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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50권, 성종 22년 2월 6일 임자 2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사간 권경우가 조산보에서 대패한 책임을 물어 만호도 국문할 것을 건의하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권경우(權景祐)가 와서 아뢰기를,

"신이 영안도 안접 종사관(永安道安接從事官) 이예견(李禮堅)을 보니, 말하기를, ‘적(賊)이 침입하여 와서 조산보(造山堡)를 포위하였는데 수비(守備)가 없는 것을 알고 성중(城中)에 함부로 침입하자, 만호(萬戶)는 피하여 숨어버리고, 성(城)은 함락되었는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사종(羅嗣宗)이 심한 병중(病中)에 있으면서 적(賊)의 변고를 듣고 병을 참으며 바로 조산(造山)으로 달려가 기(旗)를 세우고 각(角)을 불게 하자, 적이 구원병(救援兵)이 있는 줄 알고 포위한 것을 풀고서 약탈하며 사로잡아 갔었다. 그런데 나사종이 적들이 주민들을 사로잡아 머리를 휘어잡고 묶어서 가는 것을 바라보고 분(憤)을 내어 달려가서 공격하려 하니, 좌우(左右)에서 말리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성(盛)하여 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나사종이 크게 노(怒)하여 후퇴하는 장수는 참형(斬刑)하도록 정하고 진격하지 않는 자는 참형하도록 영(令)을 내리고 학익진(鶴翼陣)145) 을 형성하면서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만호(萬戶)가 어쩔 수 없어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처음으로 성(城)에서 나왔으나, 적이 복병(伏兵)을 배치하여 나사종(羅嗣宗)이 지나가는 것을 엿보다가 협공[挾擊]하므로 나사종이 힘을 다하여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적이 말을 쏘아 말이 넘어지고 또 나사종을 쏘아 맞히어 쓰러지게 하자, 만호가 화살에 맞았다고 핑계대고 도로 달려서 〈성(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죄가 사형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당시 우후(虞候)가 정예병(精銳兵) 수백명을 거느리고 무이보(撫夷堡)에서 방수(防守)하였는데, 보(堡)의 군사도 많았으며 조산(造山)과의 거리는 겨우 1식(息)146) 정도였으며, 나사종경흥(慶興)에서 1식(息) 남짓한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가서 구원(救援)하였지만, 우후는 가까운 지역에 있으면서 와서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절도사(節度使)도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행영(行營)에 있었으니, 조산(造山) 같은 경우라면 멀리 떨어져 있어 미쳐 구원할 수 없었겠지만, 경흥(慶興)은 바로 가장 아래의 지역이며, 적(賊)이 경원(慶源) 서편 근처의 해안의 따라 내려와서 5식(息) 남짓한 노정(路程)을 지나야만 조산보(造山堡)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행영(行營)과 경원(慶源)과의 거리는 3식(息)에 지나지 않으니, 절도사가 만약 변고를 듣고 빠르게 경원의 요해처로 가는 길목으로 달려가 적이 되돌아가는 길을 차단(遮斷)하였다면 틀림없이 살아남은 무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치욕(恥辱)을 당한 것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관찰사(觀察使) 허종(許琮)도 분(憤)을 내어 이예견(李禮堅)을 보고 말하기를, ‘이 길이 요해처[要衝]라고 절도사에게 이전에 말하였는데도 이번에 요격(邀擊)147)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매우 한(恨)스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합니다. 절도사·우후·평사(評事)는 이미 잡아오도록 명하였습니다. 만호(萬戶)도 함께 잡아와서 국문(鞫問)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이 논평(論評)하기를, "윤말손(尹末孫)최진하(崔進河)는 중대한 책임을 위임받아 겁을 내어 머뭇거리면서 대패[敗續]하게 하였으니, 국가의 위엄을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으며, 최진하는 죄인의 우두머리이다. 마땅히 극형(極刑)으로 조치하여야 하는데 요행히 면하였으니, 어찌 여러 사람의 마음에 쾌하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25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689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 [註 145]
    학익진(鶴翼陣) : 학(鶴)이 날개를 펴듯이 치는 진.
  • [註 146]
    1식(息) : 30리 거리.
  • [註 147]
    요격(邀擊) :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적을 공격함.

○司諫院司諫權景祐來啓曰: "臣見永安道安接從事官李禮堅云: ‘賊來圍造山堡, 知無守備, 闌入城中, 萬戶避隱, 將屠城, 慶興府使羅嗣宗, 病劇聞賊變, 力疾而直赴造山, 建旗吹角, 知有援兵, 解圍搶虜而去。 嗣宗望見賊擄民人捽縛而去, 發憤馳擊, 左右止之曰: 「賊勢甚盛, 不可當也。」 嗣宗大怒, 定斬退將, 令斬不進者, 作鶴翼陣追之, 萬戶不獲已收散卒, 始出城, 賊設伏, 伺嗣宗過, 挾擊, 嗣宗猶力戰不已。 賊射馬馬蹶, 又射中嗣宗而仆, 萬戶託以中箭, 還馳入。’ 罪不容誅矣。 時虞候將精兵數百, 防守撫夷堡, 堡軍亦多, 距造山僅一息, 嗣宗慶興一息餘, 猶及往救, 虞候則在近地, 不來救之。 節度使亦將大軍在行營, 造山則隔遠, 雖未及救, 慶興乃最下之地, 賊傍慶源西邊循海而下, 至五息餘程, 得達造山堡。 行營距慶源, 不過三息, 節度使若聞變, 疾趨慶源要路, 而遮賊歸路, 則必無遺類矣。 國家受辱, 豈至於此乎? 觀察使許琮亦發憤, 見禮堅云: ‘此路要衝, 曾語節度使, 而今不邀擊余甚恨之。’ 節度使、虞候、評事, 已命拿來。 萬戶請幷拿來鞫之。" 從之。

【史臣曰: "末孫進河, 受委任之重, 恇怯逗留, 以致敗績, 其損國威莫大, 進河, 罪之魁也。 當置極刑而幸免, 豈快於衆心哉?"】


  • 【태백산사고본】 38책 250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689면
  •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군사-병법(兵法)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