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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228권, 성종 20년 5월 9일 병인 1번째기사 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화의군 이영이 자기 서자를 종적에 편입시켜 줄 것을 상소하다

이영(李瓔)401) 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은 폐고(廢錮)된 지 이미 오래라 스스로 질곡(桎梏) 속에서 늙어 죽을 것이라 생각하여 광명한 천지를 다시는 볼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을 바람이 낙엽을 휘날릴 때나 밤비가 황량하게 내릴 때면 언제나 애간장이 끊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듯, 피눈물도 말라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가슴아픈 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닙니다. 한 번 옥에 갇힌 이후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에서 착한 생각이 싹튼다고 하더라도 드러내 보일 길이 없었는데, 어찌 감옥 속에서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특별히 성상께서 은총을 돌리시어 경외 종편(京外從便)402) 하도록 명하시었으니 뜻밖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하여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보잘것없는 목숨을 조금 연장해 주셨으니, 이는 모두 전하께서 내려 주신 것입니다. 비록 살아 생전에 갚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뒤 결초 보은(結草報恩)이라도 하겠습니다.

오직 성은에 보답할 줄만 알 뿐인데 다시 무슨 바람이 있겠습니까만, 구차스런 심정을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을 수 없어 우러러 천총(天聰)에 바라는 바입니다. 신에게는 적자는 없고 다만 첩의 몸에서 난 자식 하나가 있사온데 신을 따라 어렵고 곤궁하게 지내와 이미 장년(長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 때문에 아직도 장가를 가지 못했습니다. 사족(士族)은 말할 것 없다 하더라도 백성들까지 혼인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으니 신의 변변치 못한 자질이 자식에까지 누가 미침은 법에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만, 진실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어찌하지를 못하겠사온즉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니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바랍니다.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재위 30여 년에 그 공덕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그 은택을 입지 않은 것이 없는데, 홀로 신의 못난 자식은 신에게 연좌되어 금폐(禁廢)되어 종실(宗室)의 후예가 서민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신의 나이 65세로 머리털과 수염은 백발이 되었고 병이 떠나지 않으니 신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신이 죽는 날 바로 천례(賤隷)로 떨어질 것이니 부자(父子)간의 정리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종실(宗室)로 거두어 주심을 허락하시어 큰 은택을 내려 주소서."

하니,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이영(李瓔)은 선왕조(先王朝)에 죄를 얻어 종적(宗籍)에서 삭제되고 폐고(廢錮)되었다가 다행히 지금 천은(天恩)을 입어 출입하며 편한대로 살게 되었으니, 다시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그의 아들을 선원보(璿源譜)403) 에 다시 넣는 것은 아마도 불가한 듯합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세조(世祖)께서 이영을 소환하려 하셨는데, 신이 일찍이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순(舜)임금상(象)404) 을 대우한 도리도 이와 같을 뿐이다.’ 하시는 하교를 직접 들었으나 처음에는 그 죄명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세조께서 소환하려 하셨으니 반드시 죄가 무거운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미 세조의 뜻을 받들어 서울로 소환했으니 죄는 이미 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민의 대열에 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세종의 육친으로 생존한 사람은 이영(李瓔)뿐이오니 육친에게 친하게 대하는 은혜는 특별히 두터운 것입니다. 옛날 채중(蔡仲)채숙(蔡叔)의 아들이라고 하여 폐하지 않았으며405) , 회남(淮南)의 여러 사람들은 여왕(厲王)을 왕이라 하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406) 고금의 사적을 짐작하시고 정의(情義)를 헤아려서 성상께서 재가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영의 상소(上疏)를 보니, 비록 인정상으로는 박절하나 이미 선왕(先王)께 죄를 얻었으니 내가 추후에 죄를 용서해 줄 성질의 것이 아니다. 노 정승(盧政丞)의 의논은 국법에 합당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세종의 육친은 이영만이 남았을 뿐이니 비목 종적(宗籍)에는 들 수 없으나 또한 서류(庶類)와 같게 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이영의 자손을 천인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원(政院)에서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한언(韓堰)·이계남(李季男)·김극검(金克儉)·한건(韓健)·윤탄(尹坦)이 의논하기를,

"의 자손을 종적에 다시 넣는 것은 불가하오나 종실의 후예[天潢餘派]로서 천역(賤役)을 시키는 것도 미안하다는 성상의 하교(下敎)는 참으로 마땅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22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471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註 401]
    이영(李瓔) : 화의군(和義君).
  • [註 402]
    경외 종편(京外從便) : 유배된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 주어 서울 밖 어느 곳에서든지 뜻대로 살게 하던 일.
  • [註 403]
    선원보(璿源譜) : 조선조 왕실의 계보.
  • [註 404]
    상(象) : 순임금이 이모제(異母弟).
  • [註 405]
    채중(蔡仲)은 채숙(蔡叔)의 아들이라고 하여 폐하지 않았으며 : 채중(蔡仲)은 주(周)나라에 반기(叛旗)를 든 채숙(蔡叔)의 아들이었으나. 주공(周公)이 그가 현명하다고 성왕(成王)에게 고하여 채국(蔡國)의 제후로 봉(封)한 고사를 말함.
  • [註 406]
    회남(淮南)의 여러 사람들은 여왕(厲王)을 왕이라 하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 여왕(厲王)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지친(至親)이라고 가까이 하자, 교만하게 굴면서 법을 받들지 않는 등 방자한 행동을 하였으며, 뒤에 모반하였다가 발각이 되자, 그를 촉(蜀)의 엄도(嚴道)로 옮겨 유폐시켰는데, 그가 자신이 교만하여 잘못을 알지 못하였다고 뉘우치고 끝내 음식을 먹지 않고 죽은 고사를 말함.

○丙寅/上書曰:

臣廢錮旣久, 自分老死桎梏, 絶無復覩天日之望。 每當秋風搖落之際、夜雨荒涼之時, 未嘗不心摧骨折, 哭盡繼血。 所痛者, 非有他也, 一入牢獄, 與死爲隣, 善念雖萌, 暴白無路, 豈意縲絏之中, 特回日月之光? 命許京外從便, 恩出望外, 感泣何言? 犬馬之齒, 少延晷刻, 玆皆殿下之所賜, 雖不能隕首於生前, 便當結草於身後。 唯知圖報聖恩, 更何所望? 但有區區懷抱不能自默, 仰干天聰。 臣無嫡子, 只有孽息, 從臣於艱難, 窮苦之中, 年齒已長。 以臣之故, 尙未娶婦, 士族則固矣, 雖編氓不欲連姻。 以臣之無狀, 累及於子, 法所當然, 誠不忍舐犢之愛, 仰天而呼, 希賜哀憐。 世宗大王在位三十餘年, 功德在世, 無物不被其澤。 獨臣迷息坐臣禁廢, 派連天潢而降爲民庶。 臣年六十有五, 鬚髮盡白, 病不離身, 死亡無日。 臣死之日, 卽爲流隷矣, 於父子之情, 當如何耶? 伏願許收屬籍, 以垂沛澤。

命議于領敦寧以上。 沈澮尹弼商洪應李克培議: "得罪先王朝, 削籍廢錮, 幸今特蒙天恩, 出入從便, 似無更望。 今收其子還屬璿源, 恐爲不可。" 盧思愼議: "世祖欲召還, 臣曾侍側, 親聞上敎, 以謂是之道如此而已。 初不知罪名如何, 然世祖欲召還, 則意必罪不至重。 今旣追承世祖之志, 召還京師, 則罪已雪矣, 恐不可平民爲齒也。 況世宗遺體, 唯獨存, 親親之恩, 在所特厚。 昔蔡仲不以蔡叔之子而廢之, 淮南諸子不以厲王而不王。 斟酌古今, 揆之情義, 上裁何如?" 傳曰: "觀上疏, 情雖迫切, 然旣得罪於先王, 則非予所得追貰也。 盧政丞之議, 似不合國典。 但世宗遺體, 唯獨在, 雖不可齒於宗籍, 亦不宜同於庶類。 子孫勿從賤若何? 政院議啓。" 韓堰李季男金克儉韓健尹坦議: "之子孫不可復屬宗籍。 但天潢餘派, 賤役未安, 上敎允當。" 傳曰: "可。"


  • 【태백산사고본】 35책 22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11책 471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