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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51권, 성종 22년 3월 21일 정유 3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경연이 파하고 헌납 강삼이 세금 징수를 감독할 대관을 파견할 것을 건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헌납(獻納) 강삼(姜參)이 아뢰기를,

"신이 여러 도(道)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조미(糙米)를 보건대, 그 품질이 중미(中米)와 같았으니 매우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간활한 아전이 위엄을 빌어 거두어 들이는 것이 매우 과중(過重)하게 하며, 백성들이 간혹 나머지 쌀을 가지고 가며 도둑질한 쌀이라고 일컬으면서 그것을 빼앗고, 가만히 개인의 창고를 설치하여 그 고을 전세(田稅)의 수(數)를 채워서 그 고을의 세금을 사사로이 스스로 납부하니, 청컨대 대관(臺官)을 보내어 세금을 거두게 하소서.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다른 도(道)의 강직(剛直)하고 명민(明敏)한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여 거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하문하였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대답하기를,

"정말 말한 바와 같다면 그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하였다. 강삼이 또 아뢰기를,

"신이 전주(全州)에 있으면서 지방 관리가 불법(不法)을 〈행한다는 것을〉 들었는데, 전(前) 익산 군수(益山郡守) 이계통(李季通)·도사(都事) 신자건(愼自健)이 가장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체임되는 데 미쳐서 이계통은 부정(副正)으로 승진되고, 신자건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니, 남쪽의 백성들이 그것을 듣고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계통이 전세 차사원(田稅差使員)이 되어 혹은 지나치게 거둔 쌀이라고 일컫고 혹은 도둑질한 쌀이라고 일컬으면서 개인의 창고에 많이 받아들여 그 군(郡)에서 응당 납부해야 할 세(稅)를 채우고는 그 나머지 수를 훔쳐서 옥야현(沃野縣)의 자기 집으로 보냈습니다. 또 형벌을 감할 때 과중하게 속(贖)바치게 하여 아전과 백성을 침탈하므로 사람들이 집을 비워두고 도망하여 흩어지니, 더러는 그 집 재목을 철거하여 땔감에 대비하도록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農民)을 권장하고 독려한다고 핑계대고 면포(綿布)를 함부로 징수하였습니다. 신자건은 아들을 위하여 그 도(道)에서 며느리를 맞는데, 감사(監司)에게 아들의 장인[妻父]을 경기전(慶基殿)247) 의 참봉(參奉)으로 삼도록 청하였습니다. 신이 우연히 본부(本府)의 영청(營廳)에 이르러 새로운 농(籠) 네 짝이 있는 것을 보고 부윤(府尹)인 김수손(金首孫)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도사(都事)가 나주(羅州)에 청구한 물건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문(箋文)을 받들고 서울로 올 때에 김수손에게 철질려(鐵蒺藜)248) 를 청구하자, 김수손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사가 직접 대하여 물건을 청구하니 온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주(全州)의 사람에게 혼인하기를 도모하고 여러 고을에 청구하였으므로 선물이 서로 잇달았는데, 수세 차사원(收稅差使員)에게 그 사람들의 전세(田稅)를 감(減)하여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을 모름지기 엄하게 징계하여 남쪽 백성들의 마음을 쾌하게 하시고, 조정에서 법을 적용하는 것이 명백함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좌우에 고문(顧問)하였다. 윤필상이 말하기를,

"신자건의 일은 흔적이 있어서 추문(推問)하기 쉽겠지만, 이계통의 일은 드러난 것이 없어 밝히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은 조정에서 듣기가 어렵다.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끝까지 국문(鞫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경(司經) 김일손(金馹孫)이 아뢰기를,

"국가에 안으로는 예문관(藝文館)과 겸 춘추관(兼春秋館)이 있어 시사(時事)를 맡아서 기록하므로, 조정의 정사를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야사(野史)가 없기 때문에 지방 관리들의 불법(不法)이 비록 강삼(姜參)이 아뢴 바와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쁜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게 되며, 탁월하거나 기위(奇偉)하고 품행이 특이한 자라도 묻혀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의 빠뜨려진 법입니다. 청컨대 사유(師儒)나 홍문(弘文) 등이 기록한 것에 의거하여 기주(記注) 중 마땅한 사람이 정밀하게 뽑아서 춘추록(春秋錄)을 만들게 한다면, 비록 지방에 살고 있던 기간이라도 듣고 본 것이 정치와 풍화(風化)249) 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기주를 넓히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 고문(顧問)하였다.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조정에는 이미 사관(史官)을 두었으며, 또 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시강원(侍講院)·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육조(六曹)·정부(政府)가 모두 춘추관(春秋館)을 겸하여 시정(時政)을 기록하고 있으니, 다시 새로운 법을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야사(野史)의 법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다. 그러나 새로운 법을 세울 수는 없다."

하였다. 김일손이 또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높이고 예(禮)로 대우하는 것은 왕정(王政)250) 에서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 이소(二疏)251)걸해(乞骸)252) 하자, 황제가 황금(黃金)을 내려 주고, 조신(朝臣)들이 도성문(都城門) 밖에서 조도(祖道)253) 하는 공장(供帳)254) 을 베풀었는데, 수레가 수백 량(輛)이었으며, 당(唐)나라 양거원(楊巨源)이 떠나는 데도 이와 같았으므로 만고(萬古)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노자형(盧自亨)이약동(李約東)은 모두 조정의 노신(老臣)인데, 하루아침에 늙어 전리(田里)로 물러가니, 그 고을의 수령(守令)이 그 집안에 부역을 시키며 편맹(編氓)과 동일하게 보아서 대신을 공경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종직(金宗直)이 병(病) 때문에 휴가를 받아 여(輿)255) 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부리는 종이 없으므로 여를 메고 갈 사람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재상(宰相)으로 고로(告老)256) 하고 전리(田里)에 물러가서 사는 자에게 잡역(雜役)을 시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잡역을 시키는가? 해조(該曹)에 하문하고 예(例)를 고찰하여 아뢰라. 그리고 김종직이 〈떠나는데〉 길이 험하여 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만약 그대의 말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군사를 지급하여 전송(傳送)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251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5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편사(編史) / 인사-관리(管理)

  • [註 247]
    경기전(慶基殿) : 조선조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한 곳. 전라도 전주(全州)의 남문(南門) 안에 있었음.
  • [註 248]
    철질려(鐵蒺藜) : 마름쇠.
  • [註 249]
    풍화(風化) : 풍속과 교화.
  • [註 250]
    왕정(王政) : 왕도(王道) 정치.
  • [註 251]
    이소(二疏) : 한(漢)나라 때 소광(疏廣)과 소수(疏隨).
  • [註 252]
    걸해(乞骸) : 나이 많은 관원이 사직을 주청하는 것.
  • [註 253]
    조도(祖道) : 여행할 때 행로신(行路神)을 제사지내는 일.
  • [註 254]
    공장(供帳) : 연회를 열기 위해 물건을 준비하고 막(幕)을 침.
  • [註 255]
    여(輿) : 가마.
  • [註 256]
    고로(告老) : 나이 많은 이유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함.

○御經筵。 講訖, 獻納姜參啓曰: "臣觀諸道收稅糙米, 其品與中米同, 甚未便。 且猾吏假威, 收斂太重, 民或持餘米而去, 則稱盜米奪之, 潛置私庫, 以充其邑田稅之數, 而其邑之稅, 私自納焉。 請遣臺官收稅, 若不然, 則使他道剛明守令監收何如?" 上顧問左右。 領事尹弼商對曰: "果如所言, 則禁之可也。" 上曰: "然。" 又啓曰: "臣在全州, 嘗聞外吏不法。 前益山郡守李季通、都事愼自健尤最, 而及其遞來, 季通陞副正, 自健陞正郞, 南民聞之, 莫不驚怪。 季通爲田稅差使員, 或稱濫收米, 或稱盜米, 多納私庫, 以充其郡應納之稅, 而竊其餘數, 送沃野縣己第。 又威刑重贖, 浸漁吏民, 人有空家逃散, 或撤其家材, 備炬納之。 又託勸督農民, 濫徵緜布; 自建爲子娶婦其道, 請于監司, 以子之妻父爲慶基殿參奉, 臣偶到本府營廳, 見有新籠四, 問諸府尹金首孫, 答云: ‘此都事求請于羅州之物也。’ 且陪箋來京時, 求鐵蒺藜于首孫, 首孫語臣曰: ‘都事面求物未便。’ 又圖婚于全州之人, 求請諸邑, 贈遺相續, 請于收稅差使員, 減其人田稅。 惟此二人, 須痛懲以快南民之心, 以示朝廷用法之明。" 上顧問左右。 尹弼商曰: "自建事, 有迹易推; 季通事, 無形難明。" 上曰: "如此之事, 朝廷得聞爲難, 令憲府窮鞫之。" 司經金馹孫啓曰: "國家內有藝文館及兼春秋掌記時事, 朝廷之政, 無不備記, 然無野史, 故外吏不法, 雖有如姜參所啓者, 皆不遺臭於後。 卓犖奇偉, 操行特異者, 亦堙沒無傳, 此乃方今闕典, 請依師儒弘文等錄記注可當人, 精擇爲春秋錄, 雖在外居閑, 其所聞見, 有關政治及風化者, 無不備錄, 以廣記注。" 上顧問左右。 弼商啓曰: "朝廷旣立史官, 又承政院、弘文館、侍講院、司諫院、司憲府、六曹、政府, 皆兼春秋, 以記時政, 不必更立新法。" 上曰: "野史之法固美, 然新法不可立。 "馹孫又啓曰: "尊禮大臣, 王政所先, 昔二疏乞骸, 帝賜黃金, 朝臣設供帳祖道都門外, 車數百兩; 楊巨源之去亦如是, 萬古以爲美談, 今盧自亨李約東, 皆朝廷老臣, 一朝退老田里, 其邑守令, 役其家, 視同編氓, 有乖敬大臣之義。 且知中樞府事金宗直, 因病受暇, 欲輿還故鄕, 家貧無僕隷, 未備擔輿之人。" 上曰: "予以謂宰相告老, 退居田里者, 不役雜徭, 其役之乎? 問于該曹, 考例以啓。 金宗直之間關, 若無爾言, 予何得知? 當給軍傳送。"


  • 【태백산사고본】 38책 251권 8장 B면【국편영인본】 12책 5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편사(編史)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