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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58권, 성종 22년 10월 12일 을묘 5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고산리의 군공에 대해 논의하다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고산리(高山里)의 군공(軍功)을 올렸는데, 1등에는 유호(兪顥) 등 1백 24명이고, 2등에는 유중성(劉仲誠) 등 84명이고, 3등에는 김신동(金信仝) 등 71명이고, 4등에는 성첩(城堞)을 지킨 김외동(金外同) 등 1백 49명이었다.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강지(姜漬)만포(滿浦)에 적변(賊變)이 있음을 듣고 가서 구원하고자 하여 서자명(徐自明)과 의논하니, 서자명이 말하지를, ‘지금 만약 다른 진(鎭)에 가서 구원하다가, 적(賊)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입하면〉 성(城)이 반드시 함락(陷落)될 것이다.’ 하였다. 강지(姜漬)가 또 서자명(徐自明)으로 하여금 유호(兪顥)에게 물어 보게 하니, 그도 가서 구원(救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조금 후에 과연 적변(賊變)이 있었다. 만약 강지의 말대로 만포(滿浦)를 구원하러 갔었다면 군기(軍機)를 크게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강지가 도리어 1등으로 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영돈녕(領敦寧) 이상을 불러 이 뜻을 아울러 의논토록 하라."

하니, 심회(沈澮)·홍응(洪應)·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이번에 군공(軍功)은 기해년1054) 의 관례에 의하여 시행하였는데, 체탐(體探)한 군인(軍人)은 3등의 예(例)에 의하여 논상(論賞)하였습니다. 서자명(徐自明)유호(兪顥)는 군기(軍機)를 잃지 않고 성공(成功)을 거두었으니, 마땅히 중상(重賞)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 1등에 두었으니, 다시 무엇을 더 논하겠습니까? 천구(賤口)일 경우에는 베[布]로 상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1등은 3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2등은 2자급, 3등은 1자급을 더해 주며, 성첩(城堞)을 지킨 사람과 체탐(體探)한 갑사(甲士) 이석손(李石孫) 등은 2등의 예(例)에 의하여 시행할 것이며, 그 중에 천구(賤口)는 포화(布貨)로 상을 주게 하소서. 그리고 강지(姜漬)의 말과 유호(兪顥)의 대답은 다만 서자명(徐自明)의 입에서 나왔을 뿐이고, 다른 공증(公證)이 없으니, 아마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두 1등에 두었으니, 굳이 다시 거론(擧論)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전교(傳敎)하기를,

"이번의 의논을 보건대 성첩(城堞)을 지킨 자와 출전(出戰)한 자를 일괄적으로 논공(論功)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적(賊)들은 혹 성(城)의 한 모퉁이에 의지하기도 하고, 사면(四面)을 포위하여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성첩(城堞)을 지키는 자가 힘을 다해 굳게 방어(防禦)하여 함락(陷落)되지 않게 하였다면 진실로 공(功)이 있다 하겠지만, 이번 경우는 그와는 다르다. 가령 큰 진(鎭)에 변고(變故)가 있게 되면 성첩을 지키는 자도 반드시 많을 것인데, 그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신(臣)이 기해년에 서정(西征)하였을 적에 보루(堡壘)를 만든 자와 성에 머물러 지키던 자도 모두 논공(論功)하였었습니다. 이번에 성첩(城堞)을 지킨 자도 비록 출전(出戰)한 공은 없지만, 바야흐로 국은(國恩)을 희망하고 있으니, 헛되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한 바가 이와 같으나, 감히 의심을 풀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정승(政丞)의 말이 옳다. 그러나 원수(元帥)가 이미 그 공(功)에 대한 등급을 매겨 아뢰었으니, 군졸(軍卒)의 마음에도 국가(國家)에서 어떻게 공에 보답하려는 가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 만약 성첩을 지킨 자들도 출전(出戰)한 것에 의하여 논공(論功)한다면 뒤에도 반드시 그것을 본받아, 나는 성첩만 지켜도 상전(賞典)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힘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논공(論功)을 함은 마땅히 그 법대로 따라야 하는 것인데, 지금 공격과 포위를 당한 변(變)도 없으면서 성첩을 지킨 것만으로 공을 삼는 것은 아마도 옳지 못한 것 같다. 이번에 군공(軍功)은 원수(元帥)가 이미 네 등급으로 논계(論啓)하였지만, 등급을 매겨 내려간다면 5, 6등이나 7, 8등까지 이를 수가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원수에게 하서(下書)하여, 성첩을 지킨 자의 공로를 다시 등급을 매겨 아뢰게 함으로써 성첩을 지킨 자로 하여금 그 공의 있고 없음을 스스로 알게 하여 논상(論賞)하였으면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심회(沈澮)·윤호(尹壕)가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하교(下敎)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다. 윤필상이 다시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임금의 작상(爵賞)은 마땅히 군공(軍功)에 써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고산리(高山里)의 승리는 국가의 수치를 크게 씻은 것이므로, 군졸(軍卒)들이 반드시 머리를 들고 상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니, 지금 특별히 은전(恩典)을 베푼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기해년의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25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01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註 1054]
    기해년 : 기해 서정(己亥西征)을 말함. 성종 10년(1479)에 명나라에서 조선의 힘을 빌어 건주위 야인(建州衛野人)을 정벌한 일을 말하였는데, 처음에는 어유소(魚有沼)가 서정 대장(西征大將)이 되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압록강의 얼음이 얼어붙지 않아 도하 작전(渡河作戰)이 곤란하다 하여 회군(回軍)하였으므로, 다시 윤필상(尹弼商)이 서정 도원수(西征都元帥)가 되어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를 정벌하고 돌아왔음. 기해년은 1497 성종 10년이다.

○西北面都元(師)〔帥〕高山里軍功, 一等兪顥等一百二十四人; 二等劉仲誠等八十四人; 三等金信仝等七十一人; 四等守堞人金外同等一百四十九人。 傳曰: "向者, 姜漬滿浦有賊變, 欲往救之, 議於徐自明, 自明曰: ‘今若往救他鎭, 而賊乘其虛, 則城必陷矣。’ 又令自明問於兪顥, 亦曰: ‘不可往救。’ 俄而果有賊變, 若從姜漬之言, 往救滿浦, 則大失軍機矣。 今反居一等何也?" 召領敦〔寧〕 以上, 倂此意議之。 沈澮洪應尹壕議: "今次軍功, 依己亥年例施行, 體探軍人, 依三等例論, 自明兪顥不失軍機, 得成功, 宜加重賞, 然皆居一等, 更復何論? 若賤口賞布何如?" 尹弼商議: "一等超三資, 二等加二資, 三等加一資, 守(牒)〔堞〕 人及體探甲士李石孫等, 依二等例施行, 其中賤口, 以布貨賞之。 且姜漬之言, 兪顥之答, 但出於自明之口, 無他公證, 似未可信, 然皆居一等, 不須更論。" 傳曰: "觀今之議, 欲以守堞者, 槪諸出戰而論功, 然賊或依城一隅, 或攻圍四面, 而守堞者倂力固禦, 使不得陷, 則誠有功矣。 此則不如是矣, 假如巨鎭有變, 則守堞者必多, 亦將何以爲之?" 弼商啓曰: "臣於己亥年西征時, 營壘者及留戍者, 亦皆論功, 今之守堞者, 雖無出戰之功, 方希望國恩, 不可虛棄。 臣之所懷如是, 未敢解惑。" 傳曰: "政丞言是矣, 然元(師)〔帥〕 旣第其功以啓, 軍卒之心, 亦以爲國家何以酬功而希望矣。 今若以守堞者, 亦依出戰論功, 則後必效之, 以謂我但守堞而亦蒙賞典, 必不勉勵矣。 論功當一遵其法, 今無攻圍之變, 以守堞爲功, 似乎不可。 今之軍功, 元帥旣以四等論啓, 則等而下之, 可至五六等, 七八等矣。 予意以爲, 下書元帥, 令更第守堞者功勞以啓, 使守堞者, 自知其功之有無而論賞何如?" 沈澮尹壕啓曰: "上敎允當。" 弼商更啓曰: "臣意以爲, 人主爵賞, 當用於軍功, 高山里之揵, 大雪國恥, 軍卒必翹首待賞, 今特大霈恩典, 何妨?" 傳曰: "考己亥年例以啓。"


  • 【태백산사고본】 40책 25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101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