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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50권, 성종 22년 2월 3일 기유 1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영안북도 절도사 윤말손이 오랑캐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치계하다 심회 등의 논의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 윤말손(尹末孫)이 치계(馳啓)하기를,

"1월 22일에 무이보(撫夷堡) 강밖의 시전(時錢) 등처에서 불꽃[火焰]이 하늘을 밝힐 정도로 환하게 2경(更)까지 꺼지지 않았습니다. 23일에는 건가퇴(件加退) 성밑에 사는 야인(野人) 김아라두(金阿羅豆)가 와서 알리기를, ‘도골(都骨)·사거(沙車) 등 칠성 올적합(七姓兀狄哈) 8백여 명을 무이보에,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하였으며, 종성 첨절제사(鍾城僉節制使) 조등(曺璒)의 보고에 이르기를, ‘야인 거응구(巨應仇)가 와서 알리기를, 「니마차 올적합(尼麻車兀狄哈) 시울보개(時乙甫介)가 동류(同類)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신이 즉시 군영(軍營)에 소속된 군사 6백명을 통솔하여 급히 육진(六鎭)135) 을 향하여 순행(巡行)하며 변고에 대처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영돈녕(領敦寧) 이상, 정부(政府)·육조(六曹)에 보이도록 명하였다. 심회(沈澮)가 의논하기를,

"남도(南道)의 군사 중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한데 합쳐 방어하면서 변고에 대처하게 하소서."

하고, 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지금 적의 변고를 들으니, 그 형세가 염려스럽습니다. 허종(許琮)·변종인(卞宗仁)에게 유시하여 다시 방비를 더하도록 하시고, 성준(成俊)으로 하여금 빨리가서 조치하도록 하소서."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허종(許琮)으로 하여금 급히 경원(慶源)·건가퇴(件加退)·무이(撫夷) 등지에 가게 하여 정예병[精兵]을 뽑아 나누어 주둔하면서 지키고 방어하되, 밤낮으로 늘 적(敵)이 나타난 것처럼 하여 혹시 조금이라도 해이함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먼저 알고서 방어하는 것과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갑자기 만나는 것과는 그 형세가 같지 않습니다. 요즈음 조산(造山)에서 패배한 것은 밤에 경비(警備)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 보(堡)로 하여금 척후(斥候)136) 를 멀리하여 방비를 더욱 엄격하게 하소서."

하고, 어세겸(魚世謙)은 의논하기를,

"절도사(節度使)가 이미 미리 알고서 조치한 것은 아뢴 것과 같습니다. 적(賊)의 무리는 수백여 명에 지나지 않으니, 여러 진(鎭)의 병력(兵力)으로도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서 수단을 강구하여 적당히 처리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다시 군마(軍馬)를 징발하여 명령에 따라 분주히 피로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형세가 감당할 수 없다면, 변장(邊將)이 반드시 치계(馳啓)하여 품지(稟旨)137) 할 것이니, 지금 먼저 시끄럽고 어수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적(賊)이 일찍이 조산(造山)에서 이익을 얻었고 이제 무이(撫夷)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아마도 더러 우리를 가볍게 여기고 다시 그 틈을 엿보아 간혹 군사를 나누어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동서(東西)로 부딪치면서 공격할 형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에는 주인과 손[主客]이 있으므로, 마땅히 가만히 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본도(本道)에서도 지난날 조산(造山)에서 패배한 것을 인하여 대비하고 방어하는 계책이 틀림없이 소홀한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극균(李克均)은 의논하기를,

"김아라두(金阿羅豆)가 고한 칠성 올적합(七姓兀狄哈) 8백여 명은 저들이 틀림없이 니마차(尼麻車)인데도 그가 다른 성(姓)이라고 숨긴 것입니다. 거응구내(巨應仇乃)가 알려 준 바 니마차 올적합(尼麻車兀狄哈) 3백 명이라는 것은 사실인 듯한데, 앞서 이미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다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비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뜻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이극돈(李克墩)·여자신(呂自新)·윤민(尹慜)은 의논하기를,

"만약 정말로 두 곳의 사람이 알려 준 것과 같다면 난을 일으키는 것이 반드시 며칠 안에 있을 것이므로 다시 그 시기에 미쳐서 조치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저들이 이미 조산에서 이익을 얻어 처음으로 우리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주둔한 군사를 해산시키지 않으니, 앞날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요즈음 듣건대, 북도(北道)의 병력(兵力)이 옛날과 같지 않은 듯하다고 합니다.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로 하여금 사납고 용맹스런 군사 1백 명을 거느리고 북도에 급히 가서 허종(許琮)의 절도(節度)를 들으며 힘을 같이하여 방어하도록 하고, 남도의 방어는 평사(評事)로 하여금 단속하게 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25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88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 [註 135]
    육진(六鎭) : 조선조 세종(世宗) 때에 김종서(金宗瑞)를 시켜 지금의 함경 북도 북변(北邊)을 개척하여 설치한 여섯 진(鎭). 곧 경원(慶源)·온성(穩城)·종성(鐘城)·회령(會寧)·부령(富寧)·경흥(慶興)임.
  • [註 136]
    척후(斥候) : 적군의 사정을 엿보고 정찰함.
  • [註 137]
    품지(稟旨) : 임금에게 상주하여 재가를 받음.

○己酉/永安北道節度使尹末孫馳啓: "今正月二十二日, 撫夷堡江外時錢等處, 火焰燭天, 至二更不滅。 二十三日, 件加退城底野人金阿羅豆來告云: ‘都骨沙車七姓兀狄哈八百餘人, 欲於撫夷堡, 乘隙作耗。’ 鍾城僉節制使曺璒報云: ‘野人巨應仇乃來告云: 「尼麻車兀狄哈 時乙甫介, 率同類三百餘人, 欲作賊。’ 臣卽率營屬軍六百, 馳向六鎭, 巡行待變。" 命示領敦寧以上, 議政府、兵曹。 沈澮議: "擇南道軍有武才者, 合防待變。" 尹弼商李克培盧思愼尹壕議: "今聞賊變, 其勢可慮。 諭許琮卞宗仁, 更加隄備, 亦令成俊, 馳赴措置。" 洪應議: "令許琮, 馳往慶源件加退撫夷等處, 抄精兵, 分屯守禦, 晝夜常如見敵, 毋或少弛。 先知而禦之者, 與不覺猝遇者, 其勢不侔。 近日造山之敗, 由夜不警備也。 令諸堡遠斥候, 益嚴隄備。" 魚世謙議: "節度使旣預知而措置, 雖如所告。 賊黨不過數百餘人, 諸鎭兵力足, 以隨機應變。 不必更發軍馬, 疲於奔命。 若彼衆我寡, 勢不能當, 邊將必當馳啓稟旨, 今不可先自騷動。 但賊嘗得利於造山, 今見形於撫夷, 恐或輕我, 再投其隙, 或分兵出沒, 爲東西衝擊之勢。 然兵有主客, 當靜以待之。 本道因前日造山之敗, 備禦之策, 必不至疎虞。" 李克均議: "金阿羅豆進告七姓兀狄哈八百餘人, 彼必尼麻車, 而彼諱以他姓也。 巨應仇乃所告尼麻車兀狄哈三百人者似實, 前旣得利, 故復來。 然我備已具, 則難以得志。" 李克墩呂自新尹慜議: "若果如兩處人所告, 則其作賊, 必在數日之內, 無復及期措置。 但彼旣得利於造山, 始有輕我之心, 屯兵不散, 其將來難測。 比聞北道兵力, 似不如舊。 令南道節度使, 率驍勇者一百, 馳赴北道, 聽許琮節度, 同力防禦, 其南道防禦, 令評事檢擧。"


  • 【태백산사고본】 38책 25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88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