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령 이녹숭 등이 노사신을 추문할 것과 해인사에서 정부를 징발한 것을 추문할 것·한건의 직책을 고칠 것 등을 청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이녹숭(李祿崇)이 아뢰기를,
"신이 강학손(姜鶴孫)을 신문(訊問)한 문안(文案)을 보았더니, 노사신(盧思愼)에게는 관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간인(外間人)이 모두 노사신에게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노사신은 지위가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는데, 만약에 변정(辨正)하지 않는다면, 노사신 또한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영사(領事) 윤호(尹壕)가 대답하기를,
"신은 다만 듣자니, 노사신의 아내가 계집종[婢]을 보내어 말을 전했을 뿐이므로 노사신은 아는 바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도 또한 정승(政丞)이 강학손의 옥사(獄事)에 관계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데, 외간인은 그 사실도 모르고 망령된 마음으로 헤아릴 뿐이다. 남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삼공을 옥에 가둠이 가하겠는가?"
하였다. 정언(正言) 조구(趙球)가 아뢰기를,
"강학손이 처음에 공술(供述)하기를, ‘노사신이 계집종[婢] 물비(勿非)를 보내어, 신의 집에 두 번이나 청하였다.’고 하고, 그 뒤에 공술하기를, ‘신이 노사신을 만나 보고 중문(中門)을 나오는데, 계집종 물비가 노사신의 처의 말이라고 하며 와서 고하기를, 「김흥수(金興守)의 일은 마땅히 속히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 전후(前後)에 공술한 바가 다름이 있으니, 이것이 의심할 만합니다. 청컨대 노사신에게 물으시어 여러 사람의 의심을 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학손은 자신이 대죄(大罪)를 범하고, 거짓으로 정승(政丞)을 끌어들여 자기의 죄를 나누려고 하였으니, 그 일은 심히 명백하다. 또 강학손은 남에게 뇌물을 받았으니, 그 심술(心術)을 알 만하다. 어찌 그 말을 믿고 죄없는 대신을 가벼이 국문하겠는가? 강학손은 거짓으로 대상(大相)을 끌어들였으니, 마땅히 그 죄도 아울러 받아야만 한다. 외간인(外間人)의 의심은 분변(分辨)을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풀릴 것이다."
하였다. 조구가 아뢰기를,
"해인사(海印寺)를 중창(重創)할 때 군현(郡縣)의 정부(丁夫)를 많이 징발(徵發)하여, 사헌부(司憲府)에서 지금 추핵(推覈)하는데, 신이 듣자니, 정부들이 기와를 나르다가 기와가 만약에 부서지면 면포(綿布)를 징수(徵收)하여 작폐(作弊)가 많다고 하니, 청컨대 조관(朝官)을 보내어 추국(推鞫)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서진 기와에 대하여 면포를 징수하였다면, 폐단도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관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이녹숭이 아뢰기를,
"승도(僧徒)들이 불우(佛宇)를 많이 창건(創建)하며 이것을 인연하여 폐단을 일으키는데, 지금 학조(學祖)의 작폐(作弊)가 이와 같으니, 먼저 학조를 추문(推問)하여 엄히 징계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현의 정부를 징발한 것이 어찌 학조가 마음대로 한 것이었겠는가? 반드시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의 소위(所爲)일 것이다. 헌부(憲府)에서 근원(根源)을 조사하여 찾아 낸 연후에 마땅히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조구가 아뢰기를,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은 모두 문신(文臣)을 쓰도록 《대전(大典)》에 기재(記載)되어 있습니다. 한건(韓健)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으면, 직책이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겸하여야 하는데, 문신이 아니면서 이 직책에 있는 것은 심히 옳지 아니하며, 한건 또한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를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다. 윤호가 대답하기를,
"문신이 아니면서 도승지(都承旨)가 된 자는 이 앞서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쓰는 것은 마땅히 재주에 따라서 써야 한다. 만약에 문신이 아니라고 하여 혐의한다면, 사람을 쓰는 길이 넓지 못하다. 또한 예전의 예(例)도 있었으니, 나의 뜻에는 무방(無妨)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이녹숭이 아뢰기를,
"신 등은 한건이 도승지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서가 아니라, 문신이 아닌데도 이 직(職)을 제수하는 것은 《대전(大典)》의 법(法)을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한건으로 하여 《대전》의 상법(常法)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도 이미 성례(成例)가 있었다. 또 어찌 직함(職銜)으로 혐의(嫌疑)를 삼겠는가?"
하였다. 검열(檢閱) 이주(李胄)가 아뢰기를,
"신 등은 직책이 일을 기록[記事]하는 데 있사온데, 무릇 신료(臣僚)들이 일을 아뢸 때에 땅바닥에 엎드리어 머리를 들지 못하므로, 다만 그 음성(音聲)만 듣고 용모(容貌)를 보지 못하니, 어찌 능히 그 사람을 분변(分辨)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인하여 〈일을 기록한 데〉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신(史臣)은 직필(直筆)을 귀(貴)하게 여기는 것이온데,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서도 감히 기록하니, 신은 미안(未安)한 바입니다. 또 옛일[古事]을 가지고 상고하면, ‘발연(發然)히 얼굴빛이 변하였다.’ 함이 있고, ‘용모(容貌)가 태연자약하다.’ 함이 있고, ‘성색(聲色)이 모두 노기(怒氣)를 띠었다.’ 함이 있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함이 있고,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함이 있으니, 옛날의 사신(史臣)은 용색(容色)과 언모(言貌)를 모두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전하였으니, 땅에 엎드리어 일을 기록하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서서 일을 기록하려 하는가?"
하였다. 이주가 아뢰기를,
"신은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서 일을 기록하면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고, 또 옛날에는 좌사(左史)가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史)가 일을 기록하였으니, 옛날의 사관(史官)은 반드시 좌우(左右)로 나눈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또 듣자오니, 중국[中朝]의 사관(史官)은 지필(紙筆)을 잡고 황제(皇帝)의 좌우(左右)에 선다고 합니다. 중국의 제도도 이미 이와 같으니, 땅바닥에 엎드리어 일을 기록하는 것은, 신은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이 잘못 기록하는 것을 어찌 직필(直筆)이라 하겠는가? 이 말은 과연 옳다."
하고, 이어서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어떠한가?"
하였다. 윤호가 대답하기를,
"비록 엎드려서 일을 기록한다 하여도 무슨 일인들 기록하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특진관(特進官) 이극균(李克均)은 아뢰기를,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좌우로 나누어 입시(入侍)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검토관(檢討官) 김전(金詮)은 아뢰기를,
"사신(史臣)이 땅에 엎드리는 것은, 신은 불가하게 생각합니다. 고사(古史)에 ‘이필자(珥筆者)864) ’라고 한 것을 어느 사람이 ‘사관(史官)’이라고 하였으니, 옛날의 사관은 엎드리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뜻으로는, 사관 두 사람이 지필(紙筆)을 가지고 좌우에 꿇어앉으면 조의(朝儀)에도 문란(紊亂)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이경동(李瓊仝)은 아뢰기를,
"사관으로 하여금 지필(紙筆)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일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사관은 앉아서 일을 기록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231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51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상-불교(佛敎)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註 864]이필자(珥筆者) : 붓을 꽂은 사람. 옛날의 사관(史官)은 붓을 관(冠) 옆에 꽂고 있다가 필요할 때에 이를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함.
○壬子/御經筵。 講訖, 掌令李祿崇啓曰: "臣觀姜鶴孫訊鞫文案, 於盧思愼似不干涉。 然外間人, 皆有疑於思愼, 思愼居位三公, 若不辨正, 則思愼亦豈安心?" 上問左右, 領事尹壕對曰: "臣但聞思愼之妻遣婢通言耳, 非思愼所知也。" 上曰: "卿等亦知政丞不干於鶴孫之獄, 外間人未知其實, 妄意量度耳。 欲釋人疑而下三公於獄, 可乎?" 正言趙球曰: "鶴孫初供曰: ‘思愼遣婢勿非, 再請於臣家。’ 其後供曰: ‘臣往見思愼, 退出中門, 婢勿非以思愼妻之言來告曰: 「興守之事, 當速爲之。」 其前後所供有異, 此可疑也。 請問思愼, 以快衆疑。" 上曰: "(鴉孫)〔鶴孫〕 身犯大罪, 誣引政丞, 欲分己罪, 其事甚明。 且鶴孫受人賄賂, 其心術可知。 豈可信其言, 而輕鞫無辜大臣乎? 鶴孫誣引大相, 亦當竝受其罪。 外人之疑, 不待辨而自釋矣。" 球曰: "海印寺重創時, 多發郡縣丁夫, 憲府今方推覈。 臣聞丁夫輸瓦, 瓦若殘缺徵綿布, 作弊多端。 請遣朝官推鞫。" 上曰: "破瓦徵布, 弊亦不少。 然遣朝官爲何如也?" 祿崇曰: "僧徒多創佛宇, 因緣作弊。 今學祖作弊如此, 先推學祖, 痛懲爲便。" 上曰: "發郡縣丁夫, 豈學祖所擅爲? 必監司、守令所爲。 憲府窮推其源, 然後當抵罪。" 球曰: "弘文館、藝文館竝用文臣, 載在《大典》。 韓健爲都承旨, 職兼藝文直提學, 非文臣而居是職, 甚不可。 健亦豈安然冒處乎? 請改之。" 上問左右, 壕對曰: "非文臣而爲都承旨者, 前此多有之。" 上曰: "用人當隨其材而用之。 若以非文臣爲嫌, 則用人之路不廣矣。 且有古例, 予意以爲無妨。" 祿崇曰: "臣等非以健爲不堪都承旨之任, 非文臣而拜是職, 是毁《大典》之法也。 以一健而毁《大典》常法, 恐未可也。" 上曰: 祖宗朝已有成例, 又豈以職銜爲嫌乎?" 檢閱李冑啓曰: "臣等職在記事, 凡臣僚啓事之時, 伏地不擧頭, 但聞其音, 不覩其貌,豈能辨其人哉? 以此不能無疑。 史貴直筆, 疑而敢記, 臣所未安。 且以古事考之, 有曰 ‘勃然變色’, 有曰 ‘容貌自若’, 有曰 ‘聲色俱厲’, 有曰 ‘有慙色’, 有曰 ‘王顧左右而言他。’ 古之史臣竝記其容色言貌, 以傳于後。 伏而記事, 恐未可也。" 上曰: "然則欲立而記事乎?" 冑曰: "臣非欲立也。 伏而記事, 有疑於心。 且古者左史記言, 右史記事, 古之史官必分左右明矣。 臣又聞中朝史官秉紙筆, 立帝之左右。 中朝之制旣如是, 則伏而記事, 臣竊以爲不可。" 上曰: "史官誤錄, 豈曰直筆? 此言果是。" 仍問左右曰: "何如?" 壕對曰: "雖伏而記事, 何事不可記?" 特進官李克均曰: "令史官分左右入侍何如?" 檢討官金詮曰: "史臣伏地, 臣意以謂不可。 古史曰: ‘珥筆者誰? 曰史官也。’ 古之史官非伏也明矣。 臣意謂史官二員, 將紙筆跪于左右, 則於朝儀亦不紊也。" 同知事李瓊仝曰: "令史官將紙筆, 入侍記事爲便。" 上曰: "自今史官坐而記事。"
- 【태백산사고본】 36책 231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51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상-불교(佛敎)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