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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59권, 성종 22년 11월 10일 임오 1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북정 도원수의 종사관 이수언이 북정의 상황에 대한 서장을 가져 오다

북정 도원수(北征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 이수언(李粹彦)이 서장(書狀)을 가지고 와서 아뢰었는데, 그 서장에 이르기를,

"이달 15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는데 지나쳐 가는 내들이 반은 얼음이고 반은 물이라 군사를 건네기 어려웠고, 닷새를 가서 19일에 보을현(甫乙峴)에 이르렀습니다. 척후(斥候) 김장손(金長孫) 등이 18일 밤에 간간(山間)에 불빛이 희미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올적합(兀狄哈) 8인이 머물러 자는 것을 탐지해내어 곧 애워싸 3인은 참수(斬首)하였으나 4인은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외치기를, ‘나는 성 밑에 사는 올량합(兀良哈) 용달(用達)이다.’ 하므로 사로잡았습니다. 신(臣)이 달아난 자가 여러 부락으로 달려가 알릴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재촉하여 가서 전원장(前援將) 성준(成俊)은 울지령(鬱地嶺) 위에 주둔하고 중원장(中援將) 이굉(李紘)·후원장(後援將) 한충인(韓忠仁)은 울지령 남쪽 동구(洞口)에 주둔하고 전위장(前衛將) 이소(李昭)·우위장(右衛將) 허희(許熙)삼기(三岐)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곧 적이 다니는 길의 요충(要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2일에 울지를 넘어가서 동구에 이르러, 김장손 등이 문득 올적합 1백여 기(騎)를 만나 싸웠는데, 길잡이 올량합 아랑개(阿郞介)가 화살에 맞고 아속(阿速)이 잡히고 홀빈아(忽賓阿)가 말을 빼앗겼으며, 적은 대군(大軍)을 보고 다 달아났습니다. 이날 적의 소굴에서 1식(息)1118) 쯤 떨어진 곳에 결진(結陣)하여 잤습니다. 23일에 적의 소굴에 닿았는데, 적의 무리가 산과 들로 달아나 흩어졌으므로, 장수들을 여러 부락으로 나누어 집들을 불살라 없앴으며, 남녀 각각 하나를 참획(斬獲)하고 말 세 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적의 소굴에 결진하여 잤습니다. 그런데 그날밤에 아속이 도망쳐 돌아와서 말하기를, ‘올적합들이 처음에는 입정(入征)의 소식을 몰랐는데 21일에 도망하여 돌아간 4인이 달려가 알렸으므로 알게 되었고, 척후군(斥候軍)과 만나서 싸운 것은 울지의 험한 곳에서 맞아 싸우려 한 것이었으나 대군이 이미 울지를 넘어왔기 때문에 대적할 수 없으므로 달려서 돌아가 제집에 숨은 것입니다. 올적합들이 말하기를, 「도망하여 돌아온 4인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이 죄다 죽거나 잡혔을 것이니, 4인이 참으로 우리를 살린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군마(軍馬)가 그렇게 많은 것은 우리들이 귀로만 들었지 눈으로 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그대로 주둔하여 적의 형세를 보려고 이미 제군(諸軍)에 영을 내렸으나, 밤에 다시 생각하니, 제군이 15일의 양식을 가져왔는데 이제 이미 9일이 되었고 군사가 돌아갈 때에 다시 적과 싸우게 되어 빨리 돌아가지 못한다면 도중에서 인마(人馬)가 굶주려 괴로울 것이므로, 마지못하여 24일에 군사를 돌이켜 적의 소굴에서 20여 리쯤 떨어진 곳에 하영(下營)1119) 하였습니다. 25일에 행군할 때 좌아장(左亞將) 이계동(李季仝)한후(捍後)1120) 하여 왔는데, 머물러 잤던 곳에서 대여섯 마장쯤 떨어진 내와 숲이 막힌 곳에서 적 2백여 기(騎)가 한후군을 뒤따라 닥쳤으므로 한참 접전하였습니다. 우리 군사가 일제히 분발하여 싸우니 적이 견디지 못하여 달아나므로 우리 군사가 너댓 마장까지 쫓아가서 4급(級)을 참획하였고, 화살에 맞은 자가 태반이었으므로 죽거나 다친 자가 반드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친 자들은 수풀로 들어가고 건장한 자들은 산으로 올라갔으므로 끝까지 쫓아가서 잡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군사는 용양 도장(龍驤都將) 육한(陸閑)·대장(隊將) 조원장(趙元璋)·장한명(張漢明)·정건(鄭鍵)과 군사 10여 인이 화살에 맞았으나, 다들 많이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시(午時)에 행군하여 울지에 들어와 숲속에서 머물러 잤으며, 28일에 사편평(沙便坪)에 이르러 결진하여 머물러 잤습니다. 그런데 적은 싸움에 진 뒤부터 그 때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는 11월 2일에 강을 넘어 돌아올 것을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12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註 1118]
    식(息) : 1식은 30리.
  • [註 1119]
    하영(下營) : 진을 치고 주둔함.
  • [註 1120]
    한후(捍後) : 행군 때에 후방을 경계하고 지킴.

○壬午/北征都元帥從事官李粹彦賫書狀來啓: "其書云: ‘本月十五日, 率軍渡江, 所經諸川, 半氷半水, 渡兵爲難。 行五日, 十九日至甫乙峴, 斥候金長孫等, 十八日夜見山間有火光, 微明偵知兀狄哈八人止宿。 卽圍之, 三人斬首, 四人逃走, 一人則呼曰: 「我城底兀良哈 用達也」 以故生擒。 臣慮逃走者奔告諸部, 促軍而行, 令前援將成俊屯于鬱地嶺上, 中援將李紘、後援將韓忠仁屯于鬱地南邊洞口, 前衛將李昭、右衛將許熙屯于三岐, 乃賊路要衝也。 二十二日, 踰鬱地行至洞口, 金長孫等忽遇兀狄哈百餘騎相戰, 指路兀良哈 阿郞介中箭, 阿速被獲, 忽賓阿馬匹被奪, 賊見大軍皆退去。 是日距賊巢一息許, 結陣而宿。 二十三日到賊巢, 賊徒逃散山野, 分遣諸將于諸部落, 焚蕩室廬, 斬獲男女各一, 得馬三匹, 仍結陣于賊巢而宿, 其夜阿速逃還曰: 「兀狄哈等初不知入征之奇, 二十一日逃還四人奔告, 乃知與斥候軍相逢而戰者。 欲於鬱地險處邀截, 而大軍已踰鬱地不相敵, 故奔走而歸, 匿其家口也。 兀狄哈等曰, 若非逃還四人, 我等必盡殺擄, 四人實生我也, 又曰, 軍馬如此其多, 我等但耳聞之, 未曾眼見矣。」 臣初欲留屯, 以觀賊勢, 已令于諸軍, 夜更思之, 諸軍齎十五日糧, 今已九日, 師還時更與賊相戰, 不能速還, 則在途人馬, 想必飢困, 不得已二十四日還軍, 距賊巢二十餘里許下營。 二十五日行軍, 左亞將李季仝捍後而來, 距止宿處五六里許, 川林阨塞之地, 賊人二百許騎, 追迫後軍, 接戰良久, 我軍齊奮, 賊不能支, 奔北而走。 我軍追至四五里, 斬獲四級, 中箭者太半, 死傷必多, 然傷者入林藪, 壯者登山, 未得窮追捕獲。 我軍則龍驤都將陸閑、隊將趙元璋張漢明鄭鍵及軍士十餘人中矢, 皆不重傷。 午時行軍, 入于鬱地, 止宿林木之中。 二十八日到沙便坪, 結陣止宿, 賊自敗戰後, 至今一不現形, 來十一月初二日, 定還越江矣。"


  • 【태백산사고본】 40책 259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112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