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 이극균이 고산리성에서 적을 물리친 전과를 치계하다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이 군관(軍官) 이석동(李石仝)을 보내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21일에 적(賊) 2백여 명이 고사리성(高沙里城)을 포위하므로 우리 군사가 뒤쫓아 잡아서 적(賊)의 머리 39급(級)을 베었는데, 그들이 도망하다가 배가 뒤집혀 죽은 자는 또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자, 이석동(李石仝)이 아뢰기를,
"지난 21일에 신(臣) 등이 척후장(斥候將)으로서 저들의 경계에 들어가 염탐하려고 길을 떠나 위원(渭原)·이산(理山) 등지에 도착하니, 첨사(僉使) 김윤제(金允濟)가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적(賊)이 세 갈래로 나누어 2, 3백 명이 떼를 지어 황성(皇城)·평림(平林)·망합동(亡哈洞)·가야지동(加也之洞)을 지나서 올 것이니 그대가 비록 들어가더라도 저들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수효가 적으므로 서로 대적할 수가 없으니, 속히 달려가서 구원하도록 하라.’고 하므로, 신(臣) 등이 거느린 군사 50여 명을 이끌고 옹후현(甕後峴)에 도착하니, 밤이 장차 새려고 했습니다. 신(臣)이 이익문(李益文)에게 이르기를, ‘고사리성(高沙里城)에는 군사가 적으니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야겠다.’ 하니, 이익문(李益文)이 거느린 군사 1대(隊)로써 고사리(高沙里)에 보내고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바로 만포(滿浦)로 향하여 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상하(上下)의 연대(煙臺)에서 불기운이 공중에 올라가고 또 화포(火炮)를 쏘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산 위를 보니 2인이 우리 무리를 바라보고서 백립(白笠)944) 으로써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 백립(白笠)을 자세히 살펴보니 곧 우리 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물어보니,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바야흐로 적(賊)과 별을외평(別乙外平)에서 싸우고 있습니다.’고 하므로, 신(臣) 등이 달려가서 보니 적(賊)이 강을 따라 포열(布列)하고는 강을 건너려는 듯하면서 강물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우리 군사도 또한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건너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그 실상은 적(賊)이 강을 건너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짐짓 성세(聲勢)를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진(鎭)에 가서 구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어느 사람이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적(賊)이 이미 고사리(高沙里)를 포위했습니다.’고 하므로, 신(臣) 등은 또 거느린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니, 적(賊)은 벌써 포위를 풀고서 매우 급하게 패하여 달아나다가 모두 절벽(絶壁)에 떨어졌으므로, 우리 군사가 이긴 기세(氣勢)를 타서 뒤쫓아 목을 베었는데, 무릇 39개나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賊)의 머리를 벤 사람은 누구인가?"
하자, 이석동(李石仝)이 아뢰기를,
"활을 쏜 사람들이 다투어 뒤쫓아 가서 목을 베었습니다. 또 도원수(都元帥)가 일찍이 여러 진(鎭) 영(令)을 내리기를, ‘적(賊)이 이르면 성중(城中)에서는 떠들지 말고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여 그때 그때의 형편에 따라 일을 적당히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이날에 첨절제사(僉節制使) 강지(姜漬)는 적변(賊變)을 듣고서 곧 성상(城上)의 궁가(弓家)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1인과 몽둥이 가진 사람 2인으로 하여금 몰래 숨어 엎드려 이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적(賊)이 강변(江邊)에 둔치고 통사(通事)를 불렀으나 짐짓 대답하지 아니했으며, 조금 후에 서자명(徐自明)이 누상(樓上)에서 대답하기를, ‘통사(通事)는 없다.’고 하니 적(賊)이 말하기를 ‘어째서 없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너희 나라 사람을 빼앗아 가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때 적(賊)의 보병(步兵)은 이미 몰래 강을 건너 국사당현(國祀堂峴)을 따라 방패를 끼고 강변(江邊)에 둔치고 있었으며, 또 강을 덮어 건너와서 적(賊)의 추장(酋長) 3인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서 사닥다리를 타고 성(城)에 올라서 돌을 뽑아내므로 우리 군사가 돌을 던지니 적(賊)이 성(城)에서 떨어져 달아나므로 군관(軍官) 유호(兪灝)가 쏘아서 그 이마를 꿰뚫었으며, 서자명(徐自明) 등이 또 2명을 쏘아서 죽이니 적(賊)이 모두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조전장(助戰將)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문(北門)을 나가서 그 장성(長成)에 가는 길을 누르고, 강지(姜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서 끝까지 뒤쫓아가니 적(賊)이 모두 절벽(絶壁) 아래로 떨어졌으므로, 우리 군사가 내려다보고서 이를 쏘았습니다. 그리고 적(賊)의 배가 좁아서 겨우 2, 3명만 용납하는데도 적(賊)이 건너기를 다투어 4, 5명이 같이 타게 되니, 배가 혹은 물에 가라앉기도 하고 혹은 물에 뜨기도 했는데, 그 중 1명이 화살에 맞아 놀라서 요동하면 배는 반드시 기울어져 뒤집히게 되어 이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성(城)에 오른 사람을 어떻게 적(賊)의 추장(酋長)인 것을 알 수가 있었는가?"
하니, 이석동(李石仝)이 아뢰기를,
"그 갑옷과 투구와 그 무리들을 지휘(指揮)한 것을 살펴보니, 적(賊)의 추장(酋長)인 것이 의심이 났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싸우다가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석동이 아뢰기를,
"화살에 맞은 사람은 6명이나 되지만, 겨우 그 피부만 상처를 입었을 뿐이고 한명도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賊)이 강 건너편에 있으면서 형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 군사가 그 도망해 숨은 놈을 찾아내어 저 적(賊)들에게 죽여서 보이고는 목을 베니, 적(賊)이 슬피 울면서 뛰기도 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賊)의 병졸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이석동이 아뢰기를,
"성(城)을 포위한 자는 2백여 명이나 되었고 강 밖에 있는 기병(騎兵)이 또한 2, 3백명이나 되었으며, 만포(滿浦)에서 형적(形跡)을 나타낸 자는 또 이보다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좌부승지(左副承旨) 권경희(權景禧)에게 이르기를,
"그런가? 이번 거사(擧事)는 그럴듯하다."
하니, 권경희가 대답하기를,
"요사이 국가에서 여러 번 오랑캐에게 욕을 당했으니 비록 좀도둑질하는 자를 사로잡았더라도 또한 기뻐할 것인데, 하물며 적(賊)이 스스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쳐들어왔는데도 목을 벤 것이 이와 같으니 기뻐할 만합니다."
하였다. 이석동(李石仝)이 아뢰기를,
"이미 적(賊)의 목을 베고는 사졸(士卒)을 시켜 적(賊)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너희를 대우하여 오면 밥을 먹이고 구하면 물품을 주고, 또 관작(官爵)까지 주어서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사이 너희들이 여러 번 변경(邊境)을 침범하게 되니 우리가 무찔러 죽여야 할 것인데도 그렇게 않는 것은 국가에서 그 잡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너희들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쳐들어왔으니 그것을 목을 베고 사로잡는 것은 마지못해서 한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국가의 의도(意圖)는 아닌 것이다. 지금 장수(將帥)가 다른 곳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이곳에 있었다면 너희 무리들은 한 명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이에 적(賊) 5명이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례(謝禮)하기를, ‘그 말이 옳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하였으며, 적(賊)이 돌아가자 우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나의 기뻐하는 뜻을 원수(元帥)에게 유시(諭示)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침구(侵寇)할 이치도 없지도 않으니, 아울러 이것도 유시(諭示)하게 하라."
하였다. 명하여 이석동에게 술과 밥을 대접하도록 하고, 초록주 철릭(草綠紬帖裏) 1령(領)과 호초(胡椒) 1두(斗)를 하사(下賜)하였다. 이석동이 이미 나가자, 또 아뢰기를,
"일찍이 사로잡혀 간 고산리(高山里)의 전효안(田孝安)이란 사람이 적(賊)의 집에서 역사(役使)되었을 때 중국 여자 2명이 또한 사로잡혀 그 집에 있었습니다. 전효안이 그 여자와 더불어 함께 농전(農田)에 있다가 적(賊)의 기병(騎兵)이 북쪽으로부터 끊임없이 오는 것을 본 지가 6, 7일이 되었는데, 전효안이 그 여자에게 물으니,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 나라에 고산리(高山里)와 만포(滿浦)의 땅이 있는가?’ 하므로, 전효안이 ‘있다.’고 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오랑캐가 경성(鏡城)·온성(穩城)에 가까운 땅의 올적합(兀狄哈)에게 군사를 청하여 만포(滿浦)와 고산리(高山里)를 침구(侵寇)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후에 적(賊)이 전효안에게 이르기를, ‘너는 잘 있으니 마음에 섭섭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 나라를 가서 침구(侵寇)할 것인데, 너의 아내가 고산리(高山里)의 성중(城中)에 있는가? 나이와 용모가 어떠하냐? 내가 장차 사로잡아 와서 너에게 줄 것이다.’ 하니, 전효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가더라도 일은 반드시 이롭지 못할 것이다. 국가에서 우리 무리들이 사로잡혀 간 후로부터 도장수(都將帥)945) 를 보내어 방어(防禦)하고,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들이 모두 와서 구원하고 있다.’ 하니, 적(賊)이 성내어 꾸짖으며 그 손바닥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고산리성(高山里城)이 이와 같은데 그 속에 능히 얼마쯤을 용납하겠는가? 군대가 나가려고 하는데 어찌 이런 불길(不吉)한 말을 입 밖에 내는가?’ 하고는 마침내 주먹으로 그의 입술을 때렸습니다. 이튿날 적(賊)이 그 굴혈(窟穴)을 비워두고 나갔는데, 전효안은 그 빈틈을 타서 그 여자에게 청하여 양료(糧料)와 적(賊)의 의복을 얻어가지고 적군(賊軍)보다 먼저 몰래 와서 고산리(高山里)의 강변(江邊)에 이르러 배를 불러 건너면서 말하기를, ‘오랑캐의 쳐들어 오는 것은 오늘이 아니면 반드시 내일일 것이다.’ 하였는데, 적(賊)이 이튿날에 과연 쳐들어왔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전효안(田孝安)이 도망해 와서 이 적변(賊變)을 알린 것은 고국(故國)을 깊이 사모(思慕)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도원수(都元帥)레세 유시(諭示)하여 전효안의 일이 이석동(李石仝)의 아뢴 바와 서로 맞는다면 그 고을로 하여금 쌀 4석(碩)과 주의(紬衣) 1령(領)을 하사(下賜)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아뢰어 결정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오랑캐가 와서 변경(邊境)을 침범하면 변방의 장수가 오랑캐의 목을 베고 사로잡는 것은 곧 그들의 직분(職分)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국가에서 오랑캐에서 욕을 당한 것이 여러 번이었는데 지금 적(賊)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이와 같으니, 나라 사람이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허혼(許混)이 국가를 속이고서 적(賊)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단지 7명뿐인데도 오히려 선위(宣慰)를 내리셨는데, 지금은 적(賊)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갑절이나 많습니다. 또 승지(承旨)가 이미 본도(本道)에 돌아갔으니, 지금 만약 명하여 선위(宣慰)하게 한다면 고산리(高山里)의 군민(軍民)이 어찌 격동(激動)하여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지금 만약 칭찬하고 권장(勸奬)한다면 나는 변장(邊將)이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적(賊)을 방어(防禦)하는 일이 해이(解弛)해질까 염려스럽다. 우선 중지(中止)하고 뒷일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25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88면
-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癸酉/平安道都元帥李克均遣軍官李石仝馳啓曰: "本月二十一日, 賊二百餘圍高沙里城, 我軍追捕斬獲三十九級, 其奔還覆舟而死者, 又不知幾許。" 上引見石仝, 啓曰: "去二十一日, 臣等以斥候, 將入探彼境, 行到渭原、理山等處, 僉使金允濟使人云: ‘賊分三運, 二、三百爲群, 由皇城平 林亡哈洞、加也之洞而來, 汝雖入去, 彼衆我寡, 不可相敵, 其速馳來救援。’ 臣等領所率軍五十餘人, 到瓮後峴, 夜將向曙, 臣謂李益文曰: ‘高沙里城孤軍少, 可遣軍救援。’ 李益文以所領軍一隊送高沙里, 領餘軍直向滿浦, 望見上下煙臺, 火氣騰空, 且有放炮聲, 見山上有二人, 望我輩以白笠揮之, 審見其笠, 乃我國人也。 問之則曰: ‘我軍方與賊, 戰于別乙外平。’ 臣等馳往見之, 賊沿江布列, 似若渡江, 從流上下, 我軍亦從而上下, 使不得渡, 其實賊非欲渡江, 故作聲勢, 使不得往救他鎭。 少頃有人呼曰: ‘賊已圍高沙里。’ 臣等又以所領軍馳往, 賊已解圍, 倉黃北走, 皆墜于絶壁, 我軍乘勝追斬凡三十九級矣。" 上曰: "斬首者誰耶?" 石仝曰: "射之者爭追斬之, 且都元(師)〔帥〕 嘗令於諸鎭云: ‘賊至城中, 毋喧擾, 使若無人, 臨機應變。’ 是日僉節制使姜漬聞賊變, 乃於城上弓家, 令能射者一人、持杖者二人潛伏以候之, 賊屯江邊, 呼通事, 故不應, 俄而徐自明從樓上答曰: ‘通事無矣。’ 賊曰: ‘何以言無, 我欲搶去汝國人而來。’ 時賊步兵已潛涉江, 從國祀堂峴, 擁盾屯江邊, 又蔽江而渡, 賊酋三人, 被甲冑緣梯攀城拔石, 我軍以石投之, 賊墜城而走。 軍官兪灝射之, 洞其頂; 徐自明等又射殺二人, 賊皆北走; 助戰將領軍, 出北門扼其長城之路; 姜漬領軍出東門乘勝窮追, 賊皆墜絶壁下, 我軍俯而射之, 賊船窄狹, 僅容二、三人, 而賊爭涉, 四、五人同乘船, 或沈或浮, 其一人中矢驚動, 則舟必傾覆, 以此溺死者多。"上曰: "先登城者, 何以知其爲賊酋乎?" 石仝曰: "觀其甲冑及指揮其類, 則疑是賊酋也。" 上曰: "我軍戰死者幾何?" 石仝曰: "中矢者六人, 僅傷其皮, 無一人死者, 賊在江越邊, 觀望我軍搜索其奔竄者, 徇示彼賊斬之, 賊有哭踊叩頭者。" 上曰: "賊兵幾何?" 石仝曰: "圍城者二百餘人, 在江外騎兵又二、三百, 其滿浦見形者又多。" 於此上謂左副承旨權景禧曰: "唯此擧似矣。" 景禧對曰: "近者, 國家屢受辱於虜, 雖擒鼠竊者亦足喜也。 況賊自以爲大擧入寇, 而斬獲如此, 可喜也。" 石仝曰: "旣斬獲, 令士卒呼賊曰: ‘我國待汝, 來則食之, 求則與之, 又授之以爵, 所欲無不從之, 近者汝等屢犯邊境, 我可以勦殺而不爾者, 國家禁其捕獲也。 今爾大擧入寇, 則其斬獲不得已也, 然亦非國家之意也, 今將帥適在他所, 若在此則汝無噍類矣。’ 於是, 賊五人下馬免冑叩頭而謝曰: ‘是言然矣, 是言然矣。’ 賊還, 哭聲徹天。" 上謂承旨曰: "以予喜意, 諭元帥可也。 然不無再寇之理, 幷諭之。" 命饋石仝酒飯, 賜草綠紬帖裏一領、胡椒一斗。 石仝旣出, 又啓曰: "曾被擄高山里 田孝安者, 役使於賊家, 唐女二人亦被擄在其家, 孝安與其女同在農田, 見賊騎從北絡繹而來者六、七日, 孝安問其女, 女曰: ‘汝國有高山里、滿浦之地乎?’ 孝安曰: ‘有之。’ 女曰: ‘虜請兵於鏡城、穩城近地兀狄哈, 欲寇滿浦、高山里。’ 後賊謂孝安曰: ‘汝好在無憾, 吾往寇汝國, 汝妻在高山里城中乎? 年歲容貌何如? 吾將擄來給汝。’ 孝安曰: ‘爾等雖往, 事必不利, 國家自吾輩被擄, 遣都將帥防禦, 有武才者皆來赴耳。’ 賊怒罵指其掌曰: ‘高山里城如此, 其中能容幾許乎? 軍行何出此不吉之言。’ 遂拳毆其脣。 翼日賊空其窟穴而出, 孝安乘其空, 請於其女得糧料賊衣服, 先賊軍潛來至高山里江邊, 呼船而渡曰: ‘虜之來寇, 非今日則必明日。’ 賊翼日果來寇也。" 傳曰: "孝安逃來告此賊變, 是懷戀故國也。 其諭都元帥, 田孝安之事與石仝所啓相合, 則令其郡給米四碩、賜紬衣一領, 否則取稟可也。" 政院啓曰: "虜來犯邊, 邊將斬獲, 乃其職分也。 然近者, 國家受辱於虜屢矣。 今者, 斬獲如此, 國人孰不喜悅。 曩時, 許混欺罔國家, 斬獲只七人, 猶下宣慰, 今則斬獲倍多, 且承旨已歸本道, 今若命宣慰, 則高山里軍民, 豈不激勵乎?" 傳曰: "今若褒奬, 予恐邊將驕惰, 防禦解弛, 姑寢之以待後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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