌데, 이러한 큰일을 어찌 잘 살펴서 하지 않았겠는가? 정성근이 오거든 다시 의논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극증의 이 응대(應對)에는 폐단이 없지 않다. 나라의 세법(稅法)이 가볍더라도 상세(常稅) 이외의 과렴(科斂)1146) 과 역역(力役)이 훨씬 더 많은데, 이극증은 일찍부터 귀현(貴顯)하여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벼슬을 지내지 않았으므로 그 말이 이러하였다."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1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재정-전세(田稅) / 인물(人物) / 농업-농작(農作) / 역사-편사(編史)

  • [註 1144]
    사변(徙邊) : 조선조 때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邊方)에서 살게 하던 형벌. 세종(世宗) 때부터 북변(北邊) 개척을 위한 정책의 하나로 실시되었음.
  • [註 1145]
    연분(年分) : 조선조 세종(世宗) 때부터 실시한 조세 제도의 하나. 그 해의 농사의 흉풍(凶豊)에 따라 상상전(上上田)에서 하하전(下下田)까지 9등급으로 나누었음.
  • [註 1146]
    과렴(科斂) : 나누어 매겨서 거둬들임.

○御經筵。 講訖, 領事尹壕啓曰: "京畿年分敬差官鄭誠謹, 禾穀已刈取後, 以禾根大小爲等第, 以此諸邑守令皆被鞫, 而吏胥亦將坐此徙邊, 似未便。" 上曰: "前日, 京畿監司亦言之。 大抵水濕之地, 則穀雖未稔, 其根莖沈水浸漬而大, 若非水濕之地, 則穀雖豐稔, 其根乾燥, 而小不可以此爲等第也。" 知事李克增啓曰: "年分之法, 監司、守令, 於禾穀未刈時, 審視凶稔定等第矣。 若於已刈之後, 以禾根大小, 定其等第, 則甚不可。 然今之監司, 不計國家用度, 但恐取怨於民, 年分等第, 失於太輕, 亦甚未便。" 上曰: "人主, 以厚斂爲心, 則下必承順, 其弊不貲, 誠謹非常流也。 如此大事, 豈不詳察爲之乎? 待誠謹之來, 更議可也。"

【史臣曰: "克增是對, 不無弊焉。 國之稅法雖輕, 而常稅外科斂力役, 其數倍多。 克增早貴顯, 不經親民之職, 故其言如此。"】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1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재정-전세(田稅) / 인물(人物) / 농업-농작(農作)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