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성종실록 245권, 성종 21년 윤9월 5일 갑신 2번째기사 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특진관 윤효손이 외방 고을의 호적을 《대전》에 입각하여 체계화할 것을 건의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윤효손(尹孝孫)이 아뢰기를,

《대전(大典)》 안에 ‘호적(戶籍)은 매 5가(家)를 1통(統)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고, 매 5통을 1리(里)로 하여 이정(里正)을 두며, 매 1면(面)마다 권농관(權農官)을 둔다.’고 하였는데, 지금 외방 고을의 호적이 법(法)과 같지 않아 산만하고 어지러워서 계통이 없는 탓으로 풍속(風俗)과 관계되는 일을 검거(檢擧)할 경로(經路)가 없으므로, 이로 인하여 불효(不孝)하거나 불목(不睦)하는 자가 많이 있으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대전》에 의하여 통주·이정·권농관(權農官)의 법을 거듭 밝히어 통(統) 안에 만약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통주는 이정에게 신고하고, 이정은 권농관에게 신고하고, 다시 옮겨 수령(守令)에게 고하여 그 죄를 다스리게 하면 풍속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지사(知事) 이숭원(李崇元)이 대답하기를,

"서울에는 인가(人家)가 즐비하여 그 법을 시행할 만하지만 외방(外方)에는 산천(山川)이 서로 막히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어 5가(家)로 통(統)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자, 윤효손(尹孝孫)이 말하기를,

"만약 인가가 희소한 곳에서는 비록 3, 4가(家)로 1통(統)을 만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신이 앞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어 이 법을 시행(試行)하였던 바 사람들이 처음에는 싫어하더니 뒤에는 매우 편리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들으니, 이를 폐지하고 행하지 아니한다 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이 《대전》에 실려 있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윤효손이 또 아뢰기를,

"무릇 군사(軍士)가 된 자는 몸이 한가로움을 편하게 알고 정군(正軍)이 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는데, 모든 고을의 거관(去官)862) 한 사람 및 군사로서 산관(散官)863) 이 된 자나 심지어 무과 출신자(武科出身者)까지도 모두 봉족(奉足)864) 을 붙이기를 구하니, 이 때문에 열약(劣弱)한 자가 흔히 호수(戶首)865) 가 되니, 대체(大體)가 적당하지 못합니다. 이제 새로운 군안(軍案)에 의거하여 추쇄(推刷)하여 개정(改正)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아뢴 바와 같다."

하였다. 윤효손이 또 아뢰기를,

"나라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866)향사례(鄕射禮)867) 를 행하는데, 향음주례는 매연 10월에, 향사례는 3월 3일과 9월 9일에 행합니다. 이 법도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으니, 풍속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향음주례에는 나이가 많고 덕행(德行)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며 향사례에는 효제 충신(孝悌忠臣)하며, 예(禮)를 좋아하고 난잡하지 아니한 자라야 비로소 이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참여한 자는 혹 물의(物議)가 있을까 두려워서 감히 나태한 행위를 하지 못하고, 참여하지 못한 자는 모두 힘써 행하려고 하니, 진실로 이는 미법(美法)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충신 효제하는 자를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 한 가지 재능과 한 가지 행실이 있는 자라도 참여하게 하고, 유향소(留鄕所)868) 로 하여금 비위(非違)의 일들을 규찰하고 검거하게 한다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만약 관찰사(觀察使)가 마음을 다하여 규찰(糾察)한다면 수령(守令)이 누구인들 힘쓰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하였다. 윤효손이 다시 아뢰기를,

"서얼(庶孽)과 윤상(倫常)을 무너뜨린 자도 이제 모두 과거를 볼 수가 있음으로 하여 풍속의 각박함이 주로 이에서 연유하니, 청컨대 이후로는 과거에 응시하려는 사람과 군사로서 지방에서 종사할 자는 모두 유향 회의(留鄕會議)의 보거(保擧)를 거쳐서 수령(守令)이 첩지(牒紙)869) 를 준 뒤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에 종사토록 허가하여, 이것으로써 항식(恒式)을 만들게 한다면 거의 사람마다 각각 행실에 힘써 풍속이 후한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8책 245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4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호구-호구(戶口) / 윤리-강상(綱常) / 신분(身分)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풍속-예속(禮俗)

  • [註 862]
    거관(去官) : 임기가 차서 벼슬을 떠나 다른 관직(官職)으로 옮겨 가던 일.
  • [註 863]
    산관(散官) : 실직(實職)이 없이 자급(資級)만 띠고 녹(祿)을 받는 관원.
  • [註 864]
    봉족(奉足) : 조선조 때 정군(正軍)의 집에 주던 조호(助戶). 정군 1명에 대하여 봉족 한두 사람을 지급하여 정군을 돕게 하고, 정군이 출역(出役)하였을 경우에는 그 집안 일을 돕게 한 급보 제도(給保制度).
  • [註 865]
    호수(戶首) : 각 호(戶)의 우두머리. 1호는 정호(正戶)와 봉족(奉足)으로 되어 있는데, 호수(戶首)는 정군(正軍)의 입역(立役)과 여정(餘丁)의 공부(貢賦)를 책임지고 독려하였음.
  • [註 866]
    향음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읍양(揖讓)을 지키어 술을 마시며 잔치하던 예절.
  • [註 867]
    향사례(鄕射禮) : 향교에서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어 유학 도덕의 풍기를 배양하던 의식의 한 가지.
  • [註 868]
    유향소(留鄕所) :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지방 수령(守令)의 정치를 돕고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敎化)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 자치 기관. 나라의 정령(政令)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향리(鄕吏)의 횡포를 막고 조세의 부과와 징수를 도와주었음.
  • [註 869]
    첩지(牒紙) : 증서.

○御經筵。 講訖, 特進官尹孝孫啓曰: "《大典》內: ‘戶籍每五家爲一統, 置統主, 每五統爲一里, 置里正, 每一面置勸農官。’ 今外邑戶籍不如法, 散亂無統, 關係風俗事, 無由檢擧, 因此不孝不睦者多有之, 誠非細故。 請依《大典》, 申明統主、里正、勸農官之法, 統內如有罪犯綱常者, 統主告里正, 里正告勸農官, 轉告守令, 以治其罪, 則風俗正矣。" 上顧問左右, 知事李崇元對曰: "京中人家櫛比, 可行此法, 外方則山川相隔, 人家遼絶, 五家作統似難矣。" 孝孫曰: "若人家稀少之地, 則雖以三四家爲一統可矣。 臣曩爲慶尙道觀察使, 試行此法, 人初厭之, 後乃甚便之。 今聞廢不行故敢啓。" 上曰: "法載《大典》而不行, 非也。" 孝孫又啓曰: "凡爲軍士者, 以身間爲便, 不喜爲正軍, 如諸邑去官人及軍士作散人, 至於武科出身者, 皆屬求奉足, 以此劣弱者多爲戶首, 大體未便, 今據新軍案, 推刷改正何如?" 上曰: "果如所啓。" 孝孫又啓曰: "國家行鄕飮、鄕射禮, 鄕飮則每十月, 鄕射則三月三日, 九月九日行之。 此法載《五禮儀》, 所以厚風俗也。 鄕飮則年高有德行者, 鄕射則孝悌忠臣, 好禮不亂者, 乃得與焉, 其與者恐有物議, 不敢惰行, 不與者皆欲勵行, 固是美法。 然才德兼備, 忠信孝悌者, 豈易得哉? 有一才一行者, 許令與焉, 使留鄕所, 糾擧非違幸甚。 若觀察使盡心糾察, 則守令, 誰不勉勵乎?" 上曰: "然。" 孝孫又啓曰: "庶孽及敗常者, 今皆得赴擧, 風俗之薄, 職此之由。 請今後應赴擧人及軍士外京從仕者, 竝經留鄕會議保擧, 守令給牒後, 乃許赴擧從仕, 以爲恒式, 則庶幾人各厲行, 而風俗歸厚矣。" 上曰: "然。"


  • 【태백산사고본】 38책 245권 4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64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역(軍役) / 호구-호구(戶口) / 윤리-강상(綱常) / 신분(身分)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