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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35권, 성종 20년 12월 2일 을유 2번째기사 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이조 판서 성준·이극배 등이 미조항에 진을 설치하지 말 것과 남쪽 지방에 봉수의 법을 밝힐 것·유자광을 개차할 것 등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성준(成俊)이 경상도(慶尙道)에서 돌아와서 미조항(彌助項)의 지도(地圖)를 올리고, 인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경이 가서 보니 어떠하던가?"

하니, 성준이 대답하기를,

"미조항삼천진(三千鎭)에서 거리가 40여 리인데, 경작할 만한 땅은 1백 결(結)에 지나지 아니하고, 토지도 후(厚)하지 아니하며, 방어의 편리함도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병선(兵船) 4, 5척을 삼천진에 두고,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가서 지키게 하면 비록 미조항에 진(鎭)을 두지 아니할지라도 족히 방수(防戍)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영사(領事) 이극배(李克培)가 대답하기를,

"신도 이 땅에는 진을 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쥐나 개 같은 도둑은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다만 절도사(節度使)로 하여금 그 방수를 삼가게 할 뿐인데, 또 어찌하여 진을 두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 말과 같으면 진을 두지 아니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성준이 또 아뢰기를,

"양계(兩界)는 연대(煙臺)1206) 의 병사가 밤낮으로 항상 지키면서 삼가하여 후망(候望)하는데, 남쪽 지방은 그렇지 아니하여 낮에는 지키지 아니하고 밤에만 봉화(烽火)를 들 뿐이니, 적선(賊船)이 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청컨대 절도사에게 유시(諭示)하여 봉수(烽燧)의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낮에는 번수(燔燧)하고 밤에는 거봉(擧烽)하는 것인데, 그렇지 아니하면 어떻게 적변(賊變)을 알겠습니까? 성준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병정(李秉正)이 아뢰기를,

"의주(義州) 사람이 삼진(三津)을 건너서 삼도(三島)에서 경작하니, 신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일의 의논에 조선(漕船)1207) 3백 척과 대선(大船) 50척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벌목(伐木)하는 역사(役事)로 온 도(道)가 시끄러우니, 중국 조정에서 들으면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만약 비가 내리면 삼도(三島)가 침몰할 것이니 신은 농민이 모두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신도 삼도를 개간해서 경작하는 것은 진실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사간(司諫) 김종(金悰)과 지평(持平) 최호(崔浩)가 아뢰기를,

"유자광(柳子光)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로 삼았으되, 예악은 중대한 일이라, 유자광이 비록 재주는 있으나 물망이 없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장악원 제조는 옛 전악(典樂)에 비할 것이 아닌데, 유자광이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종 등이 또 아뢰기를,

"이계명(李繼命)은 광패(狂悖)하고 행실이 나쁜데 이제 정랑(正郞)에 제수되었으니, 지극히 미편합니다. 청컨대 바꾸어 정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이계명의 죄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계명이 죄를 받은 지 이미 오래인데 한 번의 실수로써 버릴 수 없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대사성(大司成) 성현(成俔)이 아뢰기를,

"본관(本館)1208) 에는 여러 학생을 가르칠 만한 사유(師儒)가 없으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사유와 전경(專經)하는 사람이 이따금 강문(講問)하는 일을 내려 주어서 권장해 힘쓰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좌우에게 물으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김구(金鉤)·김말(金末) 등과 같은 이가 있어서 모두 사유(師儒)로 뽑혀 임명되었고, 정자영(鄭自英) 등도 그 직무에 오래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 일을 싫어하고 괴로와합니다. 진실로 성현의 말과 같이 사유와 전경(專經)하는 사람이 강문(講問)하는 것을 자주 내려 주면 거의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고르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성현이 아뢰기를,

"교서관(校書館)에 책지(冊紙)가 부족하니, 제가(諸家)의 사집(私集)1209) 은 아직 인출(印出)을 정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시독관(侍讀官) 황계옥(黃啓沃)이 아뢰기를,

"이에 앞서 제가의 사집을 자손이 고을에서 더러 개간(開刊)하였는데, 국가에서도 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 《사가집(四佳集)》은 그 수량이 지나치게 많은데, 그 인출하는 종이는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오니, 청컨대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23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54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군사-통신(通信)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 과학-지학(地學) / 의약(醫藥)

  • [註 1206]
    연대(煙臺) : 조선조 세종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 지대에 설치한 봉수대(烽燧臺). 적이 나타나면 연기와 횃불로 다른 연대에 알리고 신포(信砲)를 쏘아 인근 주민들에게 알려서 성(城)이나 보(堡)에 들어가 피하게 하였음.
  • [註 1207]
    조선(漕船) : 조세미(租稅米)와 공물(貢物)을 실어 나르던 나라의 배.
  • [註 1208]
    본관(本館) : 성균관.
  • [註 1209]
    사집(私集) : 개인의 문집(文集)이나 시집.

○御經筵。 吏曹判書成俊回自慶尙道, 以彌助項地圖來上, 仍入侍。 上問曰: "卿往視之何如?" 對曰: "彌助項三千鎭四十餘里, 可耕之地, 不過一百結, 而土亦不厚, 無防禦之便。 臣意以謂置兵船四五艘於三千鎭, 令軍官往戍, 則雖不置鎭於彌助項, 亦足以防戍矣。" 上顧問左右, 領事李克培對曰: "臣亦謂此地不宜置鎭。 世祖大王嘗曰: ‘鼠狗之盜, 不足慮。’ 但令節度使謹其防戍爾, 又何置鎭乎?" 上曰: "若如是言, 可不置鎭矣。" 又啓曰: "兩界烟臺卒, 晝夜常守之, 謹其候望, 南方則不然, 晝則不守, 夜則擧火而已, 賊船之來, 何以知之? 請諭節度使, 申明烽燧之法。" 上顧問左右, 克培對曰: "晝則燔燧, 夜則擧烽。 不然則何以知賊變? 成俊之言是矣。" 特進官李秉正啓曰: "義州之人越三津三島, 臣則以爲不可。 前日議造漕船三百艘、大船五十艘, 伐木之役, 一道騷然, 中朝聞之, 則誠非小事。 若有雨水, 三島沈沒, 臣恐農民盡死矣。" 上問左右, 克培對曰: "臣亦謂三島耕墾誠難矣。" 司諫金悰、 持平崔浩啓曰: "以柳子光爲掌樂院提調, 禮樂大事也, 子光雖有才藝, 無物望, 請改差。" 上問左右, 克培對曰: "掌樂提調, 非古者典樂之比, 子光有何不可?" 等又啓曰: "李繼命狂悖無行, 今授正郞, 至爲未便。 請改差。" 上問左右, 克培對曰: "繼命之罪, 非關綱常之事也。" 上曰: "繼命坐罪已久, 不可以一失而廢棄也。" 特進官大司成成俔啓曰: "本館無師儒, 可以訓諸生者, 甚未便。 師儒與專經之人, 時賜講問, 使之勸勉何如?" 上問左右, 克培對曰: "祖宗朝有如金鉤金末等, 皆以師儒擇任。 鄭自英等亦久於其職, 人皆厭苦, 誠如成俔之言。 師儒與專經之人, 數賜講問, 則庶可得其人矣。" 上曰: "在擇人而已。" 啓曰: "校書館冊紙不足, 諸家私集, 姑停印出何如?" 侍讀官黃啓沃啓曰: "前此諸家私集, 或子孫開刊於州邑, 而國家亦不禁之。 今者《四佳集》厥數猥多, 其印出之紙, 皆出於民力, 請停之。" 上曰: "爾言然矣。"


  • 【태백산사고본】 36책 23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548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군사-통신(通信) / 군사-관방(關防) /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 과학-지학(地學) / 의약(醫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