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 부원수 이계동을 인견하고 북정의 경과 상황을 듣다
임금이 북정 부원수(北征副元帥) 이계동(李季仝)을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경(卿)은 절역(絶域)을 왕래 하였으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편력한 고난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수만의 무리를 몰고 헤아릴 수 없는 땅에 들어갔는데, 내가 성패(成敗)를 몰라 자나 깨나 마음에 잊은 적이 없더니, 마침 적이 다 달아나 숨어버려 크게 이기지는 못하였으나, 군사를 완전히 하여 돌아왔으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신(臣)이 험난하고 먼길에 군사와 말이 지칠세라 매양 염려하였으나, 본도(本道)에 이르러서는 군사와 말이 장건(壯健)하여 사람마다 선봉(先鋒)이 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에 알타리(斡朶里)의 마소를 빼앗아 간 올적합(兀狄哈)이 화해하려고 알타리의 집에 왔으므로, 신들이 사기(事機)를 누설할까 염려하여 먼저 12인을 꾀어서 경성(鏡城)에 가두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가두었습니다. 신이 먼저 강을 건너고 제장(諸將)이 이어서 이르러 20리 쯤 되는 곳에서 머물러 자고, 김장손(金長孫)을 시켜 우리 군사 50인과 알타리 60인을 거느리고 대군(大軍)에 앞서서 체탐(體探)하러 들어가게 하였는데, 허종(許琮)이 김장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어쩌다가 길에서 올적합을 만나거든 저들이 적어서 엄습(掩襲)할 만하거든 엄습하여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 저들이 많아서 엄습할 수 없거든 삼가 피하여 알지 못하게 하라.’ 하였으나, 김장손 등이 적 8인을 만나서 죄다 잡지 못하여 적이 달아나 부락에 알리게 하였으니, 이것이 김장손의 잘못이었습니다. 신들이 처음에는 밤에 달려가 돌격하려 하였으나, 제장이 다 말하기를, ‘적이 복병하여 요격(邀擊)한다면 이것은 위험한 방도이니, 여기에 하영(下營)하고 내일 먼동 틀 때에 달려 들어가 분격(奮擊)하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신들이 그 계책을 옳게 여기고 적의 소굴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잤습니다. 23일에 적의 소굴로 쳐들어갔는데 적이 이미 달아나 숨었으므로, 허종이 정유지(鄭有智)·엄귀손(嚴貴孫)·허희(許熙)를 나누어 보내어 집을 불살라 없앴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집이나 불태웠는가?"
하니, 이계동이 말하기를,
"신(臣)은 불꽃이 충천(衝天)해 치솟았기 때문에 멀리서 세어 보았는데 4백여 호(戶) 쯤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는 집이 어떠하던가?"
하니, 이계동이 아뢰기를,
"대들보 하나로 된 집이고 그 만듦새는 중국인이 사는 집과 서로 닮았는데, 이것은 올적합이 예전에 개원위(開原衛) 사람을 잡아다가 남녀가 혼인하여 여러 세대를 살아 왔기 때문에 그 사는 집의 만듦새가 이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살림살이가 어떠하던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보니, 알타리(斡朶里)와 올량합(兀良哈)은 사는 집에 풍족하지 못하여 집이 좁고 더러웠는데, 올적합은 집이 크고 깨끗하며 또 큰 궤를 만들어 쌀을 담고 집집이 쌍다듬잇돌[雙砧]이 있으며 밭이 기름지고 개·돼지·닭·오리도 많이 길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와집이 있던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다 초가였습니다. 적이 쌓아 둔 곡식을 군사가 가져다가 말에게 먹였고, 알타리들은 본디부터 적이 물건을 간수하여 두는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땅을 파고 여자의 옷과 비단을 찾아내어 나누었습니다. 그날은 적의 소굴에 하영(下營)하여 잤는데, 그 곳에는 나무가 없으므로 문 널빤지와 버드나무를 가져다가 울짱을 설치하고 머물러 잤고 허종은 며칠 동안 그대로 머물러서 적의 형세를 보려 하였습니다. 한밤에 아속(阿速)이 도망하여 돌아와 외치며 진중(陣中)으로 들어왔는데, 허종이 신을 불러 말하기를, ‘아속은 본디 올적합과 사귀어 이 곳을 왕래한 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왔으므로 그 정상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대가 장막 안에서 아속을 데리고 곁에서 자며 찬찬히 그 정상을 물으라.’ 하기에, 신이 아속을 데리고 장막으로 돌아가 그 정상을 캐어 물었으나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저 적들이 달아나 숨은 곳을 네가 아느냐? 지금 쫓아가면 장건하고 용맹한 자를 잡지는 못하더라도 처자들을 잡을 수는 있겠느냐?’ 하니, 아속이 말하기를, ‘강 북쪽 들 밖의 한 곳에 적들이 처자를 숨긴 곳인 듯하나, 이 들은 다 가파른 바윗돌이고 또 습한 곳이 있어서 밭을 갈아 먹지 못하거니와 말을 달리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 적들의 말은 오랫동안 머물러 두면서 기른 것이고 우리 군사의 말은 멀리 오느라 지쳤으니, 쫓더라도 적이 퇴거(退去)하면 잡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허종이 신에게 말하기를, ‘어제 제장과 의논하여 머물러 적의 형세를 보기로 정하였으나, 밤에 다시 생각하니 군사와 말의 양식으로 가져온 것이 거의 떨어졌는데, 며칠 머물렀다가 군사를 돌이켜 갈 즈음에 저 적들이 중간에서 요격(邀擊)한다면 예정한 날짜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니, 군졸이 중도에서 굶주려 괴로울 것이다.’ 하므로, 제장을 불러 함께 의논하니, 모두 말하는 것이 다 같았습니다.
24일에 군사를 돌이켜 오는데, 저 적들이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알타리를 부르고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하늘이 개벽한 뒤로 조선이 여기에 와서 우리를 침범한 적이 없었는데 너희들이 길잡이가 되어 우리 가산(家産)을 불살라 없애거니와, 조선 군사는 장성(長城) 안으로 들어가겠으나 너희는 어디로 가겠느냐?’ 하므로, 알타리가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여러 번 국가를 침범하였으므로 국가에서 우리들에게 명하여 따라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온 것이다.’ 하니, 적이 또 말하기를, ‘너희가 조선을 위한다면, 어찌하여 조선의 사모(紗帽)를 쓰지 않고 우리들의 의관(衣冠)을 착용하느냐?’ 하였습니다. 신이 15리쯤 갔는데, 저 적들 중 대여섯 사람 또는 일여덟 사람 또는 서른 남짓한 사람이 말을 달려 쫓아왔는데, 우리 군사에서 3백 보나 4백 보쯤 떨어져 있었으나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의 소굴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서 하영하여 머물러 잤으나, 적이 와서 범하지 못하였습니다.
25일 행군할 때에 신과 육한(陸閑)·엄귀손(嚴貴孫)이 한후(捍後)1132) 하여 왔는데, 머물러 잔 곳에서 대여섯 마장쯤 떨어진 곳에서 적 60여 인이 산허리를 타고 왼쪽을 끼고 오고, 또 60여 인이 산허리를 타고 오른쪽을 끼고 오고 또 1백여 인이 뒤를 싸는 듯이 왔습니다. 모화관(慕華館)의 지세로 비교하여 본다면, 오른쪽을 낀 적은 성밑의 멧뿌리에 있는 것 같았고, 왼쪽을 낀 적은 예빈시(禮賓寺)의 메뿌리에 있는 것 같았으며, 뒤를 싸는 듯한 적은 경영고(京營庫)의 다리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육한의 군사는 모화관 문앞에 있는 것 같았고, 엄귀손의 군사는 관지(館池)의 담 모퉁이에 있는 것 같았으며, 신의 군사는 도장동(都藏洞)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엄귀손은 그 왼쪽을 쏘고 육한은 그 오른쪽을 쏘며 역전(逆戰)하면서 오고 신은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오니, 마치 사현(沙峴) 아래에 있는 것 같았고 엄귀손의 군사는 그 뒤에 조금 처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육한의 군사가 패주하여 와서 거의 신의 진(陣)을 넘어가려 하므로 신이 장검(長劍)을 뽑아 육한을 불러 베려 하였으나, 육한이 군사들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신이 미처 분별하지 못하였고, 육한의 군사가 도로 우리 진 뒤로 달려갔으므로 달아나던 군사도 안정되었습니다.
신이 돌아보니, 일곱 명의 적이 육한을 쫓아 거의 말고삐를 잡게 되었고 육한은 여섯 대의 화살을 맞았는데, 살갗에는 다친 데가 없었고 한 대의 화살만이 팔을 꿰었으나, 육한은 형세가 급박하므로 뽑아 버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신의 군관(軍官) 이지방(李之芳)·정은부(鄭殷富)·구현휘(具賢輝) 등 장사(壯士) 10여 인이 일제히 활을 쏘니, 적이 화살에 맞기도 하고 말에서 떨어지기도 하였는데, 양군은 서로 겨우 10보(步)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군사 두 사람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적이 칼을 뽑아 쳤으나,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작은 언덕에 올라가 굽어보며 쏘니, 양군이 쏘는 화살이 비 오는 듯하였는데, 적은 궁박하여 활을 반만 당겨 쏘았습니다. 신이 소리를 크게 지르며 말을 채찍질하여 언덕을 내려가니, 모든 군사가 죽을 각오로 싸우며 떨쳐 공격하였으므로, 적이 무너져 달아나는 것을 쫓아가 4급(級)을 베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죽고 다친 자는 몇 사람인가? 경(卿)은 또한 화살을 몇 번 쏘았는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신들이 참급(斬級)을 많이 하지 못하여 죽고 다친 자가 비록 많기는 하였으나 수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양군이 서로 가까운 곳에서 화살을 무수히 쏘았는데 싸움이 끝나고 화살을 주워 보니, 살대에 피가 깊이 묻은 것이 또한 많았으며 신도 서른 대 남짓한 화살을 쏘았습니다. 적의 화살에 맞으면 산으로 올라가거나 수풀 속으로 숨었으며, 한적은 등에 두 대의 화살을 맞고도 능히 활을 쏘았습니다. 이지방이 한적의 어깨를 쏘아 맞힌 것을 적이 화살을 뽑아 땅에 버렸는데, 싸움이 끝나고 주워 보았더니, 살대에 손가락만한 살점에 묻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교전(交戰)할 때에 포(炮)를 쏘았는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사세가 매우 급박하였으나, 포를 쏘는 사람들 중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자가 많았고 신들이 앞에 가려 섰으므로 포를 쏠 수 없었으므로, 단지 한 살[矢]만을 쏘았는데 적에 맞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갑옷을 입은 적은 얼마나 되던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겨우 20, 30인이고 그 나머지는 다 푸르게 물들인 반신(半身)의 납의(衲衣)1133) 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와 말은 하나도 죽거나 다친 자가 없었는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옥천(沃川)의 군인 김응보(金應輔)가 화살에 다리를 맞아 말에서 떨어져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으나 이튿날에 죽었고, 화살에 맞은 말은 서넛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니마차(尼麻車)에서 도골(都骨)까지는 며칠길이던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사람들은 대엿샛길이라 하나, 확실히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알타리들은 우을미거 올적합(于乙未車兀狄哈)과 대대로 원수인데, 도골에 가려면 길이 우을미거를 지나므로 그들에게 잡힐 것을 두려워하여, 할아비 때부터 도골에 왕래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니마차에서 며칠길이나 떨어졌는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신은 강을 건넌지 9일 만에야 그 곳에 닿았는데 만약 사명을 받든 평상시의 행차라면 예니렛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신들이 28일에 남라현평(南羅峴平)에 하영하여 머물러 자고 어둑어둑한 새벽에 행군할 때에 허종이 윤성경(尹成冏)을 시켜 장사(壯士) 30인을 거느리고 뒤에 쳐져서 적을 엿보게 하였는데, 적 7인이 하영하였던 곳에서 주위를 몇 바퀴 돌기에, 윤성경이 말에서 내려 잃은 물건을 줍는 듯한 형상을 지으니, 적이 말을 타고 일시에 소리를 지르고 도로 산속으로 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크게 이기지는 못하였더라도 적은 위세를 두려워하여 떨 것이다."
하니, 이계동이 아뢰기를,
"신이 올량합의 말을 들으니, 처음에는 올적합들이 말하기를, ‘올량합 다섯 사람이 우리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하고, 조선의 열 사람이 우리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하니 만약 조선이 들어와 침범한다면 곧 스스로 선마(騸馬)1134) 와 사람을 몰아다가 우리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이 될 것이다.’ 하기에, 신들이 그 말을 듣고 이를 갈고 속을 썩혔는데, 저 적들이 한 번 패한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으니, 어찌 위세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또, 성준(成俊)이 울지(鬱地)에 군사를 주둔하였으며 ‘3백 보쯤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는데, 파진(罷陣)하고 돌아올 때에는 큰 나무를 베어 성문을 가리어 막았다.’ 하니, 적이 보면 굉장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 땅에 좁고 막힌 곳으로 설험(設險)1135) 한 곳이 있던가?"
하니, 이계동이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에는 울지가 겨우 10리쯤이라고 들었는데, 21일 4경(更)에 처음 들어가 말을 재촉하여 갔으나 22일 신시(申時)에야 나왔으므로, 비로소 울지가 60여 리인 줄 알았습니다. 큰 나무가 빗살처럼 빽빽이 하늘을 가리고 작은 길이 겨우 통하는데, 나뭇가지가 길을 덮어서 활통[弓鞬]·살통[矢服]이 나뭇가지에 걸릴 것이므로, 1백 50명을 시켜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큰 나무를 베어 없애게 하였더니 베더라도 반드시 다른 나무에 걸려서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끝내 해를 보지 못하다가, 한 곳에 이르니 1백 보쯤 나무가 없어서 비로소 해를 보았습니다. 한 곳에 이르니 좌우가 높고 험하여, 적이 성책을 설치하여 오륙십명의 군사를 시켜 지키게 한다면 1만 명이 당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울지에 못 미쳐서 또 하순평(何順平)이 있는데, 좌우의 산세(山勢)가 누에 머리처럼 서로 솟고 물이 세 번 굽어 흘러서 지세가 험하고 가팔랐습니다. 동쪽에 적이 다니는 길 세 곳이 있는데, 남눌(南訥)·사거(沙車)·우을미거(于乙未車)·대소거절(大小車節) 등이 나오는 곳이고, 서쪽은 해서 화라온(海西火剌溫)이 나오는 곳입니다. 적이 험한 곳에 의거하여 요격(邀擊)한다면 이 곳도 당하기 어려운 곳이겠습니다. 신이 그 곳에 이르러 선봉(先鋒)이 되어왔는데, 사람의 자취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계동의 병든 어머니에게 식물(食物)을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16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註 1132]한후(捍後) : 후방을 경계하며 방어함.
- [註 1133]
○上引見北征副元帥李季仝曰: "卿往來絶域跋涉之苦, 何可勝言, 驅數萬之衆, 入不測之地, 予未知成敗, 寤寐之間, (末)〔未〕 嘗忘于懷, 適賊皆逃竄, 縱未大捷, 完師而還, 予甚喜焉。" 季仝啓曰: "臣每慮間關遠路, 士馬困疲, 及至本道, 則士馬壯健, 人人皆欲爲先鋒。 前者兀狄哈搶擄斡朶里牛馬, 欲和解來至斡朶里家, 臣等恐洩事機, 先誘十二人囚鏡城, 其餘人分囚諸邑。 臣先渡江, 諸將繼至, 二十里許止宿, 使金長孫率我軍五十, 斡朶里六十人, 先大軍體探而入。 許琮戒長孫曰: "幸路遇兀狄哈, 而彼寡可以掩襲則襲之, 毋使逃逸, 若彼衆不可掩襲則謹避之, 毋令知覺。 長孫等遇賊八人, 不能盡獲, 而俾賊逃告部落。 此長孫之過也。 臣等初欲犯夜馳突, 諸將皆曰: ‘賊若伏兵邀擊, 則此危道也。 莫如下營於此。 明日昧爽, 馳入奮擊。’ 臣等然其計, 距賊巢卄里許止宿, 卄三日馳至賊巢, 則賊已奔竄。 許琮分遣鄭有智、嚴貴孫、許熙焚蕩室廬。" 上曰: "焚燒幾室乎?" 季仝曰: "臣因火焰衝起, 望見數之, 則四百餘戶也。" 上曰: "居室何如?" 季仝曰: "一梁之室, 其制與唐人居室相似, 此則兀狄哈, 昔時搶擄開原衛之人, 男婚女嫁, 累代而居, 故其居室之制如此。" 上曰: "其計活何如?" 季仝曰: "臣曾見斡朶里、兀良哈, 居室不豐, 室廬阨陋。 兀狄哈則室大淨(絜)〔潔〕 , 又作大櫃盛米, 家家有雙砧, 田地沃饒, 犬豕雞鴨亦多畜矣。" 上曰: "有瓦屋乎?" 季仝曰: "皆茅屋也。 賊所積之穀, 軍士取以飼馬, 斡朶里等, 素知賊藏物處, 掘地搜得, 女服與匹段分之。 其日下營賊巢而宿, 其處無木, 但取門板與柳木設柵止宿。 許琮欲仍留數日, 以觀賊勢, 夜半阿速逃還, 呼入陣中。 許琮呼臣語之曰: "阿速本交兀狄哈, 往來此地久矣。 今見擄生還, 其情難測, 汝率阿速於幕中寢側, 徐問其情。 臣率阿速還幕, 窮問其情, 似無可疑。 臣問曰: ‘彼賊逃匿之處, 汝尋知之乎? 今若窮追, 則縱不獲壯勇, 可獲妻子乎?’ 阿速曰: ‘江之北野外一處, 似是賊等匿妻子之處, 然此野皆巉巖之石, 又有沮洳處, 不得耕田而食, 馳馬甚難, 況彼賊之馬, 久休留養, 我軍之馬, 遠涉疲困, 縱使追逐, 賊引去則擒獲爲難。‘ 許琮謂臣曰: ‘昨日已與諸將議定, 留觀賊勢, 夜更思之, 軍馬齎糧幾盡, 若留數日, 回軍之際, 彼賊邀截, 不能計日旋歸, 則軍卒必中道飢困。’ 呼諸將共議, 庶言皆同。 二十四日回軍, 彼賊登高峰呼斡朶里指天語之曰: 「此天開後, 朝鮮曾不來此侵我, 汝等嚮導, 焚蕩我家産, 朝鮮軍士則歸入長城中, 汝歸何往。’ 斡朶里答曰: ‘汝等屢犯國家, 國家命我等隨往, 故我等來耳。’ 賊又曰: ‘汝爲朝鮮, 則何不着朝鮮紗帽而着我等衣冠乎?’ 臣行至十五里許, 彼賊或五六人, 或七八人, 或三十餘人, 馳馬追至, 距我軍三四百步許, 不敢近之, 距賊巢二十里許, 下營止宿, 賊不能來犯。 二十五日行軍, 臣與陸閑、嚴貴孫捍後而來, 距止宿處五六里許, 賊六十餘人乘山腰, 挾左而來, 又六十餘人乘山脊, 挾右而來, 又百餘人擁後而來, 以慕華館地勢比之, 挾右之賊, 如在城底之岳, 挾左之賊, 如在分禮賓之岳, 擁後之賊如在京營庫之橋, 陸閑之軍如在慕華館門前, 嚴貴孫之軍如在館池墻隅, 臣之軍如在都藏洞。 貴孫射其左, 陸閑射其右, 逆戰而來, 臣則顧後徐行, 如在沙峴下。 貴孫軍少次其後, 陸閑軍北走奔來, 幾過臣陣, 臣拔長劍, 呼陸閑欲斬之, 閑在軍中, 臣未及分辨, 閑軍還馳向我陣, 後奔軍亦定。 臣顧見之, 七賊追閑, 幾執馬韁, 閑中六矢, 肌膚無傷, 但一矢穿臂, 閑因勢迫, 不暇抽去。 臣之軍官李之芳、(鄭殷當)〔鄭殷富〕 、具賢輝等壯士十餘人, 齊發射之, 賊或中矢, 或墜馬, 兩軍相距纔十步許, 我軍二人墜馬, 彼賊拔劍擊之, 然不重傷。 臣登小岸, 臨而射之, 兩軍發矢如雨, 賊窘迫半彎而射。 臣高聲鞭馬下岸, 諸軍殊死戰奮擊, 賊奔潰, 追斬四級。" 上曰: "死傷者幾人乎? 卿亦幾發矢乎?" 季仝曰: "臣等不多斬級, 死傷者雖多, 不可定數, 然兩軍相迫, 無數發矢, 戰罷拾矢, 血深矢竹者亦多。 臣亦發三十餘矢。 賊中箭則或走登山, 或竄伏林莽, 一賊背穿兩矢, 猶能射之, 李之芳射中一賊肩甲, 賊抽矢投地, 戰罷拾見, 則矢竹着肉如指。" 上曰: "交戰時放炮乎?" 季仝曰: "事勢大迫, 放炮人多不被甲, 臣等蔽立於前, 不能放炮。 但發一矢, 適中賊。" 上曰: "賊着甲者幾何?" 季仝曰: "僅二三十人, 其餘皆着靑染半體衲衣。" 上曰: "我軍馬一無死傷者乎?" 季仝曰: "沃川軍人, 金應輔矢中股上墜馬, 絶而復蘇, 翌日乃死。 馬中矢者三四耳。" 上曰: "自尼麻車距都骨幾日程?" 季仝曰: "人云五六日程, 而然無的知者, 斡朶里等與亏乙未車 兀狄哈世讎, 若到都骨, 則路經亏乙未車, 畏其見獲, 自祖父未嘗往來於都骨。" 上曰: "我國距尼麻車幾日程乎?" 季仝曰: "臣渡江九日, 始到彼地, 若奉使平常之行, 則不過六七日之程。 且臣等二十八日, 南羅峴平下營止宿, 黎明行軍。 許琮令尹成冏率壯士三十人, 落後覘賊, 賊七人於下營處周回數匝, 成冏下馬如拾失物之狀, 賊乘馬一時高聲還向山間。" 上曰: "雖不大捷, 賊必畏威震懾也。" 季仝曰: "臣聞兀良哈之言, 其初兀狄哈等云: ‘兀良哈五人不敵我一人, 朝鮮十人不敵我一人, 若朝鮮入侵, 則是自驅騸馬人口, 資我農業耳。 臣等聞其言, 切齒腐心, 彼賊一敗以後, 更不現形, 豈不畏威乎? 且成俊屯兵鬱地云: ‘三百步許設木柵, 罷陣而還, 斫大樹蔽塞城門, 賊見之則必壯之矣。" 上曰: "彼地有阨塞設險之處乎?" 季仝曰: "臣等初聞鬱地僅十里許, 二十一日四更始入, 縱馬促行, 二十二日申時乃出, 始知鬱地六十餘里矣。 大木如櫛, 鬱密蔽空, 小路僅通, 木枝翳路, 弓鞬矢服, 必爲木枝所罥, 使一百五十名持斧先入, 芟夷其大木, 則雖斫之, 必附他木, 不能落地, 竟不見天日。 至一處, 百步許無木, 始見天日, 至一處, 左右高險, 賊若設柵, 使五六十兵守之, 則萬夫莫敵也。 未及鬱地, 又有何順平, 左右山勢, 互起如蠶頭, 水三曲流, 地勢險巇, 東有賊路三處, 南訥沙車、亏乙未車、大小車節等出來之處, 西則海西 火剌溫出來之路, 若賊據險邀擊, 則此亦難當處。 臣至其處, 爲先鋒而來, 頓無人跡。" 賜季仝病母食物。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16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註 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