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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29권, 성종 20년 6월 27일 갑인 3번째기사 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대간 등에게 임금이 불교를 숭상한다고 믿는 까닭을 말해 보도록 하다

임금이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 관원을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경들이 요즈음 나를 불씨(佛氏)를 숭신(崇信)한다고 하였으니, 내가 숭신한다는 까닭을 각각 들어 말하라. 내가 듣고자 한다."

하니, 대사헌(大司憲) 박건(朴楗)이 아뢰기를,

"부처는 족히 믿을 것이 못되니, 신이 눈으로 본 바입니다. 세조(世祖)께서 부처를 좋아하시어 새로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복전(福田)591) 을 구하셨는데, 신 등이 생각하건대 부처가 만약 신령함이 있으면 세조께서 마땅히 백년의 수명을 누려야 하실 것인데, 원각사가 겨우 이루어지자 세조께서 안가(晏駕)592) 하셨으니, 신민(臣民)이 누가 원각사를 허물어뜨리고 승도(僧徒)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성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크게 하시려는 뜻을 가지시고 승인(僧人)의 방납(防納)593) 하는 법을 금하고 원각사의 문을 지키는 군사를 파하시니 온 나라 사람이 전하의 뜻을 밝게 알고는 말하기를, ‘인심을 바로잡고 요사한 말을 종식시키는 것이 바로 이때다.’라고 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하여 유생(儒生)과 승도(僧徒)가 서로 다투면 유생을 가두어 곤욕(困辱)시키고 그 길을 막아서 끊었으며 절이 허물어지는 것이 있으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군졸을 거느리고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숭상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부제학(副提學) 허계(許誡)는 아뢰기를,

"주상(主上)께서 처음 정치하실 때에는 진실로 훌륭하셨습니다. 단지 요즈음 유생과 승도가 서로 다툰 것으로 인하여 흥덕사(興德寺) 뒷길을 막도록 명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창경궁(昌慶宮)청룡(靑龍)594) 은 풍수설(風水說)에서 꺼리는 바이므로 막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시고, 원각사공해(公廨)595) 가 아니므로 비록 허문다 하더라도 괜찮은데 반드시 군졸(軍卒)을 써서 수리하시니, 《춘추(春秋)》에 무릇 흥작(興作)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한 것은 백성의 힘을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제 부처의 집을 위하여 역사를 감독하는 것이 이에 이르니, 신은 아마도 소민(小民)이 성상께서 불교에 뜻을 두신다고 말할 듯합니다.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를 혁파(革罷)하여 후세를 위한 계책을 남기셨는데, 원각사는 바로 세묘(世廟)596) 때 세운 것입니다. 어찌하여 태종의 만세의 계책을 버리시고 세묘의 한때의 잘못된 거사(擧事)를 따르십니까? 태종께서 절을 혁파하시면서도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후세에 부처에게 아첨하는 임금이 있어서 금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셨으니, 이 말은 후세의 자손이 마땅히 깨우치고 살펴야 할 바입니다. 태종의 이 말씀을 본받으시면 과실[過擧]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응교(應敎) 민사건(閔師騫)은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내가 부처를 좋아하지 아니한다.’고 하셨는데, 신은 생각하건대 ‘성중(城中)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상투의 높이가 한 자가 된다.’고 하였으니, 위에서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함이 있으니, 그 동기(動機)가 두려워할 만합니다. 이제 흥덕사(興德寺) 뒷길을 막았으니 소민들이 이를 보고는 성상께서 불교에 뜻을 두신다고 하면서 서로 바람을 따라 휩쓸릴 것입니다."

하고, 직제학(直提學) 이세광(李世匡)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일찍이 신 등의 말을 옳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옳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채용하지 아니하시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자, 말을 아직 마치지도 아니하였는데, 임금이 노(怒)한 음성으로 말하기를,

"여러 말이 가리키는 바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옛사람이 주(紂)597) 를 논하기를, ‘말은 그릇된 것을 꾸미기에 충분하고 지혜는 간(諫)하는 말을 거절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으니, 내가 이제 경 등과 더불어 서로 변명하는 것은 미덕(美德)이 아닐 듯하다. 그러나 바야흐로 말하려고 하는데 어찌 갑자기 그칠 수 있겠는가? 지금 홍문관(弘文館)의 상소에 이르기를, ‘이제 흥덕사 뒷길을 막고 흥판(興販)하는 중을 금하지 말게 하고, 해인사(海印寺)를 수리하고 안암사(安巖寺)를 짓는다.’고 하였으니, 나는 이 말이 어떤 일을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그리고 흥판하는 중은 금할 수 없다. 임금은 하민(下民)의 주인이 되었는데 무릇 백성으로서 부모가 있는 자는 모두 길러서 편안하게 하려고 하는데 중만은 우리 백성이 아닌가? 부모 있는 자가 가난하여 기를 수 없으면 흥판이 아니고 무엇에 의뢰하겠는가? 만약 엄하게 금하고 막으면 저들이 장차 그 곤궁함을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서 도둑이 될 것이니 그 해가 됨이 어찌 크지 아니하겠는가? 만약 사리(事理)를 따지지도 아니하고 그 실정(實情)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일체로 금단하면 사세(事勢)에 방해되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요(騷擾)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흥덕사 뒷길은 궁궐을 범함이 있어서 이 때문에 막은 것인데, 마침 유생(儒生)을 가두고 국문하는 때를 만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하였을 뿐이며,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해인사를 중창(重創)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 이 절은 바로 세조(世祖) 때 대장경판(大藏經板)을 간직하고 정희 왕후(貞熹王后)께서 학조(學祖)에게 위임하셨는데, 전일에 학조가 와서 아뢰기를, ‘세조께서 대장경판을 이 절에 간직하셨는데 정희 왕후께서 「대장경판은 선왕(先王)께서 판각(板刻)하신 바이고 왜사(倭使)가 구하는 바이므로 잘못 간직하여 파손되도록 할 수 없다.」고 하시며 노승(老僧)에게 명하여 이 절을 감수(監守)하게 하셨는데, 이제 장차 허물어지려고 하니 노승의 힘으로는 수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대장경》은 왜인이 요구하는 것인데 만약 판본(板本)이 없으면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여겨 특별히 수리하도록 명한 것이니, 경판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인가? 안암사(安巖寺)를 짓는 것은 내가 본디 알지 못하였는데 그대들이 무슨 근거로 이를 말하는가? 《대전(大典)》에 이르기를, ‘옛터가 있는 것은 중수(重修)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 법에 의거하여 중수함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느 때에 일을 시작해서 어느 때에 일을 마쳤는가를 알지 못하는데 내가 하지 아니한 일을 가지고 경 등은 불교를 숭상해 믿는다고 하니, 내가 비록 이런 마음이 없더라도 숭상하며 믿는 자취가 경 등의 귀와 눈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세광이 아뢰기를,

"안암사를 중수할 때에 관에서 재목과 기와를 주시므로, 홍문관에서 그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면대해 주시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재목과 기와만 주었는데 경영하였다고 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내가 본래 알지 못하였고, 또 옛터에 중수할 수 있는 법이 《대전》에 실려 있으니 《대전》의 법은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였다. 헌납(獻納) 황계옥(黃啓沃)이 아뢰기를,

치의(緇衣)598) 의 무리는 갑자기 그 뿌리를 영구히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이 되는 자에게 정전(丁錢)을 바치고 송경(誦經)을 시험한 뒤에 그 자신에게 도첩(度牒)을 주도록 허락하였으니, 중이 되는 길을 어렵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창건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새로 창건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며, 옛터에 반드시 중수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암사를 중수하는 것은 국가와 관여됨이 없는데, 경 등이 이처럼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수찬(修撰) 박증영(朴增榮)이 아뢰기를,

"안암사를 지을 때에 관(官)에서 재목과 기와를 주었으니 국가에서 영건(營建)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의 뜻은 자기가 말한 바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각사(圓覺寺)는 선왕께서 깊이 뜻을 기울이신 바이고 정희 왕후께서 늘 하교하시기를, ‘마땅히 허물어지는 대로 따라 보수하여 끝내 황폐하여 허물어지는 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 하셨다. 내가 왕후의 명을 받아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데, 이제 허물어진 것을 보고서 수리하지 아니하는 것은 마음에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겠다. 만약 부제학(副提學)이 말한 바와 같이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를 혁파하신 뜻을 마땅히 본받아야 옳다고 하면, 나는 생각하기를, 태종께서 절을 혁파하시면서 이종(二宗)599) 은 남겨 두었는데, 이종이 만약 허물어져서 수리하고자 하면 경 등은 또한 나를 태종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잘못이라고 여기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박건(朴楗)이 아뢰기를,

"처음에도 잘하고 마지막에도 잘하여야 이것이 아름다운 덕(德)인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크게 처음과 같이 아니하시니 실망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종묘(宗廟)를 수축(修築)하는 때를 당하여 백성을 동원하여 부역(赴役)하게 하는데, 군졸을 활용하여 불우(佛宇)를 수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민사건(閔師騫)은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가 되어 괴산(槐山) 지경을 지나는데 어떤 중이 소와 말 10여 필을 가지고 행상(行商)을 하면서 길가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승인(僧人)의 흥판(興販)이 매우 성하게 유행하니, 금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으나, 감사(監司)가 마땅히 다스릴 것이니 어찌 갑자기 이를 위해 별도로 한 가지 법을 세우겠는가? 한 가지 법을 세우면 한 가지 폐단이 생기는 것이니, 이제 승도(僧徒)로 하여금 소나 말을 몰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면 소요(騷擾)가 일어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박증영이 아뢰기를,

"불교는 청정(淸淨)한 것을 종(宗)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흥판(興販)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중은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 또 중은 우리 백성이 아닌가? 중이 만약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면 이것도 우리 백성인데 어찌 굶어 죽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불교를 믿지 아니하시고 세종(世宗)께서 세우신 내불당(內佛堂)을 특별히 명하여 옮기게 하였으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이 모두 하례하기를 장차 큰 일을 하실 임금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끝까지 잘하지 못하시고서 불우(佛宇)를 수리하고 창건하는 것이 없는 해가 없으니, 신 등이 시종(侍從)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요(堯)·순(舜)같은 임금이 되게 하려는 뜻이 어찌 옛사람에게 뒤떨어지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 원각사는 비록 조종(祖宗)께서 세운 바라고 하더라도 조종의 세운 바가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이제 비록 반드시 허물어뜨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허물어진 대로 두고 수리하지 말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예전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옥청궁(玉淸宮)과 소응궁(昭應宮)을 창건하였는데, 재(災)가 있자, 인종(仁宗)이 그대로 두고 수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송나라 3백년 사이에 훌륭한 임금과 어진 임금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인종을 첫번째로 일컬으면서 이제까지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를 그치지 아니합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그 허물어지는 대로 두고 수리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인종 혼자만이 아름다움을 앞에서 오로지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께서 세운 바를 어찌 감히 차마 허물어지게 하겠는가?"

하였다. 수찬(修撰) 김준손(金駿孫)이 아뢰기를,

"신이 해인사를 수리하는 것을 보니, 백성의 노력을 활용하는 데 몹시 어수선하며 소요스럽습니다. 모르기는 하겠습니다만, 예조에서 전교를 받아서 하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이런 일이 없었다. 승지(承旨)는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민사건(閔師騫)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일 그 도리가 아니면 어찌 3년을 기다리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선왕(先王)께서 이 절을 잘못 창건하였으니 따라서 수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생각해 보라. 이제 양전(兩殿)이 위에 계시면서 정희 왕후의 유교(遺敎)를 들으시고 여러번 말씀하시는데, 내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세광(李世匡)이 아뢰기를,

"관에서 재목과 기와를 주어서 이미 안암사(安巖寺)를 지었고, 해인사(海印寺)를 일찍이 판당(板堂)만 수리한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온 절을 수리하며, 또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하지 아니하여 그 무리들로 하여금 민간에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으니, 유(儒)와 불(佛)이 성하고 쇠하는 기틀[機]이 오늘에 있으므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함이 예전에도 있었는가? 중만이 홀로 우리 백성이 아니어서 그 흥판을 금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이세광이 아뢰기를,

"부역(賦役)을 도피하고 노는 자가 어찌 백성이 되겠습니까?"

하고, 박증영(朴增榮)은 아뢰기를,

"사민(四民)600) 의 밖에 있으며,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없는 자인데 어찌 우리 백성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민사건은 아뢰기를,

"어제 상교(上敎)를 듣건대 내일 마땅히 불러 보겠다고 하시기에, 신 등은 생각하기를, 반드시 천심(天心)601) 을 돌이킬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 그렇지 아니하니 크게 실망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깊이 생각해 보라. 생각을 깊이하지 아니한 때문에 말한 바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장령(掌令) 표연말(表沿沫)이 아뢰기를,

"깊이 생각하면 능히 정미(精微)한 극치에 이르는데, 신 등이 말한 바는 정사와 정미한 것이고 생각의 깊은 것입니다. 다시 생각할 바가 없으니 곧 성명(成命)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하고, 황계옥(黃啓沃)은 아뢰기를,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여러날 뜰에 서서 간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였는데 두 대비(大妃)께서 어찌 듣지 아니하셨겠습니까? 장차 반드시 ‘주상께서 불교에 관한 것 때문에 간(諫)함을 들음이 이에 이르렀다.’고 여기시면서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가지실 것이니, 이것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신 등의 말을 따르소서."

하고, 허계(許誡)는 아뢰기를,

"오늘과 같은 날은 두번 만나기 어려운데 오도(吾道)602) 와 이단(異端)의 성쇠(盛衰)를 결정하는 것이 오늘에 달려 있으니, 오늘에 만약 간하여 그치게 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곧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고, 강경서(姜景敍)는 아뢰기를,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흥작(興作)을 함부로 일으켜서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장차 노대(露臺)를 수리하려고 하다가 백금(百金)의 비용을 아껴서 그쳤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장차 낙양(洛陽)의 궁실(宮室)을 수리하려고 하다가 간하는 말을 듣고는 곧 그쳤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신 등의 말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밝지 못하여 깊이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실수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수공(李守恭)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동학(東學)603) 이 허물어졌는데 재사(齋舍)만 겨우 짓고 원장(垣墻)은 아직 쌓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불우(佛宇)에 뜻을 두시는데 학궁(學宮)604) 의 퇴폐(頹廢)가 이와 같으니, 빌건대 해조(該曹)에 명하여 빨리 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해조(該曹)의 책임인데 어찌하여 내게 말하는가? 해조로 하여금 검거(檢擧)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원각사(圓覺寺)를 수리하면서 유사(有司)가 일을 감독하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는데, 언관(言官)이 항의하여 아뢰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사간(司諫) 김전(金琠)만 홀로 침묵하고 한마디 말도 없었으므로, 이때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승도(僧徒)의 방납(防納)하는 법을 금하고 원각사파문 군졸(把門軍卒)605) 을 혁파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흥덕사(興德寺)의 길을 막게 하고 절에 올라간 유생(儒生)을 가두었으니, 위정공(魏鄭公)606)십점(十漸)607) 을 상소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229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492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사상-불교(佛敎) / 건설-건축(建築)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외교-왜(倭) / 상업(商業)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註 591]
    복전(福田) : 부처를 공양하여 얻는 복(福)을 말함.
  • [註 592]
    안가(晏駕) : 승하(昇遐).
  • [註 593]
    방납(防納) :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土産)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공인(貢人)들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값을 백성에게서 갑절이나 불려 받던 일.
  • [註 594]
    청룡(靑龍) : 주산(主山)에서 왼쪽으로 뻗어나간 산맥을 이르는 말.
  • [註 595]
    공해(公廨) : 공청(公廳).
  • [註 596]
    세묘(世廟) : 세조(世祖).
  • [註 597]
    주(紂) : 은(殷)나라의 폭군(暴君).
  • [註 598]
    치의(緇衣) : 중이 입는 검은 물을 들인 옷. 곧 중을 이름.
  • [註 599]
    이종(二宗) :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 [註 600]
    사민(四民) : 사(士)·농(農)·공(工)·상(商).
  • [註 601]
    천심(天心) : 임금의 마음.
  • [註 602]
    오도(吾道) : 유교의 도(道).
  • [註 603]
    동학(東學) : 조선조 때 유생(儒生)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서울에 둔 사부 학당(四部學堂)의 하나. 사부 학당은 중학(中學)·동학(東學)·남학(南學)·서학(西學)임.
  • [註 604]
    학궁(學宮) : 학교(學校).
  • [註 605]
    파문 군졸(把門軍卒) : 문을 지키는 군줄.
  • [註 606]
    위정공(魏鄭公) : 당나라 현신(賢臣)위징(魏徵).
  • [註 607]
    십점(十漸) : 위징(魏徵)이 당 태종(唐太宗)에게 올린 10가지의 경계. 군주(君主)가 소홀히 하면 작은 일이 점점 커져 큰 화(禍)가 되는 일로서, 검소(儉素)하고 덕음(德音)을 듣는 것 등 10가지 일임.

○上引見臺諫、弘文館, 謂曰: "卿等近日謂予崇信佛氏, 予之所以崇信之義, 其各歷言之。 予欲聽焉。" 大司憲朴楗啓曰: "佛不足信, 臣所目覩。 世祖好佛, 新作圓覺寺, 以求福田, 臣等謂佛若有靈, 世祖當享百年, 圓覺纔成, 世祖晏駕。 臣民孰不欲毁圓覺而逐僧徒也? 聖上卽位之初, 奮大有爲之志, 禁僧人防納之法, 罷圓覺守門之卒, 一國之人, 洞知殿下之意, 曰: ‘正人心、息邪說, 此其時也。’ 近年以來, 漸不如初, 儒僧相校, 則囚儒生而困辱之, 塞其路而防絶之, 寺宇有毁, 則命繕工監領卒以董役之, 此非崇信而何?" 副提學許誡曰: "主上初政固善, 但近因儒僧相校, 命塞興德後路, 而曰: ‘昌慶宮靑龍風水所忌, 不可不塞。’ 圓覺寺非公廨, 雖毁之可也, 而必用軍卒以修之。 《春秋》凡有興作必書, 重民力也。 今爲佛宇董役至此, 臣恐小民謂聖上, 留意於佛氏矣。 太宗革罷寺社, 貽謀後世, 而圓覺寺世廟時所建也。 奈何棄太宗萬世之謀, 而遵世廟一時之謬擧乎? 太宗革寺社, 而猶曰, 恐後世有佞佛之主, 而無以禁之, 此言後世子孫之所當警省也。 法太宗此言, 則無過擧矣。" 應敎閔師騫曰: "上嘗云予不好佛。 臣謂城中好高髻, 四方高一尺, 上有所好, 下必有甚, 其機可畏也。 今塞興德後路, 小民觀此, 以上留意於佛, 相與隨風而靡矣。" 直提學李世匡曰: "殿下嘗以臣等之言爲是。 是其言而不用之, 可乎?" 言未畢, 上厲聲曰: "群言之所指, 予豈不知乎? 昔人論曰: ‘言足以飾非, 智足以拒諫。’ 予今與卿等相辨, 似非美德。 然方欲言之, 安得遽止哉? 今弘文館上疏云: ‘今塞寺後之路, 勿禁興販之僧, 修海印, 營安巖。’ 予未知此言, 據何事言之歟? 興販之僧不可禁也, 君爲下民之主, 凡民之有父母者, 皆欲其養而安之, 僧獨非吾民乎? 有父母者貧乏無以養之, 則非興販何所賴哉? 若嚴其禁防, 則彼將不堪其窮, 起而爲盜矣, 其爲害, 豈不大哉? 若不究事理, 不恕其情, 而一切禁斷, 則非但有妨事勢, 抑有騷擾之弊。 興德後路有犯宮闕, 是以塞之, 而適會於儒生囚鞫之時, 故人疑之耳, 非爲崇信佛氏而然也。 重創海印, 在所不得已也。 此寺乃世廟時藏《大藏經》板, 貞熹王后屬諸學祖。 前日學祖來啓云: ‘世祖《大藏經》藏于此寺。’ 而貞熹王后以爲經板乃先王所刊, 而使所求, 不可慢藏以致破毁, 乃命老僧, 監守此寺, 而今將頹毁, 老僧力不能理。 予聞此言, 以爲《大藏經》倭人之所嘗求, 若無板本, 則無以應求, 特命修之, 爲經板也。 此其得已之事乎? 營安巖寺, 予本不知, 爾等據何而言此也? 《大典》云: ‘有古基者, 許令重修。’ 人有據此法而重修矣。 予則不知其經始於何時而訖功於何時也。 以予不爲之事而卿等謂之崇信釋敎, 予雖無是心, 無乃崇信之跡, 見於卿等之耳目耶?" 世匡曰: "安巖寺重創時, 官給材瓦, 弘文館諫其不可, 而至賜面對矣。" 上曰: "但給材瓦而已, 謂之營可乎? 然此事予本不知。 且重修古基之法, 載在《大典》, 而《大典》之法, 自祖宗朝始矣。" 獻納黃啓沃曰: "緇衣者流, 不可卒然永絶根本。 故其爲僧者, 納丁錢、試誦經, 然後許度其身, 所以難其爲僧之路也。 其禁新創者, 所以欲其毋得創新, 非所以必修其古基也。" 上曰: "安巖重創, 無與國家, 而卿等如此言之何也?" 修撰朴增榮曰: "營安巖時, 官給材瓦, 非國家營建而何?" 上曰: "臺諫、弘文館之意, 以爲己之所言是矣, 而予不聽納, 故如此云耳。 然圓覺寺先王所深注意,而貞熹王后每敎曰當隨毁隨補, 不可終至廢毁。 予受命於王后, 言猶在耳。 今見頹毁不修, 心實不忍。 若如副提學所言, 太宗革罷寺社, 宜可法之。 予意謂太宗革寺社而存二宗, 二宗若毁而欲修之, 則卿等其亦謂我法太宗而不以爲非乎?" 朴楗曰: "有始有終, 斯爲美德。 今殿下大不如初, 不勝缺望。 今當宗廟修築, 括民赴役, 而用軍卒以理佛宇, 何也?" (師蹇)〔師騫〕 曰: "臣往年爲忠淸都事, 過槐山境, 有僧持牛馬十餘, 行商而休道傍。 僧人盛行興販, 禁之爲便。" 上曰: "爾言則是矣。 然監司自當治之, 何遽爲此別立一法哉? 一法立, 一弊生, 今使僧徒毋得牽牛馬行販, 不其騷擾乎?" 增榮曰: "佛敎以淸淨爲宗, 何用興販爲哉?" 上曰: "食足然後可以修淸凈之敎矣。 若如爾言, 則僧將不食而餓死乎? 且僧非吾民乎? 僧若娶妻而生子, 則是吾民也, 安可使之餓死乎?" 副校理姜景叙曰: "殿下卽位之初, 不信佛敎, 世宗所建內佛堂, 特命移之, 一國臣民皆賀, 以爲將大有爲之君也。 今不克終, 修創佛宇, 無歲無之。 臣等居侍從之列, 而使吾君爲之君之意, 豈下於古人哉? 臣謂圓覺寺雖祖宗所建, 而祖宗之所建, 豈爲是哉? 今雖不可必毁, 因其毁而勿修之可也。 昔 眞宗玉淸昭應宮而災, 仁宗因而勿修。 有三百年間, 聖君賢主不爲不多, 而以仁宗爲稱首, 至今誦美不置。 今殿下亦因其毁而勿修焉, 則仁宗奚獨專美於前哉?" 上曰: "祖宗所建, 安敢忍毁之哉?" 修撰金駿孫曰: "臣見海印寺修理, 用民力甚紛擾。 未知禮曹受敎而爲之歟?" 上曰: "固無是事。 承旨其考以啓。" 師騫曰: "古云: ‘如其非道, 何待三年?’ 先王謬創此寺, 不可從而修之也。" 上曰: "爾等其思之。 今兩殿在上, 聞貞熹王后之敎而屢言之, 予不忍之耳。" 世匡曰: "官給材瓦, 已營安巖海印寺。 曾聞只修板堂, 而今則擧一寺而修之。 又不禁僧人之興販, 使其徒遍於閭閻之間。 儒佛盛衰之機在於今日, 不可不愼也。" 上曰: "僧人興販, 古亦有禁耶? 僧也獨非吾民, 乃欲禁其興販歟?" 世匡曰: "逃賦而游手者, 安得而民之哉?" 增榮曰: "居四民之外而無父子君臣者, 豈可謂之吾民乎?" 師騫曰: "昨聞上敎, 以爲明當召見, 臣等以爲必得回天。 而今不爾也, 大失所望。" 上曰: "爾其深思之。 思之不深, 故所言皆如是爾。" 掌令表沿沫曰: "深思則能造於精微之極致。 今臣等所言, 政事之精微, 而思之深者也。 更無所思, 直待成命而已。" 啓沃曰: "臺諫侍從累日立庭, 諫諍不置, 兩大妃豈不聽聞哉? 將必以爲主上以佛之故聞諫至此, 必有不安之心矣, 此亦不可不慮也。 願殿下必從臣等之言。" 許誡曰: "今日難再遇, 吾道異端盛衰, 決在今日。 今日若不諫止, 則明日便不可救也。 願賜成命。" 景叙曰: "古之明君不妄興作, 以傷財害民。 故 文帝將修露臺, 惜百金之費而止之; 唐宗將修洛陽宮室, 而聞諫卽止。 願殿下, 必從臣等之言。" 上曰: "予旣不明, 不能思之深, 故以致此失。 然爾等亦當思之。" 正言李守恭曰: "臣見東學頹廢, 僅營齋舍, 而垣墻未築。 殿下留意佛宇, 而學宮頹廢如此, 乞命該曹亟擧修理。" 上曰: "此該曹之責, 何以言於予乎? 其令該曹檢擧。"

【史臣曰: "圓覺之修, 有司董役甚亟, 而言官抗奏不已, 司諫金琠獨默無一言, 時人鄙之。 上初卽位, 禁僧徒防納之法, 革圓覺把門之卒; 至是塞興德之路, 囚上寺之儒。 魏鄭公疏十漸, 良有以夫!"】


  • 【태백산사고본】 35책 229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11책 492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사상-불교(佛敎) / 건설-건축(建築)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외교-왜(倭) / 상업(商業)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