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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236권, 성종 21년 1월 6일 기미 2번째기사 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집의 구숙손 등이 가농작의 폐혜와 황해도 7참의 고역 등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집의(執義) 구숙손(丘夙孫)이 아뢰기를,

"가농작(假農作)이 비록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라고 하더라도 공장(工匠)을 많이 모아서 그 생업을 폐기하게 하니, 폐단이 셀 수 없이 매우 많습니다. 새·짐승과 밭갈이하는 지아비, 들밥을 나르는 지어미, 누에 치는 여자, 베 짜는 할멈의 모양을 풀과 대나무 같은 것을 쓰는데, 자르고 휘고 새기고 허물어뜨려서 마침내 쓰지 못하게 되니, 이는 이른바 이익이 없는 것을 만들어서 이익이 있는 것을 해(害)친다는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가지 모형은 마련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는 조종조(祖宗朝)에서 모두 하였는데, 인형(人形)을 만들지 아니하면 무엇으로 농사하는 일을 형상하겠는가? 추교(芻茭)039) 같은 것은 마땅히 도로 거두어 쓸 것이니, 무엇이 허비됨이 있겠는가?"

하였다. 구숙손이 또 아뢰기를,

"황해도(黃海道)칠참(七站)040) 은 중국 사신이 왕래할 뿐만 아니라 상시로 사명(使命)041) 이 연달아 다니기 때문에, 이로써 역로(驛路)가 잔폐(殘弊)합니다. 그 가운데 용천(龍泉)·검수(劎水) 두 역이 가장 심하니, 만약 다시 수년을 지나면 장차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전(大典)》에, 대로(大路)의 각참(各站)은 일수(日守)042) 가 20명이고, 중로(中路)는 15명, 소로(小路)는 10명으로 되어 있는데, 칠참(七站)은 중로입니다. 군적(軍籍)을 할 때에 칠참 일수의 자제(子弟)를 빠짐없이 검괄(檢括)043) 하여 모두 다른 역(役)을 정하였으니, 청컨대 올려서 대로(大路)로 만들고 특별히 무휼(撫恤)을 더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영사(領事) 심회(沈澮)가 대답하기를,

"칠참(七站)은 인물(人物)이 잔망(殘亡)하여 고역(苦役)이 갑절로 중하니, 마땅히 존휼(存恤)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사(該司)로 하여금 소복(蘇復)044) 할 계책을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심회가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개성부(開城府)학궁(學宮)045) 을 보니, 대성전(大成殿)선성(宣聖)046)십철(十哲)047)소상(塑像)048) 이 혹은 팔과 다리가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채색(彩色)이 벗겨지기도 하였으니, 만약 중국 사신이 보면 국가에서 존숭하는 뜻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또 소상은 옛 제도에 맞지 아니하니, 위판(位板)으로 개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성현(成俔)이 말하기를,

"평양 학궁 에 선성과 십철이 모두 소상하고, 또 요동 반궁(遼東泮宮)에도 소상을 설치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전조(前朝)049) 로부터 모두 소상을 설치하였으니, 그 유래가 이미 오래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상은 전조의 구물(舊物)이므로, 아마도 갑자기 개정할 수 없을 듯하다. 학궁은 빨리 수리하게 하라."

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성세명(成世明)이 아뢰기를,

"신이 경기 문폐사(京畿問弊使)로 여러 고을을 순안(巡按)하니, 향교(鄕校)가 혹은 초가[覆茅]인데, 도개(塗墍)050) 가 완전하지 못하여 비가 새고 바람이 치며 제복(祭服)이 찢어지고 더러우며 조두(俎豆)051) 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국가에서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높이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빨리 수리[修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마땅히 제도 감사(諸道監司)에게 유시(諭示)를 내려서 여러 고을의 학궁(學宮)은 제도(制度)에 의하여 수리를 끝마치게 하고, 초가는 곧 기와로 덮게 하겠다."

하였다. 기사관(記事官) 이희락(李希洛)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집사(執事)로서 여러 능전(陵殿)을 보니, 제복(祭服)이 모두 찢어지고 양관(梁冠)은 영(纓)052) 이 없으며, 또 수판(手板)의 장단(長短)이 혹 격식에 맞지 아니하니, 청컨대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사(該司)로 하여금 검찰(檢察)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236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55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농업-권농(勸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유학(儒學) / 공업-장인(匠人) / 교통-육운(陸運) / 재정-역(役)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건설-건축(建築) / 의생활-예복(禮服)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註 039]
    추교(芻茭) : 마소의 먹이로 하는 마른 풀.
  • [註 040]
    칠참(七站) : 황해도의 요로(要路)에 있던 경천(敬天)·용천(龍泉)·검수(劎水)·동선(洞仙)·금교(金郊) 등의 7개의 참(站).
  • [註 041]
    사명(使命) : 사자(使者)로서 받은 명령.
  • [註 042]
    일수(日守) : 지방 각역(各驛)에서 심부름하는 천례(賤隷).
  • [註 043]
    검괄(檢括) : 남김없이 조사하여 찾아냄.
  • [註 044]
    소복(蘇復) : 회복되게 함.
  • [註 045]
    학궁(學宮) : 향교(鄕校).
  • [註 046]
    선성(宣聖) : 공자(孔子).
  • [註 047]
    십철(十哲) :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열 사람의 고제(高弟). 곧 안회(顔回)·민자건(閔子鶱)·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자로(子路)·자유(子游)·자하(子夏).
  • [註 048]
    소상(塑像) : 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 [註 049]
    전조(前朝) : 고려(高麗).
  • [註 050]
    도개(塗墍) : 벽에 바른 흙.
  • [註 051]
    조두(俎豆) : 제사에 쓰는 그릇.
  • [註 052]
    영(纓) : 갓끈.

○御經筵。 講訖, 執義丘夙孫啓曰: "假農作, 雖祈年之事, 然多聚工匠, 廢其所業, 弊甚不貲。 山禽、野獸、耕夫、饁婦、蠶女、織嫗之形, 用芻茭竹木, 斷折彫毁, 終爲無用, 是所謂作無益害有益也。 請勿設雜像。" 上曰: "祈年之事, 祖宗朝皆爲之, 不作人形, 何以象農事乎? 如芻茭, 當還收用, 何費之有?" 夙孫又啓曰: "黃海道七站, 非徒天使往來, 常時使命絡繹, 以此驛路殘弊。 其中龍泉劒水兩驛最甚, 若復數年, 將不可支。 《大典》, 大路各站日守二十名, 中路十五名, 小路十名, 七站, 中路也。 軍籍時, 七站日守子弟, 檢括無遺, 皆定他役, 請陞爲大路, 特加撫恤。" 上顧問左右。 領事沈澮對曰: "七站人物殘亡, 苦役倍重, 宜加存恤。" 上曰: "令該司, 議蘇復之策。" 沈澮啓曰: "臣向見開城府學宮, 大成殿宣聖十哲塑像, 或臂足斷折, 或彩色剝落。 若上國使臣見之, 則國家尊崇之意, 掃地矣。 且塑像不合古制, 改以位板何如?" 成俔曰: "平壤學宮, 宣聖十哲, 皆塑像, 且遼東泮宮, 設塑像, 我國自前朝, 皆設塑像, 其來已久。" 上曰: "塑像前朝舊物, 恐不可卒改。 學宮其速修理。" 侍講官成世明啓曰: "臣以京畿問弊(事)〔使〕 , 巡按諸邑, 鄕校或有覆茅, 塗墍不完, 上雨旁風, 祭服汚裂, 俎豆不備。 國家建學尊師之意安在? 請亟修治。" 上曰: "今宜下諭諸道監司, 凡諸邑學宮, 依制畢修, 覆茅者, 卽使蓋瓦。" 記事官李希洛啓曰: "臣曾以執事, 見諸陵殿, 祭服皆裂破, 梁冠無纓, 且手板長短, 或不如式, 請皆改之。" 上曰: "令該司, 檢察以啓。"


  • 【태백산사고본】 36책 236권 5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559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농업-권농(勸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유학(儒學) / 공업-장인(匠人) / 교통-육운(陸運) / 재정-역(役)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건설-건축(建築) / 의생활-예복(禮服)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